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좌명 : <서울시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독서동아리대상 독서교육 지원 고전독서 강좌, <도덕경>
○ 기간 : 2016년 6월 9일(목)~9월 8일(목) · 월 1회 · 총 4회
○ 일시 : 2016년 6월 9일(목) · 7월 14일(목) · 8월 11일(목) · 9월 8일(목) 오후 1시~3시
○ 장소 : 중랑구립정보도서관 2층 문화교실③
○ 대상 : 중랑구립정보도서관 동아리 회원
○ 강사 :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www.epicurus.kr) 이우
○ 주관·주최 : 서울시 · 서울도서관 · 중랑구립정보도서관(www.jungnanglib.seoul.kr)
<서울시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독서동아리대상 독서교육 지원 <도덕경> 고전독서 강좌를, 9월 8일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노자·문성재·책미래·2014년)을 주도서, 절판된 <지자적저어 노자설(知者的低語 老子說)>(채지충·김현진·도서출판 두성 ·1988년)을 보조 도서로 해 독서토론을 하고 종강했습니다.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은 노자 당시의 문자·문법·역사에 대한 다각적 접근을 통하여 춘추전국시대와 한대의 문헌들과 직접 대조·분석하면서 당시의 문법에 의거하여 한 글자 한 글자를 당초의 의미에 최대한 가깝게 번역했습니다. 1973년 출토 이후로 40년간 검증을 거친 전한대의 백서본을 기본 텍스트로 하되 원문·맥락·내용의 교열에는 초간본과 한간본을 적절하게 참조하면서 후대 판본들의 장점들을 충분히 반영하고 오류들도 최대한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헌적 해석과 텍스트 해석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지금의 사회를 바라보는 역자 문성재의 해설에는 많은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1장 道可道也 非常道也(도가도야 비상도야, 도’는 법도 삼아 따를 수는 있어도 영원한 도인 것은 아니다)를 설명하면서 삼성이라는 기업을 거론하며 경제적인 기표로 접근하고, 제18장 故大道廢 安有仁義(고대도폐 안유인의, 위대한 도가 기울어지면,큰 사랑과 정의의 의미가 강조된다)를 설명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가져오고, 제29장 <세상에서 바란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역자의 해설애서는 전법기업인 일본의 마스시타 경영인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년~1989년)를 가져옵니다. 역자가 춘추전국시대와 한대의 문헌들과 직접 대조·분석하면서 당시의 문법에 의거하여 한 글자 한 글자를 번역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역자의 몸에 기입된 사회적 징후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문자나 소리 등의 기호가 표기되어 의미가 일어나는 기표작용(signifying, 의미 작용)은 기호학에서 기표가 가지는 데노타시옹(denotation, 外示)과 코노타시옹(connotation, 共示)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시(外示)라고 부르는 데노타시옹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우리가 사전에 찾아보는 말의 의미를 가리킵니다. 코노타시옹은 텍스트가 가진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연관을 지시합니다. 이 책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 도덕경>은 데노타시옹(denotation, 外示)은 훌륭하지만 코노타시옹(connotation, 共示)은 상황와 환경, 사용과 실천이라는 맥락을 끊어내고 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밖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학자는 별 쓸모가 없다고 했다. 단지 흥미 혹은 습관 때문에 지식을 쌓는 사람은 문제를 파악할 수 없다. 인식을 통한 자기파멸의 각오가 없는 사람, 진리 때문에 한없이 깊은 상처를 입어본 적이 없는 사람, 문제를 자신과 무관하게 다루는 사람, 그들은 문제를 포착할 수는 있어도 붙잡을 수는 없다. (...)
철학은 학문과 다르고 철학자는 학자와 다르다. 학자는 인식충동을 따라서만 학문하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인식 충동은 “감아 놓은 태엽”과 같다. 다른 충동들이 그것을 추동하지 않아도 마치 ‘태엽’을 감아놓기만 하면 작동하는 작고 독립적인 시계장치‘처럼, 학자의 인식 활동은 그냥 ’째깍째깍‘ 진행된다. 이 작은 ’기계장치‘는 어디에 두든 그냥 그렇게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충동에 따라서만 이루어진 학문 활동으로는 그 학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읽어낼 수 없다. 학자를 알아보게 하는 개성적인 충동,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고유한 충동은 오히려 인식 영역 바깥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가족이나 돈벌이, 정치 같은 것”에서 우리는 그 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다르다. 과학은 과학자를 드러내지 않지만 철학은 철학자를 드러낸다. 이를 테면 일반상대성이론 수식에서 아인슈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데아론이나 철인군주론에서는 플라톤이 어떤 사람인지 읽어낼 수 있다. “철학자에게 완전히 비개인적인 것이란 없다. 특히 그의 도덕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말해 그의 본성의 가장 내적 충동들이 어떤 위계질서 속에서 상호정렬되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하고 결정적인 증거다."
- 『다이너마이트 니체-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고병권 · 천년의상상 · 2016년) p.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