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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17년 신었던 신발을 떠나보냅니다

by 이우 posted Dec 15, 2011 Views 12973 Repli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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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8802_1.jpg

 

  큰놈이 네 살, 혹은, 세 살 때 샀던 신발이니

  만17년은 된 것 같습니다.

 

  오전 10시. 가산정보도서관 <책주사> 독서토론 모임이 있습니다.

  내일 가장 추울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길을 나섰지요.

   

  날은 춥고, 길은 멀었습니다. 

  전철 역사 계단을 오르다가, 바닥이 갈라졌습니다.

 

  시간이, 없었죠.

  장렬하게 전사한 신발을 신고, 모임에 갔더니

  사람들, 웃더군요.

  세상에, 저렇게 부서진 신발은 처음 봐.

  저도, 웃었습니다.

 

  몇 년전인가,

  집을 나서다가 아내가, 신발을 보고

  이제 그만 버리지, 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지요.

  신으면 신발인데, 버리면 쓰레기거던.

  옆에 있던 막내 놈, 웃었습니다.

 

  웃음 주었던 신발,

  만17년 동안 나를 받쳐주었던 신발,

  떠나보냅니다.

  • profile
    에피 2011.12.17 11:40

    음~ '신발 송별회'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17년지기 신발에게 신경림 시인의 <나의 신발이> 라는 시를 보냅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신경림 <나의 신발이> 중에서-

    고생했다~ 신발.

  • profile
    이우 2011.12.17 17:09

    ... 신발송별회라는 것도 있나요, 뭐.... 신경림 시인의 시처럼 '늘 잊으면서 살'아서 그래요. 신을 줄만 알았지, 잊고 살았습니다. 신발을 못 신게 되자, '아, 내가 신발을 신고 다녔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바보 같지요?

  • ?
    진백 2011.12.17 12:11

    어느 일간지 칼럼을 보고서 신발을 정리.정돈해야겠다 마음 먹은 때가 2007년 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5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현관에 놓인 신발을 정돈했다. 술에 만취해 필름이 끊긴 날도 신발만은 기필코 정돈했다. 신을 벗어 돌려놓는 게 옳은가 들어 가는 방향대로 놓는 게 옳은가 고민도 했다. 신발 정돈을 시작하고 만 5년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정확히 2달 전쯤부터 작은 아이가 자기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기 시작했다. 개벽이었다.

     

    가장 많은 신발을 내놓는 이는 집사람이다. 많을 때는 4켤레까지 현관에 나온다. 정리하는 자(나)는 한 켤레가 넘으면 불안해서 여분의 신발을 내놓지 않는다. 아이들 역시 한 스타일의 신발을 일정 기간 꾸준히 신는다.

     

    현관에 꼭 있어야 할 신발은 슬리퍼다. 슬리퍼는 자유와 여유를 준다.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거나, 간식을 사러 갈 때, 팬티만 입고 현관에 놓인 아침신문을 얼른 집어 들고 들어올 때 슬리퍼는 요긴하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 일은 발만으로는 부족하다. 벗은 후 손이 한 번 가야 한다. 방금 벗은 내 신발을 정돈하다 보면 옆에 놓인 신발에도 눈이 간다, 몸이 가고 손이 간다. 처음에, 신발 정돈은 발로 시작한다. 좀 지나면 손으로 한다. 이 신발, 저 신발 다 정돈하려면 온몸을 써야 하고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분주해진다. 신발정돈에 온몸을 쓴다.

     

    아침에, 현관에 놓인 신발을 힐끗 보면 어젯밤 누가 가장 늦게 귀가했는지 안다. 한 켤레의 신발이 놓인 위치와 자세, 미세한 균열이 얼마나 보이느냐에 따라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귀가했는지 상상한다. 지방에 가 있는 큰아들의 신발 자리가 비어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잘 지내고 있나?'

    현관에 놓인 신발이 가끔 말을 건넨다. 신발을 꾸준히 정돈하다 보면 가끔 그 말이 들릴 때가 있다.  

     

    어제(12/16) '정현의 인문학 콘서트'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일부를 적는다.^^

  • profile
    이우 2011.12.17 17:11

    우와~~~, 좋은 글입니다. 진백 님은, 미셀러니를 잘 써시네요. 이쪽으로 글을 써보시면 어떨까요? 신발을 잊고 살았던,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

  • ?
    epy 2011.12.17 17:17

    아니, 글도 사투리로 ^.~ '잘 써시네요' ㅎㅎ

  • profile
    이우 2011.12.17 17:24

    이크! 수정합니다. '잘 써시네요' --> '잘 쓰시네요'

  • ?
    epy 2011.12.17 17:14

    집 안의 모든 신발들에 진백님의 손길이 닿았겠네요.  신발마다 건네는 말이 다를 것 같아요.

    비어 있는 '큰 아들의 신발 자리' , 속깊은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어제 무대에서 이야기하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이우님의 신발을 보며 유행 지났다고 멀쩡한 신발을 한 보따리씩 내다 버리던 일과 아직도 신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제 신발들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제게는 앞으로 백년은 신고도 남을 신발이 있습니다.  한동안 신발을 사지 못할 것 같습니다.

  • profile
    이우 2011.12.17 17:26

    아구, 제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치네요. 제 신발이지 에피 님 신발이 아닌데, 일부러 그렇게 하실 것까지야....

  • ?
    황색인 2011.12.18 14:24

    이우 선생님! 혹시 남춘천역에서 김유정역까지 이 신발 신고 걸으셨어요? 그랬다면...아마 그때 명을 다한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또 수선해서 신을까 겁이나...신발이 마음 독하게 먹은것 같습니다. ...17년이나... 겁나 무겁게 사시는(?) 이우 선생님을 머리에 이고 전국을 돌았을 생각을 하니... TT

  • profile
    이우 2011.12.19 14:01

    김유정문학촌 갈 때 이 신발을 신었나요?....운동화를 신은 것 같기도 하고요.....음... 생각해보니 운동화를 신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 많은 곳에서 이 신발이 저를 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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