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임명 : 포토스터디 닷(약칭 : 닷클럽)
○ 모임 기간 : 2015년 8월 5일(수)~2016년 2월 24일(수)
○ 모임 장소 : 모임공간 에피
○ 후원 : 월간 <PHOTO 닷>· <across>
○ 시간 · 주제 : 2015년 11월 4일 저녁 7시~9시 · 이미지 인문학 : 2장 리얼 버추얼 액추얼 · 3장 파타피직스
○ 강사 :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이우
<이미지 인문학-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진중권 · 천년의상상 · 2014년) 제2장 <리얼 버추얼 액추얼>, 제3장 <파타피직스>를 읽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디지털 테크놀러지는 현실(actuality)과 가상(virtuality)의 경계를 약화시키며 은유와 실재,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어 무엇이 가상인지 무엇이 실재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 세계를 엽니다. 저자는 이 장에서 한성필의 <파사드 프로젝트>, 이명화의 <프레임의 미학>, 안성석의 <역사적 현재>라는 사진 작업을 통해 현실과 가상이 중첩되는 사진 예술의 미학의 보여주고, 1인 미디어, 팟 캐스트 등을 통해 파타피직스(pataphysics) 미학을 보여줍니다.
가상(virtuality)과 현실(actuality)에 대한 사유는 주체철학과 이성 중심주의라는 서양의 철학사를 반전시키는 중요한 개념으로,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년~1941년)의 개념이지만 앙리 베르그송의 사유에는 인간 외부의 조건을 무시하는 주체 철학의 잔재가 남아, 에밀 시오랑(Emile Michel Cioran, 1911년~1995년)으로부터 "베르그손은 삶의 비극을 무시했기 때문에 유죄"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습니다. 베르그송의 가상(virtuality)과 현실(actuality)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995년)로 이어져 주체 철학적 입장이 반전되어 타자의 철학으로 전환됩니다.
저자는 이 장에서 미학자답게 미학적 이상이나 현상을 설명할 뿐 애초 이 책을 쓰면서 의도했던 "모두를 관통하는 사유 전체를 체계화"하거나"디지털, 혹은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인간을 규명"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어 아쉬웠습니다.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의 주체화 제현(製現),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파타피직스라는 미학적 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까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 속에서 인간의 내면만을 응시하면서 에밀 시오랑으로부터 '유죄 선고'를 받아야 했던 베르그송의 가상(virtuality)과 현실(actuality)이 아니라, 인간 외부의 조건을 사유했던 들뢰즈의 가상(virtuality)과 현실(actuality)은 어떨까요?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이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는 사실로 인하여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에의 기투는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인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 왔지만 사실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타자가 부재하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간은 있을 수 없다.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