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스토너(Stoner),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의 함수

by 이우 posted Oct 11, 2016 Views 729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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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책_스토너.jpg

『스토너』(존 윌리엄스 · 알에이치코리아 · 2015년 · 원제 : Stoner, 1965년)



  J와 U는 의견이 달랐다.

  U에 따르면, 스토너(Stoner)는 절제의 덕(德)을 가진 플라톤의 후예, 의도도 배려도 없으며 인내를 힘이라고 생각하는 고상한 스토아주의자, 고독하고 우울한 코키토(cogito), 학문으로서의 진리를 사랑하는 관념주의자, ‘순수 의지’를 사랑하는 쇼펜하우어, 분노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으면서 책임과 절제로 무장한 달관자, 고독을 사랑하는 옵티미스트(optimist, 현실 세계와 인생을 궁극적인 최선의 것으로 보고 이를 만족스럽게 여기는 생각이나 태도를 갖는 낙천주의자), 문제를 알지만 침묵하는 자이거나 개인 차원의 소심한 복수를 하는 인사이더(in-sider)다. 즉, '주체화의 축'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인간에 불과했다.

  맞는 말이다. 그는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자신만의 길을 걷는(뒷표지 글)” 석인(石人)이며 인사이더(in-sider)다. 스토너는 분빌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나 농사를 배워보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 농과대학에 가고, 대학에 가 그저 성실하게 공부하다 보니 영문학에 매료되었고,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미주리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되었을 뿐이다. 친구들이 ‘대학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일 때 스토너에게 대학은 그저 “도서관이나 유곽처럼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신을 완성해주는 물건을 고를수 있는 곳, 진실, 선함,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있는 곳(본문 p.43)”이었다.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이 미국인 승객 114명을 태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침몰(본문 p.48)’시키거나 말거나, “스페인 내전(본문 p.310)”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전쟁터에 나간 친구 매스티스가 전사하거나 말거나 그는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라틴어 시를 읽었다.

  “ (...)그해 1918년 그는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매스터스의 죽음은 인정하기 싫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유럽에서 발생한 최초의 미군 사상자 명단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전장에서 터져나오는 폭력이나 파열된 목에서 터져나오는 피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 그의 논문 주제는 ‘중세 서정시에 고전 전통이 미친 영향’이었다. 그는 여름에 고전 작품과 중세시대의 라틴어 시를 읽는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 본문 p.59~60

  J에 따르면, 스토너는 출세와 권력, 부(富)라는 사회적 기표를 쫓아가지 않는 아웃사이더(out-sider)다. 이 아웃 사이더 스토너(Stoner)는 욕망을 긍정하면서 욕망의 선을 따라가다가 ‘캐서린’이라는 접속구(接續口, conjunction)를 만나면서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사이를 이어주는 비상구(非常口)를 통해 다른 영토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너가 ‘캐서린’을 만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내면을 가차없이 수정하고 정정해, 출세와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영문학과 학과장 ‘로맥스’를 '물 먹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즉, 스토너는 ‘주체의 축’이 아니라 ‘의미 생성의 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스토너>는 현재적이지만 도래함을 예고하는 카프카적인 소설이다.

  맞는 말이다. 분명 스토너는 신체적 욕망을 긍정하며 탈영토화의 선(線)을 따라간다. 그의 첫 욕망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조그만 은행의 행장으로 있는 아버지와 미주리주 중부의 유복한 가정의 장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오폐라도 보고, 박물관에도 가 보았고, 피아노를 칠 줄 알고 예술에 취미가 있는(본문 p.70)" ‘이디스’였다. 스토너는 이디스와 결혼하고 딸 그레이스를 낳지만, 아쉽게도 그녀들은 접속구가 되지 못했다.아쉽게도 아내 이디스도, 딸 그레이스도 이성, 청렴, 성실, 도덕으로 무장한 인사이더였다. 

