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변용을 위한 정리 - 에티카를 읽고

by posted Dec 07, 2018 Views 733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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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용’을 위한 정리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장우현


  철학이라는 것을 내 삶 안으로 가지고 온 지 4년을 넘어 스피노자를 만났다. 물론 바로 그를 만나지는 않았고, 예의를 갖추느라 플라톤과 루크레티우스를 거쳐 그에게로 갔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합성할 수 없는 이물질들이 들어온 상태에서 「에티카」를 받아 들였을 때, 이미 교양을 위한 지식 습득의 취미변용의 단계가 아닌를 넘어서게 되었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따라서 마치 ‘도장 깨기’하듯 들뢰즈의 리스트들을 다 깨부수고 섭렵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을 가진 현자가 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스피노자를 만났었다. 다 읽고 난 지금물론 완독이라 할지라도 단 한 번만 읽었으며 철학 초심자의 이해 수준에서그 착각은 초반에 날아갔고 플라톤과 루크레티우스의 책들이 준 이물감은 사라지고 「에티카」의 이물감이 ‘나’라는 표면에 장력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인 것 같다. 경험상 이때 지금 내가 읽었으나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 이물감을 빨리 정리해야 잘 삼키던지 아니면 “퉤!”하고 뱉어 내던지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읽었다”는 흔적을 책 속에 그어놓은 연필자국만으로 확인하게 되더라.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제일 먼저 신에 대해서 그리고 일반적인 정신, 정서, 인간의 예속 그리고 정서의 힘, 마지막에는 지성의 능력 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제 1부에서 신=실체라는 개념 그리고 양태는 실체의 변용이라는 정의를 통해서 실체로부터 나온 인간을 명확히 각인시킨다. 실체라는 개념,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던 기존의 철학과는 달리 그 둘의 관계를 논리로 증명하면서 양태인 인간에 대한 서술에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게 된다. 제 2부에서 본격적으로 실체의 결과물인 양태에 대해서 즉,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다. 실체의 속성인 사유를 하는 인간이지만 실체의 본질은 포함하지 않는 인간이 정신을 이루는 설명에서는 자연철학을 토대로 설명한다. 인간이 타당한 관념을 가질 경우 그것은 항상 참이며 지복은 신의 인식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제 3부는 정신의 수동 상태라고 불리는 정서는 혼란된 관념인데, 이것에 의해 정신은 자기의 신체에 대해서 변용을 통해 존재력을 긍정하고, 사유하게 된다. 제 4부에서 정서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예속이라 정의하면서 정서에 복종당하는 인간. 결국 자유의지는 없으며 원인을 알 수 없는 충동의식에 따르는 인간을 이야기 한다. 마지막 제 5부에서 그러한 인간이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데 결국 지성의 능력에 의해 정신의 지복으로 마무리된다.


  결국 「에티카」는 인간에 대한 설명서인 셈이다. 물론 신, 실체에 대한 대전제를 토대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긍정을 전적으로 끌어내는 도구로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만물의 실체이며 자연의 창시자인 신, 모든 것의 원인에 대해서만 주목할 때 스피노자는 모든 정의를 활용해서 인간에 대해서 무한한 긍정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처음 제 1부를 읽었을 때 신=인간이라는 혹은 자연=인간이라는 공식이 뇌리에 박히면서 인간의 능력이 무한해 지는 막연한 긍정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스피노자가 바라본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 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 남아야 하는 존재로 상정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엄혹했던 18세기를 견디어 내고 있는 자신과 인간들을 봤을 때 그런 힘을 느꼈거나 또는 그런 힘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신에게 기대어 스스로 예속당하며 노예처럼 의탁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며 현실을 뒤집어 보길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신이나 실체에 대한 대전제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지금 현실에 있어서는 니체의 철학만큼이나 위험한 철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라는 양태는 정말 다양하게 존재한다. 오늘 뉴스에 6개월 영아를 물고문시키고 하루에 한 끼만 밥을 준 위탁모가 기소되었고, 8살 여아를 극악무도하게 성폭행한 남자는 2년 후에 다시 우리 사회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와 90세 노인을 패 죽인 청년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어찌 인간을 무한하게 긍정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서 즉, 신체는 자연철학에서와 같이 더 큰 외부자극을 받고 코나투스를 향해 변용을 일으킨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은 자극을 탐닉하며 더 새로운 더 강한 자극을 위해 집중하고 몰입하는 종이다. 인간의 역사 역시 그 발견의 중독이 지속되고 형태를 달리 하면서 이 디지털 시대까지 오지 않았는가! 인간개인의 면에서도 습관, 중독을 이겨내기 위해 또 다른 중독을 찾고 습관을 찾아 종국에는 종교에 기대기도 하지 않는가! 그나마 이는 긍정적인 방향일 것이고 더 극악해지고 더 잔인해지는 잔인성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스피노자는 점진적으로 정신의 능력, 이성의 능력, 지성으로 나아가야 함을 제 1부에서부터 조금씩 노출시키면서 계속해서 확장해가며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에티카」여야 하는 것이리라.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간은 선험적인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체 상태에 따라서 표상을 하고 그 일치점으로 보편 개념을 만들어 간다. 즉 모든 개념이나 사유들 역시 그렇게 인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선과 악의 개념 역시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인간이 예속을 벗어나고 또 정념에 휩싸이지 않는 평정을 찾아 국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잘 살아나가는 인간형으로 스피노자가 내 놓은 답은 정신의 능력, 지성의 힘이다.


