[시론(時論)] 공동체의 도래

by 이우 posted Sep 19, 2015 Views 342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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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_이미지.jpg   텃밭이 귀환하고 있습니다. 관상 식물이 자라던 곳에 상추, 가지, 토마토, 삼채, 쑥갓 등 텃밭 작물이 심겨지고 밥상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직접 기른 것을 수확해 먹으려는 '텃밭의 귀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식품업체에서는 텃밭에서 직접 기른 것보다 더 안전하고 건강한 식품을 공급하겠다는 광고를 쏟아내고, 대규모의 농지를 두고 텃밭이라고 위장하는 상술도 등장했습니다. 텃밭이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 트렌드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생긴 하나의 소극(笑劇)입니다.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로 치자면, 엄격한 식품 규제와 안전 관리를 받는 시장의 식품이 개인의 텃밭에서 규제없이 제배한 식품보다 훨씬 낫습니다. 텃밭은 공동체 형식이 산출한 내용입니다.

  마을이 귀환하고 있습니다. 1997년 IMF 외화위기 이후 ‘성장지상주의’ 어두운 단면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회적 관계망이 무너지고 국가는 믿을 수 없다는 자각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관계망을 복원하겠다는 마을의 귀환. 서울시의 경우 2012년 한 해 동안 돌봄 공동체, 에너지 자립 공동체, 대안개발 공동체, 아파트 공동체, 시장공동체, 마을기업 등 마을공동체 400여개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정적 자립. 때를 놓치지 않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지원금으로 그들을 껴안고,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익 창출에 골몰하면서 다시 ‘성장지상주의’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2012년 12월부터 2015년 7월까지 설립된 협동조합이 7,226개. 그러나 그중 절반가량은 ‘사실상 문을 닫았고 정상운영을 하는 곳은 10곳 중 1곳에 불과합니다. 은평마을 공동체는 무사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공동체’가 있기 전에도 이미 국가가 있고, 지방자치단체가 있었으며, 시장상인회가 있었고 아파트 주민자치회가 있었습니다. ‘마을 기업’이 있기 전 이미 ‘기업’이 있었습니다(게젤샤프트, Gesellschaft. 이익사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공동체’가 절실한 것은 지금껏 우리 사회가 개별자를 ‘이익 창출’이라는 자본구조 안에, ‘성공’이라는 사회 동일성 속으로 밀어 넣어면서(환원주의, 나무구조형 사회) 구성원들이 무한경쟁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코뮌, commune)는,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에 따르면 자급자족(에너지?식량?교육?미디어 등)을 실현해야 하고,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에 따르면 임의성과 특이성(개별성)을 존중하는 사회입니다(다양체, 리좀형 사회). 과격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익 창출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텃밭’은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합니다. 정부지원금을 받기 위해 골몰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마을’은 귀환할 수 없습니다. 경제가 하락했다는 통계치에 걱정하고 계신가요? 아이가 공부를 못해 염려하고 계신가요?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만들지 못하고 이미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치와 의미를 재현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공동체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신인류의 대안은 노마드의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은 불, 언어, 종교, 민주주의, 시장, 예술 등 문명의 실마리가 되는 품목을 고안해냈다. 반면 정착민이 발명해낸 것은 고작 국가와 세금, 그리고 감옥뿐이었다. (중략) 인간이라는 종을 탄생시킨, 생물체들의 그 엄청난 뒤얽힘은 이동성, 미끄러짐, 이주, 도약, 여행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역사가 노마드적인 것이 되기 훨씬 전에, 아메바에서 꽃으로, 생선에서 새로, 말에서 원숭이로 진화된 생명의 역사 자체가 이미 노마드적이었다.“(자크 아탈리, Jacques Att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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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역신문공동체 <은평시민신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