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뮤지컬 『빨래』 리뷰 (3/4) - 부조리

by 서성광 posted Apr 22, 2018 Views 763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향인 강원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5년 된 강원도 아가씨 '나영'. 그리고 어떻게 흘려보냈는지도 모를 5년 간의 서울살이. 그녀에게도 꿈은 있었다. 작가는 못 돼도 책은 좀 볼 것 같아 제일서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기대와 다르게 책 진열만 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날 '나영'은 동료 언니를 부당하게 해고하려는 서점 사장 '빵'의 횡포에 맞서다 자신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월급은 쥐꼬리
  자판기 커피만 뽑았죠.
  야간 대학 다니다 그만둔 지 오래
  정신없이 흘러간 이십 대
  뭘 하고 살았는지
  뭘 위해 살았는지 난 모르겠어요."

  - <슬플 땐 빨래를 해>(서나영)

  이러한 '나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 세계는 부조리*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빠르게 기득권을 획득한 채 다음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차 버린 이들은 실존주의**를 이야기하며 모든 책임을 구조가 아닌 개인에게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에서 내던져진 개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니체의 말처럼 초인***이 되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하이데거의 말처럼 '지위'를 획득해야 하는 걸까?

  "삶이란 시공간 속에 던져진 피투성으로서의 자신이 존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적 실존으로 전화해 감으로써 존재 매개의 지위를 획득해 가는 현존재의 실존성의 구조적 운동이다."
-『존재와 시간』(마르틴 하이데거·동서문화사·1927년)

IMG_20180419_194555_HHT - 복사본.jpg


  하지만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에서 뮤지컬 빨래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각자가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지위'를 획득하는 것도 아닌 전혀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빨래'는 접속구가 된다. 처음에는 빨래 자체가 접속구였다가 이내 등장인물들은 함께 빨래를 하며 서로에게 접속구가 되어주고,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발휘한다. 부조리한 구조에 맞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뭘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슬플 땐
  난 빨래를 해.
  둘이 기저귀 빨 때
  구씨 양말 빨 때
  내 인생이 요것밖에 안 되나 싶지만
  사랑이 남아 있는 나를 돌아보지.
  살아갈 힘이 남아 있는 우릴 돌아보지.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거야
  자, 힘을 내."

  -<슬플 땐 빨래를 해>(주인 할매, 희정 엄마)

  빨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부조리한 세계(외부)를 개인의 주관성(내면)으로 극복하려는 사유인 실존주의 철학의 한계성을 감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초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지위'를 획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

  *부조리(不條理, absurdity):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 속에 처하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 한계 상황이나 조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e):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초인(超人, Ubermensch): 힘에의 의지(Will zur Macht)를 발휘하며, 위험을 피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도 등 돌리지 않으며,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사랑하며(운명애, amor fati) 영원회귀를 포용하는 강한 인간.






















  1. 08
    Nov 2023
    08:25
    No Image

    흔들리는 갈대

    흔들리는 갈대 이우 흔들려야 한다 갈대가 춤을 춘다 저 위대한 파스칼이 흔들린다 피안을 꿈꾸었지만 틀렸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 우아한 갈대숲은 뭔 일인가 백발을 흔들며 불꽃놀이처럼 쏘아올려 질 때 너는 태어났단다.* 아비는 달리고* 갈대는 흔들린다 ...
    By이우 Reply0 Views80
    Read More
  2. 29
    Oct 2023
    15:07
    No Image

    자전거를 타며

    자전거를 타며 이우 힘이 걸리고 근육이 패창하고 당겼다가 밀고 앉았다가 일어서고 내렸다가 올리고 올렸다가 내리고 밟았다가 풀고 풀었다가 밟고 들었다가 놓고 놓았다가 다시 들고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안으로 당기고 밖으로 밀고...
    By이우 Reply0 Views49
    Read More
  3. 22
    Oct 2023
    19:29
    No Image

