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좌명 : 2016년 서울형 혁신교육지구 · 경계없는 행복한 학교 서대문 · 토론리더 양성과정
○ 기간: 2016년 4월 4일(월) ~ 6월 29일(수) · 주 2회 · 총 24회
○ 시간: 매주 월 · 수요일 오전 10시~12시(독서토론 실습은 오전 10시~12시 30분)
○ 장소 : 홍은도담도서관 3층 다목적실
○ 강사 :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정현(진행) · 이우(코치) · 리강(패널) · 강희나(패널) · 오진화(패널) 외 토론리더
○ 주관·주최 : 교육지원청·서대문구청·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
↓4월 20일(수) 독서토론 : <나비를 잡는 아버지>(길벗어린이, 2001년)와 방정환의 <만년셔츠>(지경사· 2001년)
↑ A조 : 강희나(진행) · 패널(이우)
↑ B조 : 리강(진행)
↑ C조 : 정현(진행)
서울형 혁신교육지구 · 서대문구 토론리더 양성과정 다섯번째 시간, 초창기 우리나라의 어린이책을 대표하는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길벗어린이, 2001년)와 방정환의 <만년셔츠>(지경사· 2001년)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두 작가는 일제강점기라는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가며 세상을 대면합니다. <나비를 잡는 아버지>를 쓴 현덕이 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소탕, 봉건주의 잔재의 청산을 강령으로 두고 있는 '조선 문학가 동맹' 소속 작가로 월북해 생사를 알 수 없고, <만년셔츠>를 쓴 작가 방정환은 1920년에 일본 동양대학교에 입학하여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일본 아동문학의 선구자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를 만나 스승으로 삼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방정환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동화를 발표합니다. 두 작가의 삶이 다르듯 이 두 동화의 세계를 대면하는 방법 또한 달라 소설 속 주인공들은 서로 다르게 그려집니다. 바우’는 불합리함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방정환의 <만년셔츠>의 ‘창남’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 두 개의 동화를 감상적으로 리딩하게 되면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부정(夫情)의 문제', <만년셔츠>는 '윤리의 문제'로 읽게 되고 삶에 교훈을 주는 교술문학(敎述文學)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대 배경과 작가 연구를 병행하면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지주와 마름, 그리고 소작농'이라는 사회 문제를 드러내는 사회참여적 동화로, <만년셔츠>는 '동심천사주의'를 가진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동화하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그대로 직시하고 있지만, <만년셔츠>는 사회 문제에서 멀리 달아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동화는 당시의 시대를 냉정하고 참여적으로 들여다보는 조선 문학가 동맹 계열의 작가들이 대거 월북하면서 <만년셔츠>처럼 교술성을 가진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동화가 그 중심 자리를 차지합니다. 아동문학 평론가 이오덕에 따르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은 아이들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어른 중심으로 도구화하면서 아이들을 '예쁜 인형으로만 보는 동심천사주의'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이 '아동이 없는 아동문학, 아이들이 읽지 않는 아동문학'으로 전락하는 원인이 됩니다. 아동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아동문학은 어떠해야 할까요?
"낭만주의에 가장 결여된 것이 민중이다. 영토에는 고독한 소리가 떠돌고 있다. 대지의 소리가 떠돌고 있다. 대지의 소리는 이에 응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명하고 반향한다. 설사 민중이 있더라도 그것은 대지에 의해 매개되어 땅 깊은 곳에서 나타나 언제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 버릴지 모르는 민중이다. 지상의 민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하의 민중이다. 영웅은 대지의 영웅으로 신화적인 것이다. 민족의 영웅으로 역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은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는 타고난 것의 영토를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구 밀도와는 무관하게 ‘고독한 땅’으로 산다는 특질을 갖고 있다. 그곳에서는 인구가 대지로부터의 유출물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혼자(Un Seul)>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영토는 민중을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친구>나 <연인>을 향해 반쯤만 열린다. 그러나 <연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친구>는 불확실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
낭만주의적 영웅은, 영웅의 낭만주의적 목소리는 주체로서 즉 ‘감정’을 가진 주체화된 개인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주체성의 소리라는 이 요소는 악기 전체에 그리고 관현악기 전체에 반영되는데, 이와 반대로 악기와 관현악은 주체화되지 않은 ‘변용태’를 동원한다. 그리고 낭만주의에 이르러 이것은 놀랄만큼 커다란 중요성을 띠게 된다. (...) 관현악-기악 편성은 다양한 소리들의 힘을 통합하거나 분리시키며 또 한 군데로 모으거나 사방으로 확산시킨다. 그러나 이 힘이 <대지>의 힘인지 아니면 <민중>의 힘인지에 따라, 즉 <하나-전체>의 힘인지, 아니면 <하나-군중>의 힘인지에 따라 이러한 편성은 변하며 이에 따라 소리의 역할도 변한다. 전자의 경우 역량의 집단화를 만들어내 바로 변용태들을 불러오는 것이 과제인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집단의 개체화를 초래해 이것이 변용태를 구성하고 관현악 편성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문제다."
-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새물결. 2003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