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좌명 : 2015년 경북도립대학교 인문고전 만남 <청년, 세상을 노마드하다>
○ 기간 : 2015년 9월 17일(목)부터 11월 12일(목) · 주 1회 · 8회
○ 시간 · 주제 : 2015년 10월 29일(목) 저녁 7시~9시 · 제6강 <굿 바이 동물원> 인문적 해석, 노마드④ 차이와 탈주
○ 장소 : 경북도립대학교 창업보육센터 3층 세미나실
○ 주최 : 경북도립대학교 교학과 · 경북도립대학교 도서관
○ 주관 :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인문학 강좌 : 제6강 <굿 바이 동물원> 인문적 해석, 노마드④ 차이와 탈주(강의 : 이우)
10월 29일(목) 경북도립대학교 인문고전 만남 <청년, 세상을 노마드하다> 과정 중 인문학 강의로는 마지막 시간인 <노마드④ 차이와 탈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까지의 노마디즘(Nomadism) 강의에서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은, 이미 발화되어 있는 기표(signifiant)가 기입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가 설령 타자를 마주친다하더라도 어떻게 노마드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영화 <미스 쥴리>에서는 '미스 쥴리'와 '하인 존', 주방 하인인‘캐서린'이 이미 기표된 신분제를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강태식의 소설 <굿 바이 동물원>에서도 주인공은 기표된 '자본 구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곧 태어날 2세를 위해 기꺼이 관람객이 던져주는 바나나를 먹고 모형 빌딩을 기어오릅니다. 기표된 기존의 의미 체계를 빠져나오면서도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강태식의 소설 <굿 바이 동물원>의 결말은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와 니체의 초인(Uber Mensch)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꺼이 모형 빌딩을 기어오르겠다는 주인공은 산정(山頂을 기어오르는 시시포스(Sisyphus)와 닮아 있습니다. 부조리(不條理, absurdity)한 외부 세계에 굴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초인(Uber Mensch)의 개념에는 근대철학의 흔적인 주체성이 남아 있습니다. 외부 세계를 그대로 두고 자신만 바꾸겠다는 개념으로는 위 문제의 해답을 도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자(das Seiende)가 아니라 존재(Sein)로 살아야 한다'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년~1976년)의 명제를 거부하고, '존재에서 존재자로' 역진(revolution)하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년~1995년) 타자의 사유를 따라갑니다. 이 명제의 끝은 결국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995년)의 '차이'와 '탈주'로 요약되는 노마디즘에 닿습니다.
'노마드한다'는 것은 기표는 물론 반-기표를 살펴 이 사이를 가로지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부조리를 감당하며 산정을 기어오르는 시시포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연대를 통해 부조리한 산정 자체, 즉 '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입니다. 경쟁과 계급이 존재하는 '홈 패인 사회'에서 억압 없이 저마다의 개별성과 특이성으로 사아갈 수 있는 '매끈한 사회'으로 이행이 노마디즘의 핵심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매끈한 사회'가 시험되고 있습니다. 공동체(Commune)와 복지국가. 소설 <굿 바이 동물원>에서처럼 관람객이 던져주는 바나나를 먹지 않고 모형 빌딩을 기어오르지 않아도 되는, 기표된 기존의 의미 체계를 빠져나올 수 있는 새로운 의미의 생성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홈 파기와 매끈하게 하기라는 조작에서의 다양한 이행과 조합이다. 즉 어떻게 공간은 그 안에서 행사되는 힘들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홈이 파이는 것일까? 또 어떻게 공간은 이 과정에서 다른 힘들을 발전시켜 이러한 홈 파기를 가로질러 새로운 매끈한 공간을 출현시키는 것일까?"
-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새물결·2003년) p.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