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기준으로 내 인생을 분류한다면, 서른 다섯 이전과 쉰 여섯 이후, 이렇게 셋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열 다섯 그 어느 무덥던 여름날, 난 (처음) '책'을 읽었다. 창고 한 귀퉁이를 막아 만든 작고 어두운 방에 앉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데미안'을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수없이 되돌아오면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일주일을. 이러한 인내는 어이없게도, 나를 더욱 훌륭한 나로 여기게 하였다. 이 오랜 풍경은 이 책의 표지와 겹쳐 있다.
서른 다섯 이전에 읽은 책이 열 권을 넘지 않는다 ( 데미안, 밤에 쓴 인생론, 주홍 글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설국...). 이후 매달 한두 권씩 베스트셀러 위주로 읽기 시작했다 ( 이문열, 박완서, 양귀자, 박경리, 신달자, 공지영, 그리고 몇몇 해외 작가들...). 어쩌다가, 어디서 들어봄직한 고전을 간간이 사 들였지만 늘 뒷전으로 밀렸다. '달과 6펜스', '백년 동안의 고독', '백경' (독서 토론에서 재회하다) 등.
집중력이 떨어진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책을 두세 권씩 쌓아 놓고 번갈아 읽는 버릇이 생겼다. 읽을 책이 한 권밖에 없을 때, 불안한 마음에 책장 앞을 서성이다 찾아낸 책 '자기 앞의 생'과 '인간의 굴레' 이다. -- 고아인 '모모'가 묻는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 그러나 이 책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지은이의 반 자전적 소설인 '인간의 굴레' -- 유년의 기억, 소년기의 상처, 신앙에 대한 회의, 청년의 미래에 대한 고뇌, 도전, 열정, 사랑, 역경, 다시 사랑... 사건 중심의 이야기, 철학적 탐미, 인물의 성격과 풍경의 세밀한 묘사 등, 반 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낸다. 아름다운 문체와 탄탄한 문장에서 강한 지성을 느꼈다. 소설이 갖춰야할 모든 요건을 충족시킨, 거의 완벽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다만 결말 부분에서, 작가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이런 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읽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필연은 우연을 가장하여 내 옆에 와 있었다. 만나야할 인연은 언젠간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가 말했다.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적절한 순간에 태어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을 감지하는 것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