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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화요세미나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➀ _ 장우현

by 정현 posted Jan 15, 2019 Views 686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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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현


담론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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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론이란 담화와 논의의 줄임말이다.  학문적 이론이나 정치적 발언은 물론이고 일상적 대화나 토론도 모두 담론이다.  사전적인 어의 이외에 고유한 의미가 없으므로 실은 개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용어인데, 마치 특별한 개념처럼 자리 잡은 데는 미셸 푸코 덕이란다.  위는 남경태씨가 쓴 “개념어 사전”에서 가지고 온 정의이다.  위의 정의대로 라면 담론에는 주제가 있어야 하며 대상을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감시와 처벌」에서 담론이 대상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며 거대해지는 역사를 살펴보았었다.  그래서 담론은 마치 그 내용 자체가 가지는 의미보다는 항상 권력에 의해 왜곡되는 것이며 그 왜곡시키는 권력은 바로 담론에 담긴 지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감시와 처벌」를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이런 담론이 저런 담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지식의 발전이 생기고, 또한 권력의 주체와 행사 방식이 변화한다.  그래서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지식이라는 말은 담론의 등장으로 사라지게 된 듯하다. 


   그래서 일까? 신영복 선생은 서문에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습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라고 쓰고 있다.  신영복 선생의 말 (강의)가 녹취되고 그걸 수정 보충해서 책으로 만든 것이고 이 「담론」이라는 책이 그의 손을 떠나 나 같은 독자가 읽고 우리와 같은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떻게 왜곡될 것인지 아니면 오롯이 인식되고 관념화되면서 또 다른 담론들을 만들어 낼 것인지 그가 마지막 책을 쓰면서 고민했을 시간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생산한 담론들이 어떤 것인지 잘 들여다봐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며 그가 꼭꼭 눌러쓴 글만큼이나 곱씹어 보고 신중하게 해석하여 언어들을 연결하고 의미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언급한 “三讀”이 눈에 띤다.  고전 공부를 함에 있어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텍스트를 넘어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이어야 한단다.  또 거기에서 더 나아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는 다소 서정적인 어휘로 표현했지만 내 확고한 인식의 틀을 무수히 깨부수고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공감을 행하여 실천으로 이어져 변화와 창조까지 하는 전투적인 삶의 방식으로 연결한다.  또한 이 공부는 중심부의 콤플렉스가 청산된 변방에서의 창조가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첫 도입 및 소개 부분에 아주 물 흐르듯이 공부와 삶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써내려갔지만 이 다섯 장 남짓의 텍스트에 어마무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근데 그의 거침없는 필력이 보다시피 거칠기 보다는 부드럽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누군가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책을 부러 아껴 읽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달에 하나씩 읽으면 족히 2년은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나.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의 글을 뚝뚝 끊어서 읽기란 불가능 하다. 왜냐하면 다른 듯 닮은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기로 한 부분에서 “사실과 진실”을 읽을 때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방랑하는 예술가”를 읽으면 또 생각이 달라진다.  유달리 「논어」를 좋아하는 그가 계속해서 공자만을 언급 한다던가 고전만을 고집했다면 2년 동안 그를 붙잡아 두는 일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경을 이야기하면서 소쉬르의 언어 구조학으로 시작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사마천의 사기를 엮어 헤겔의 변증법과 같이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논파해낸다.  그리고 그에 더해 헤겔의 변증법이 정과 반이라는 직선적 구조라면 동양은 기-승-전-결이라는 완곡한 진행을 비교한다. 이러니 다음을 안 읽고 어찌 한 달을 참겠는가! 다음으로 넘어갈 수밖에......


  「앎의 나무」의 마투라나는 모든 생명은 “방랑하는 예술가”라고 했단다.  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자기 생성,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그런 능력이 있단다.  이 관점에서 「초사」를 접근하면서 그가 풀어낸 담론은 기존의 메타 지향적인 프레임, 또 순방향으로만 생각했던 인과관계가 아닌 역방향뿐만 아니라 수많은 방향인 것처럼 시적 언어의 다양한 배치와 관점이 사실과 진실, 이상과 현실이라는 다양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함을 압축한 문사철의 인식틀에서 우리는 추상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키워 나가야함 까지 잊지 않는다.  또 더 나아가 이를 적절히 배합하는 유연함까지 덧붙인다.  이쯤 되면 신영복 선생의 책을 발제 한다던가 책에 밑줄을 긋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 해 지는지 알게 된다. 끝이 없는 그의 담론의 바다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 공부의 맥들이 무한한 것처럼 느껴진다.
  
   “손때 묻은 그릇”에서 내가 건져 올린 대어는 「주역」이라는 인식 틀이 점을 치는 책이 아니라는 것. 이는 관계론에 관한 것이며 그 안에는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소수를 이야기 하며 무엇보다 이는 변화를 읽는 틀이라는 것이다.  「주역」이라는 물을 뜨는 낡고 오래된 그릇으로 바닷물은 뜰 수 있지만 그것은 바다가 아니라는 것. 「주역」이라는 불변의 진리로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서 그 지리멸렬하며 어렵다는 「주역」을 읽어보고 싶은 용감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자, 이제 마지막 두 담론은 그가 좋아하는 「논어」로 풀어낸다. 특히나 화동 담론을 통해 우리 통일 담론으로 또 나아가 우리가 해야 하는 통일이 通一이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서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탈주를 끌어낸다.  이는 고전이 오래된 미래라고 앞서 말한 명제에 대한 실천이다. 그가 늘 말하는 고전 공부를 통해서 과거, 현재와의 소통을 바탕으로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들 속에 등장하는 글들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많은 예들이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생각에 흥분한 상태에서 글을 써서 어렵다는 사사키 아타루의 말이 있는데 신영복 선생은 오랜 공부에서 나온 동서남북 다방면에서의 접근과 예들로 자신의 주장하는 바를 쓴다.  그 예들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예들이 모여서 말하는 그의 담론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언어의 재구성이다.  한자어가 등장하고 그 한자어의 변형도 일어난다.  또한 고전 문구에 대한 그만의 해석이 더해지고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문장들이 등장하면서 그가 말한 삼독을 실천하는 글쓰기를 볼 수 있다.  셋째, 담을 수 없는 담론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글은 요약이 불가능 하다.  여느 텍스트처럼 하나의 방향만으로 접근하지 않아서 결국 주제도 하나로 요약되지 않는다.  하나의 텍스트에 많은 담론들이 언급되고 그의 글들이 흘러가면서 하나의 주장으로 귀결되지 않는 담론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내가 재생산하는 담론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많은 다른 갈래들로 재생산 될 수 있는 길이 많은 담론을 쓰고 있다.  두 번째 읽는데 익숙하지 않다. 몇 번을 읽어야 익숙해지고 꿰뚫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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