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16년 3월 29일(화) 오후 2시~4시
○ 장소: 금천구청 평생학습관 제3강의실
○ 대상 도서 : <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 2014년 · 원제 : 女のいない男た, 2014년)
○ 참가 대상 : 금천구청 직원
○ 진행 :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정현(진행) ·이우 (패널)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5년부터 10년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판매고를 올린 작가이면서 2015년 노벨문학상 후보자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상이합니다. 일각에서는 ‘B급 소설가’로 분류하면서 ‘대중소설가’, 혹은 ‘문화상품 생산자’라는 오명 아래 두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무거운 것을 숨기고 '좋다, 나쁘다'의 판단을 보류하면서 가볍게 대중에게 접근할 줄 아는 ‘정교한 작가’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문화상품 생산자’일까요, 아니면 ‘정교한 작가’일까요? 그는 대체 누구일까요?
설왕설래, 그의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 2014년 · 원제 : 女のいない男た, 2014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목처럼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모두 ‘여자 없는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파트너로서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고 시간이 나면 다양한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열성적으로 나누었을 만큼 사이가 좋았던 아내가 이따금 다른 남자와 잠을 자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드라이브 마이 카>, 다른 선배와 자는 여자 친구의 이야기 <예스터데이>, 자신을 사랑에 빠지게 한 유부녀인 그녀가 자신도 남편도 아닌 다른 어떤 남자와 도망을 치는 <독립기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여자를 사랑하는 <세에라자드>,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카페에 숨어드는 <기노>, ‘그레고리 잠자’로 변한 ‘나’가 열쇠수리공인 곱추아가씨와 ‘썸’을 타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사랑하는 잠자>.....
모든 이야기에서 남자의 여자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이를 두고 소설가 권영민은 "작가는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점잖게 평하지만, 대놓고 말한다면 '소유하고 싶은데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싶지만 그 이유를 절대 알 수 없다'는 이야기, 조금 고급스럽게 말하면, 소유하고 싶은 주체(Subject)가 소유 당하지 않는 대상(Object)을 이해할 수 없어 니힐(Nihil)에 빠지는 이야기....
독일의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년~1900년)는 <선악의 저편>에서 “우리의 자아 감정은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자신의 보호, 다시 말해 자신의 힘 아래에 둘 수 있는 모든 것과 외연을 같이 한다”고 말하며,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자아 감정 아래에서 남성은 늘 자신의 대상, 즉 여성과 ‘소유’ 내지 ‘소속'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여성은 남성이 그린 이미지에 따라 그것을 연기하는 존재입니다. 남자들이 여성 이미지를 만들고, 여자들은 그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연기하는 여성의 첫번째 위험은 그 이미지에 고착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가 쓴 것은 하나의 가면이었지만 그것이 얼굴이 되고 말 때, 더 이상 쓸 가면이 없을 때 여성은 ‘남성의 이미지’에서 죽음을 맞는다.” 또 “남자는 여자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 말해 자신의 고유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스스로 절망해 세계 또한 멸망으로 이끄는 파괴자"가 된다. '소유'를 터전으로 삼는 주체(Subject)나 자아(ego)는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에서 말했듯이 결국 옵티미즘(optimism, 낙천주의), 페시미즘(Pessimism, 염세주의), 데카당스(Decadence, 퇴폐주의)라는 니힐(Nihil)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세계 또한 멸망으로 이끄는 파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를 이해(comprehension)하고 싶다는 것은 타자를 소유하고 싶다는 것과 같은 말. 니체는 지금 이것을 '자아감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또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여자를 소유할 수 없어 '허(虛, nihil)'하다는 이야기에 탐미적인 감상을 더한 것일 뿐입니다. ‘소유’를 터전으로 삼는 근대적인 주체 코키토(Cogito, 생각하는 나)나 자아(ego)가 주인공들입니다. 결국 이 '여자 없는 남자'들도 옵티미즘(optimism, 낙천주의), 페시미즘(Pessimism, 염세주의), 데카당스(Decadence, 퇴폐주의)라는 니힐(Nihil)에 빠져들어 갑니다. 여자를 소유하고 싶은데 소유할 없어 죽거나(<독립기관>, 소유당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어 허무에 빠지거나(<드라이브 마이 카>. 그래서 마침내 삶이란 것은 해가 뜨면 녹아버리는 얼음달 같은 것(<예스터데이>). 신파(新波), 제국주의의 침전물....
“어째서 그런 모티프에 내 창착 의식이 붙들려 버렸는지(붙들렸다는 표현이 딱 맞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구체적인 사건이 최근에 나에게 일어난 것도 아니고(다행스럽게도), 주위에서 실례를 목격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런 남자들의 모습과 심정을 몇 가지 다른 이야기의 형태로 패러프레이즈하고 부연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현재’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혹은 완곡한 예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게 그런 구마의식이 개인적으로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선 나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의 제목은 처음부터 ‘여자 없는 남자들’로 정해져 있었고, 중간에 생각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바꿔 말하면 나는 아마도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를 마음속 어딘가에서 자연스레 바라고 있었던 것이리라.”
- 무라카미 루키의 일본어판 <여자 없는 남자들> 서문 중에서
그러나 하루키는, “나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들다”며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나라는 인간의 현재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일지도 모른다”며 자인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타자를 소유하고 싶은 주체(Subject)가 소유 당하지 않는 대상(Object)을 이해할 수 없어 허무로 빠진다'는 이 근대적인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출·퇴근하듯 매일 정해 놓은 시간에 앉아서 탐미적이고 감수성 가득한 낱말들을 이어붙이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요? 언젠가 하루키는 그 스스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낱말을 이어가는 것이 자신의 글쓰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부지런히 탐미적인 감수성으로 '아름다운' 낱말을 찾아내 문장을 만들고, 문장을 이어 문단을 생산하는 이 하루키를 두고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잘 팔리는 상품을 잘 만드는 '문화상품 생산자'. 혹은, 성실하고 부지런히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언어를 찾아내는 '글 쓰는 기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