  “(...)그가 그녀의 몸에 손을 올리자 잠옷의 얇은 천을 통해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육체가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몸 위에서 손을 움직였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았았다. (...) 그는 서투르지만 부드럽게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그가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를 만지자 그녀가 고개를 홱 옆으로 돌리더니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 일이 끝난 뒤 그는 옆에 누워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제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 갑자기 그녀가 이불을 홱 젖히더니 재빨리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 불이 커지고, 그녀가 큰 소리로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 본문 p.103

  스토너는 ”한 달도 안 돼서 이 결혼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본문 p.107)" 그리고 스토너는 이 일상적인 삶이 ‘자신이 원했던 모습과 거의 비슷하다’고 술회하며 자신의 영토에 머물고 만다. 이렇게 다시 그는 세계로 열린 창(窓)을 닫고 인사이더 석인(Stoner)이 된다. “수업준비를 하거나 과제를 채점하거나 논문을 읽고,  항상 연구를 하고 글을 썼다.(본문 p.144)" 

  그러나 들뢰즈의 말처럼 “욕망은 분명 모든 위치, 모든 상태를 통과한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모든 선을 쫓아간다.”1) 스토너는 그를 영토에서 밀어내고 다른 영토로 이주시키는 접속구 ‘캐서린’을 만난다. “그녀의 몸은 길쭉하고 섬세했으며 부드럽지만 격렬했다.(본문 p.275)" 캐서린을 만난 스토너는 ”사랑이란 하루하루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본문 p.274)"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이른바 불륜이 진행되면 가족과의 관계가 악화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나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본문 p.280), 마음과 몸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가끔 두 사람은 시선을 들어 서로를 향해 빙긋 웃은 뒤 다시 읽던 자료로 눈을 돌렸다. 때로, 스토너가 책을 읽다가 눈을 들어 항상 머리카락이 덩굴손처럼 덮고 있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과 우아한 곡선을 그린 등을 지긋이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느긋한 욕망이 천천히 차분하게 일어나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등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팔을 올렸다. 그러면 그녀는 등을 똑바로 펴면서 고개를 젖혀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난 뒤 두 사람은 한 동안 조용히 누워있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사랑과 공부가 마치 하나의 과정인 것 같았다.(...)”
- 본문 p.279

  이렇게 스토너는 닫혀 있던 세상로의 창(窓)을 열었다. 분명 이 욕망은 영국이나 미국, 나아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프로이트나 라캉의 욕망과는 다른 것이다. 스토너와 캐서린 욕망은 프로이트나 라캉과 같은 결핍이나 환원주의적 욕망이 아니라 들뢰즈와 같은 생산으로서의 욕망2)이다. 프로이트 식의 욕망이 표상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내부에서 치환될 뿐인데 비하여 들뢰즈의 욕망은 표상을 알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 전체에 투여되고, 모든 전통적 관점을 거부하는 무의식적 에너지의 능동적 흐름이다. 그 결과로 캐서린은 ‘우아하고 명석한 지성과 냉정함이 열정을 살짝 가리고 있는(본문 p.352),’ 훌륭한 책을 출판하고, 스토너는 캐서린을 잃은 충격으로 “생애 처음으로 원인이 불분명한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며(본문 p. 306)" 병을 앓지만 캐서린을 잃게 만든 못된 로맥스를 '물 먹인다'.

  “(...)로맥스는 스토너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그가 중세영어 상급과정에나 알맞은 내용을 1학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핀치에게 징계하라고 요구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핀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 웃음을 떠트렸다. (...) ‘그 친구에게 당한 거요. 홀리, 모르겠습니까? 그 친구는 물러서지 않을 거요. 그리고 당신은 전혀 손을 슬 수 없어요. 나더러 당신 일을 대신 해달라구요? 그러면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소? 학장이 고참 교수의 강의에 간섭하는 걸로 모자라서, 그 학과의 선동에 넘어가 그런 짓을 하다니, 그건 안 될 일이오. 그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결하시오. 최선을 다해서.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거요. 그렇지요?’(...)”
- 본문 p.321

  이쯤해서, U가 말했다. “그러니 문제지요. 스토너의 이 연결접속이 어떤 사회장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요? 사랑하는 캐서린을 지키지도 못하고 미주리대학의 잘못된 구조를 바꾸기는커녕 기껏해야 캐서린에 대한 복수만 하고 있잖아요.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 코키토, 스토아주의자일 뿐이요. 잘 해야 로크의 ‘타블라 라사(tabula rasa, 빈 서판 혹은 백지)’나  흄의 ‘연합관념론’으로 위장한 인사이더일 뿐이지요.” 그러자, J가 받았다. “U여, 그대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려. 세계를 향해 창문을 닫은 인사이더 스토너를 세계로 향해 창을 열게 하고, 딱딱하기만 했던 석인 스토너를 부드러운 유기체 스토너가 되게 했던 사랑을…".