  그렇다면 이 지성을 어떻게 우리는 가질 수 있는가? 인간의 정서가 명석 판명한 관념을 형성하는 순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으며 능동적이게 된다. 또한 인간은 명석 판명한 관념을 누구나 형성할 수 있다. 결국 누구나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잠재태들로서 우리의 정신은 인식하는 한에서 사유의 영원한 양태이고, 이것은 사유의 또 다른 영원한 양태에 의해서 결정되며 그것은 다시금 다른 것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처럼 무한히 계속되어 모든 양태는 동시에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지성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그 질서를 지성의 방향으로 가게끔 하느냐 말이다. 유도 하지 않아도 원래 그 방향으로 가게끔 셋팅은 되어있지만 그 셋팅을 실행하게 하는 버튼은 눌러야 한다고 스피노자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불친절한 철학자들! 도대체 그 버튼은 어떻게 누르냐구! 단지, 외적인 쾌락에 따라 동요되어 자신과 사물과 신을 의식하지 않는 무지한 자가 아니라 자신과 신과 사물의 필연성을 인식하며, 존재를 지속하며 덕을 소유하는 현자가 되면 지복에 이르러 쾌락을 억제하는 힘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현자의 길이 힘들고 드물다는 말을 덧붙이며 위로를 해 준다.


  당시 만연해 있던 스토아 철학, 데카르트 철학, 그리고 종교와의 모든 논쟁에서 이겨낼 논리서는 완성이 되어 그의 책상 서랍 속에서 나와 350여년이 흐른 내 눈앞에 존재하게 되고 '나'라는 양태에게 논리적인 측면, 자연철학에의 접근, 그리고 위대한 전복들에 대해서 변용을 일으키고 또 확인시켜 주었다. ”보편 타당한“이 아니라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이제 충분히 내 준거로 자리를 잡았다.


  도덕철학에 대한 부분이 충분하게 외적 자극을 줄 만큼 논리적이지 않아 이물감으로, 질문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명석 판명한“ 관념인지를 확인하는 과정, 그리고 그 관념들이 변용을 일으키는 방향에 대한 확신을 신, 실체, 자연으로부터 어떻게 작용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 엄청난 철학서를 읽고 내가 건져 올려낸 질문이다.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질문, 이것이 내가 느끼는 철학의 딜레마이며 철학의 잔인한 매력이다.


  나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변용을 일으켜 능동성을 올리고 내 존재의 지속함에 힘을 보태 정신의 능력이 레벨 업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놈의 철학은 지식을 습득하고 도장 깨기 하듯이 레벨을 아무리 높여도 만랩이 될 길은 없다는 것이다. 변용을 위해서는 내 사유를 반복해야 하고 정리해야 하고 또 글로 써봐야 한다는 결론이고 그걸 부족하게나마 실천해 봤다. 앗! 이것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난 후 일어난 변용인가?


(Dec. 7,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