    고도를,

    고도를, 이우 기다린다 목재상인지 문지기인지 토지측량사인지 모른다 철수이거나 영희이며 알프레드이거나 프라도이며 존이거나 메어리일 것이다 그 또는 그녀이다 기다리며 숲에 앉았다 밥을 먹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했지만 오지 않는다. 오, 그래요? 그럼 ...
    By이우 Reply0 Views57
    Read More
  4. 18
    Oct 2023
    11:27
    No Image

    철학이,

    철학이, 이우 텅 비어 있음이란 말은 옳다. 아무것도 아닌(rien) 대상 없는 개념들 속에서, 존재 또는 존재들 속에서, 오인된 것을 승인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목적 없이 달리는 기차를 올라 탄다는 당신*의 말은 맞다. 거슬러 오르...
    By이우 Reply0 Views63
    Read More
  5. 09
    Oct 2023
    11:25
    No Image

    가갸거겨

    가갸거겨 이우 어떤 새는 가갸가갸 노래하고, 어떤 새는 가가가가 울고, 어떤 새는 갸갸겨겨하고 운다. 어떤 새는 가갹갹각 부리를 부딪히며 자음 받침을 붙히고, 빠른 템포로 닥다닥닥 밀어를 속삭인다. 어떤 새는 벤치 옆에 기거하며 구구구구 낮은 소리로 ...
    By이우 Reply0 Views65
    Read More
  6. 04
    Oct 2023
    15:06
    No Image

    북회귀선·1

    북회귀선·1 이우 북위 23도 26분 16초. 유혹은 아름답지. 떠날 것을 알지만 아름답지. 유혹을 이겨낼 기묘한 수가 있다면 모두를 사랑하는 거야. "모두? 재수 없어." 어찌 되었던 그녀들은 떠나갈 거야. 뭐 어때, 유혹은 아름답고 바람은 습하고 여름은 길어. ...
    By이우 Reply0 Views55
    Read More
  7. 01
    Oct 2023
    11:36
    No Image

    헤이, 휴먼

    헤이, 휴먼 이우 저기 좀 봐. 응큼한 늑대가 예쁜 여우의 손을 잡고 늑대를 보고 있네. 늑대에게 눈을 흘기던 예쁜 여우가 여우를 보고 있네. 곰이 곰을 보면서 우와 감탄을 쏟네. 긴꼬리 머리를 한 꿩이 긴꼬리꿩을 보면서 예쁘다 하네. 원앙 한 쌍이 손을 잡...
    By이우 Reply0 Views56
    Read More
  8. 30
    Sep 2023
    13:03
    No Image

    굴밤 나무 아래

    굴밤 나무 아래 이우 매호 돌산에 올라 굴밤을 줍네.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놀다 가라, 굴밤비 쏟아지네. 모자 쓴 굴밤, 모자 벗은 굴밤, 가을 장마에 싹 올리는 굴밤, 낙엽 속에 몸을 숨긴 굴밤, 형제처럼 모여 앉은 굴밤. 둥글거나 길쭉한 굴밤들...
    By이우 Reply0 Views51
    Read More
  9. 30
    Sep 2023
    13:02
    No Image

    황진이

    황진이 이우 맥주 양주 황진이의 초라한 쪽문은 닫혀 있다. 21세기에 이런 곳이 있느냐 놀라겠지만, 있다. 닫혀 있을 뿐 가끔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재일교포나 미군들을 상대하다가, 용주골로 갔다가, 역전으로 밀려났다가, 나이 들어 정착한 황...
    By이우 Reply0 Views59
    Read More
  10. 28
    Sep 2023
    00:35
    No Image

    구기자 익어갈 때

    구기자 익어갈 때 이우 붉은 열매들이 매달릴 때, 미숙한 내 사랑의 언어들이 줄 지어 매달릴 때, 그 떫고 신 열매들을 그대에게로 보냈을 때, 객차에 몸을 싣고 내려오다가 내릴 곳을 지나쳤노라, 서툰 연서를 보낼 때, 멍하니 차창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을...
    By이우 Reply0 Views47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6 Next
/ 46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