내면과 외부.jpg


  이렇게 우리는 소설 <스토너>를 통해 ‘의미 생성과 주체화라는 두 개의 축’을 만났다. 우리는 ‘의미 생성'과 '주체화'라는 두 개의 축이 서로 “교차할 때의 매우 특별한 배치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의미 생성은 기호들과 잉여들을 기입할 흰 벽이 없으면”3) 안 되기 때문이다.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 사유(res)와 연장(extensa), 인사이드(in-side, 내면)과 아웃 사이드(out-side, 외부)는 구별되지 않을뿐더러 설령 구분된다 하더라도 서로 뒤섞이고 이동하며 서로 구멍을 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처에서 작동한다. 때로는 순조롭게 기능하고 때로는 중단되면서 다시 시작한다. 그것은 숨을 헐떡이고 달궈지고 먹어 치운다. 그것은 기계”다.4) ‘욕망’이란 모든 개체들이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 즉, 신체가 만드는 ‘힘에의 의지’이며, ‘강도를 가진 기계적 조립’, 사방으로 일어나는 이탈의 끊임없는 소재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는 ‘생성의 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이 인사이더이든 아웃사이더든 괜찮다. 문제는 하나다. 당신은 ‘이디스’나‘ 그레이스’, ‘워커’나 ‘로맥스’가 걸어가는 주체화의 축 위에 있는가, 아니면  ‘스토너’가 걸어가고 있는 의미생성화의 축 위에 있는가의 문제…….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1)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 동문선 · 2001년) p.27

  2) "오이디푸스가 복귀 내지 적용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오이디푸스 자신은 사회장의 리비도 투자의 특정 유형을, 사회장의 생산과 형성의 특정 유형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 환상이 없는 것처럼 개인적 오이디푸스도 없다. 오이디푸스는, 그를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행시키는 자신의 고유한 재생산의 적응된 형식으로, 또 미리 조정된 막다른 골목들에서 욕망을 차단하는 자신의 부적응적 · 신경증적 정체(停滯)들 속에서 집단으로의 통합 수단이다. / 오이디푸스는 또한 예속 집단들 속에서 꽃 피는데, 여기서는 기성 질서가 그것의 탄압적 형식들 자체 속에서 투자되어 있다. 그리고 예속 집단의 형식들이 오이디푸스적 투사들과 동일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이디푸스적 적용들이 출발 집합으로서 예속 집단의 규정들과, 이 규정들의 리비도 투자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민음사 · 2014년  · 원제 : L’Anti-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72년) p.186)

  3) “우리는 두 개의 축을 의미 생성과 주체화의 축을 만났다. 이것들은 매우 다른 두 개의 기호계, 또는 두 개의 지층이다. 하지만 의미 생성은 기호들과 잉여들을 기입할 흰 벽이 없으면 안 된다. 주체화는 의식, 정념, 잉여들을 숙박시킬 검은 구멍이 없으면 안 된다. 혼합된 기호계들만이 존재하고 지층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이어야만 성립되기 때문에, 그것들이 교차할 때의 매우 특별한 배치의 몽타쥬에 놀라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얼굴, 즉 흰 벽-검은 구멍의 체계는 흥미롭다. 흰 뺨의 큰 얼굴, 검은 구멍 같은 눈이 똟린 백묵 같은 얼굴, 어릿광대의 머리, 하얀 어릿광대, 달의 피에로, 죽음의 천사, 수의를 입은 성자, 얼굴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의 외부를 둘러싼 표피가 아니다. 언어에서 기표의 형식과 심지어 그것의 단위들은, 만약 임의의 청자가 말하는 자의 얼굴을 선택하지 않는다면("이런, 이 자는 화난 것 같군....",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 '내가 너에게 이야기할 때 넌 내 얼굴을 보는구나....", "나를 잘 봐...")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어린이, 여자, 가족의 어머니, 남자, 아버지, 우두머리, 교사, 경찰은 일반적인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작용하는 특질들이 특별한 얼굴성의 특질들에 연동되어 있는 언어를 말한다. / 본래 얼굴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빈도나 확률의 지대들을 규정하고, 미리 적합하지 않은 표현들과 연결접속들을 적합한 기표작용으로 중화하는 장을 결정한다. (...) 얼굴은 기표에 부딪혀 튀어나와야 하는 벽을 구성하며, 기표의 벽, 프레임 또는 스크린을 구성한다. 얼굴은 주체화가 꿰똟고 나가야 하는 구멍을 파며, 의식이나 열정으로서의 주체성의 검은 구멍, 카메라, 제3의 눈을 구성한다.“(『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새물결·2003년·원제 :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80년) <7. 0년-얼굴성> p.321~322)

  4) 『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민음사 · 2014년  · 원제 : L’Anti-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72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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