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사 : 2013년 길 위의 인문학 <낙산을 오르다>· 둘째날 인문학 강좌
○ 일시 : 2013년 5월 16일(목) 오전10시~오후 1시
○ 장소 : 금천구립가산정보도서관 6층 문화강좌실
○ 내용 : 인문학의 이해 / 인문학의 인식틀 / 환원구조 / 가치의 생성 / 기행지 안내
↑ 2013년 길 위의 인문학 <낙산을 오르다> 둘째날, 들뢰즈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이해했던 첫째날에 이어 차이와 운동, 생성에 대해 공부하고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문학(人文學, 문학+사학+철학+예술)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람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했던 후키자와 유키치(1835년~1901년, 탈아론(脫亞論), 기타이끼(1883년~1937년, 팔굉굉우(八紘日宇)), (고오야마 이와오(1905년~1993년))의 사유처럼 근대적인 사유 방식은 인간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인문학을 <사람을 위한 학문>이라 정의될 때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인문학마저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본주의적 환원구조 속에서 인문학을 수단화한다면, 인문학은 도리어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 인문학(人文學)이란, 땅에 발을 딛고 우뚝 서 있는 상형문자 '인(人)'이 의미하듯 스스로의 가치를 생성해내는 것이고, '문(文)'의 의미처럼 과거를 현재로 끌어당기고, 미래를 현재로 미리 당겨오는 일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 ; 354년~430년)' 식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현재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다시당김(retentions)'이며 미래의 '미리당김(protentions)'입니다. 현재는 '움직임(mouvement)'입니다(질 들뢰즈). <용산참사>를 바라보던 작가 조세희의 절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과거를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지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미래 세대가 또 우리와 같은 불행을 겪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 화요일(21일)에는 현재의 '나'가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낙산을 올라 과거를 현재로 끌어 당겨오고,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미리 당겨오겠습니다.
촬영과 사격은 서로 닮았다.
하지만, 결말은 삶과 죽음을 가른다.
사람의 얼굴에 과녁을 맞추고,
방아쇠를 당기면
그 사람이 죽지만
버튼을 누르면,
그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