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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안의 짐승 '크르'

by 리강 posted Feb 19, 2012 Views 12446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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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참 비밀인데.....

사실 내 방 안엔 짐승 하나 들어와 산다.

검고 반짝이는 눈, 어둡고 어두운 털, 아주 작은 짐승 하나 불쑥 들어와 산다.

내가 학교 갔다 오니 벌써 들어와 웅크려 있다.

그 짐승에게 "안녕"하고 인사해도 대답이 없다.

대답 대신 그는 내 마음에다 "그래, 안녕"하고 새겨 준다.

"크르, 넌 이제 '크르'야. 난 너를 '크르'라고 부르겠어."

크르는 제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내 마음에 새긴다.

난 크르와만 마주보고 크르와만 말하고 크르와만 손잡고 크르와만 잠 잔다.

크르는 이제 낯선 짐승이 아니다.

내 방 식구다. 아니, 그 이상이다. 크르와 나는 점점 구별되지 않는다.

어느 새 크르는 내 마음 속 모든 생각을 안다.

그리고 크르의 몸은 조금씩 자라서 작은 내 방을 채워나간다.

학교에 갔다 오면 자라 있고, 또 갔다 오면 자라 있다.

언제부터인지 난 학교 가는 일이 귀찮다.

학교에 갔다 오면 부쩍 자란 크르 몸을 비집고 겨우 내 방에 들어온다.

또 크르 아닌 다른 사람과 눈빛 나누거나 말하는 것도 귀찮다.

크르와 내가 나누는 눈빛과 마음의 말에 비하면 그것들은 너무도 불완전하다.

아, 크르와 나의 이 '완전'은 참 설명하기 힘들다.

크르와 나는 온 눈빛과 마음으로 서로를 보여준다.

벌써 크르와 나는 이 작은 방에서 한 몸처럼 있다.

크르와 나의 고요, 평화, 따뜻함

어느 날, 크르와 난 누구랄 것도 없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두 몸일 필요가 없어. 크르가 짐승이고 내가 사람일 필요도 없어. 이미 크르와 나는 '완전'한 걸.'

이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인지, 크르가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크르는 엄청나게 커진 아가리를 온 방 가득 벌린다.

선선히 나는 크르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다.


 

  • profile
    에피 2012.02.20 00:51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는 마음속에 작은 새가 살고 있어 노래를 잘할 수 있다고 했지요.^^ 오렌지 나무 '밍기뉴'와는 '온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고 나무에 올라 타 한 몸이 되어 신나게 놀기도 하고요. '리강'과 '크르' .... 신나겠다!!! 음~ 나도 판타지의 세계로 떠나볼까나... ^.~ ㅋㅋ
  • ?
    풀무 2012.02.20 08:56

    고요, 평화, 따뜻함에 더불어 함께 해봅니다. 크르의 "입안의 여정" 이야기도 기대해 봅니다. ^.^

  • profile
    이우 2012.02.20 13:16

    ... 심우도((尋牛圖)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소가 아니라 고양이인가 보아요........ 크르~~~~~릉.....크르~~~~~릉..... 그....르...릉..... 그르릉....

  • profile
    리강 2012.02.20 13:59
    난 크르와 한 몸이에요. 이제부터 날 찾지 마요. 날 찾으려면 크르를 찾으세요. 크르르르.... 흥흥 무섭죠. 그럼 크르도 찾지 마요.
  • profile
    이우 2012.02.20 19:18

    어인 일인지,  '크르르르'가 '그르르르'로 들려, 이 예쁜 고양이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만지니, 리강이 크르가 되고, 크르가 그르가 되니. 크르가 리강인지, 리강이 크르인지, 크르가 그르인지. 그르가 크르인지, 혹은 리강이 그르인지. 그르가 리강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닌지... 그러나, 리강이 있어 크르가 있고, 그르가 있어 크르가 있고, 크르가 있어 리강이 있는 것인지, 리강과 그르는 무엇인지.... 이것이 없으니 저것이 없어지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생겨나니 .... 복잡혀, 복잡혀....**&^%$#@!@#

  • profile
    써니 2012.03.04 17:14
    크르 ~~
    저도 어떨때는 내안의 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을꺼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재미있는 표현이네용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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