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불화의 시대, 김훈은 무엇을 말하는가_ 소설 <<남한산성>>

by 이우 posted Oct 07, 2011 Views 890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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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통하여 작가가 알려지지만,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다. 선후를 따지자면 작가 있고 작품이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은 독자로서는 잊어버리기 쉬운 것 중의 하나다. 독자는 작품을 읽지 작가를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이기에 작품에는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래서 책읽기란 단순히 글자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읽는 것이며, 글쓰기란 글자를 단순히 배열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을 표기(表記)하는 것이다. 말하기 또한 말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선후로 따지자면, 화자나 작가의 생각이 먼저 있고 언어(言語)가 배열되는 것이다.


    그러나 속을 보는 것보다 겉을 보는 일이 쉽다 보니 생각보다는 언어의 배열에, 사람의 됨됨이보다는 외모에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소설 <<남한산성>>은 어떨까. 단순히 소설이라는 겉을 본다면 그리 잘 된 소설이 아니다. 아리스트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극적인 요소가 없고, 선과 악이 구분되어 빚어지는 갈등 구조도 없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으며 분명한 사건 전개와 결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남한산성>>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매력은 소설이라는 겉이 아니라 문장 속에 있다. 그 문장 안에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고스란히 묻어 있고, 그 시각이 차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은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일러두기’로 시작한다. 김훈은 ‘허송세월 하’듯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놀’았고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 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치는 것을 보았다고 적는다. 그렇게 김훈은 수백 번 산성에 오르내리며 역사보다 더 사실적인 소설 <<남한산성>>을 완성한다. 스스로 ‘놀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 오르는 일이 그의 말처럼 녹녹한 일이 아니다. 김훈은 산성을 오르기 위하여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비 오듯 땀을 흘렸을 것이며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 김훈은 무엇을 말하기 위하여 산성을 오르내리고 지우개로 고쳐가며 한줄 한줄 문장을 쓰고 <<남한산성>>을 완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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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Photo by 이우 )

 

 

 

 

     “...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다.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의 편이다. ...”

 

-<<소설 남산산성>> 머리글 중에서

 

 

 

    소설이 완성되고 김훈은 이렇게 자신의 소설에 머리글을 단다. 이처럼 그는 주전파나 주화파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쫓겨 가는 능력 없는 임금도, 그 뒤를 울며 따르는 백성도, 울며 늙은 사공의 목을 베는 김상헌도, 승리한 청나라의 전리품이 되어 잡혀가면서도 수레 위에서 손을 흔드는 아낙네와 양반집 규수들 그 어느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서도 결국에는 그 모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의 머리글에서처럼 그들 모두가 ‘고통 받는 자’이고 김훈은 ‘고통 받는 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나올 만큼 치열했던 주전과 주화의 역사적 논쟁에서 작가 김훈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 김훈이 이와 같은 세계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훈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가치를 알며, ‘정신’이 아니라 ‘몸’을 존중할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지우개로 고쳐가면서 연필로 원고를 쓰고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그는 스스로 ‘생태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훈은 ‘몸의 고단함’을 아는, 어느 누구보다 더 치열한 생태주의적 세계 인식을 갖춘 작가임이 분명하다.

 

 


     “...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저어갈 때에나 내 두 다리의 힘으로 새벽의 공원을 어슬렁거릴 때 나는 삶의 신비를 느낀다. 이 신비는 내 살이 있는 몸의 박동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므로 신비라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중략) 내 몸은 바퀴를 통해서 대지와 교감한다. (중략) 그래서 바퀴는 기계가 아니라 내 몸의 일부이며 새롭게 확장된 나 자신의 몸이다. 나는 바퀴와 친숙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남이다. 이 거리는 아름답다. 이 거리는, 나와 세상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상을 연결시켜 줌으로 나를 넓히고, 내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 김훈 에세이, <인간의 다리와 바퀴 사이의 사유> 중에서

 

 

 

    김훈은 그의 에세이집 <<자전거여행1>>에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아갈 때 ‘두 다리의 힘’과 ‘몸의 박동’에서 ‘대지와 교감’하고 구체적인 삶을 느낀다고 적고 있다.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1>>에서의 이런 인식은 <<자전거여행2>>에서는 정신 노동이 아니라 육체 노동을 부러워하는 모습으로, 더 나아가서 마침내  ‘러브의 익명성’을 받아들일 줄 알고 일부일처제를 ‘억압’이라고 표현할 만큼 도덕과 윤리의 관념에서조차 자유로워진다.


    "... 목수들은 허리춤에 여러 가지 연장을 차고 있었다. 젊은 목수들의 연장은 아름다웠고, 그들의 망치질이며 톱질과 대패질은 행복해 보였다. 세상의 재료들을 재고, 자르고, 깍고, 다듬어서 일으켜 세우고 고정시키는 자들의 기쁨으로 그들의 근육은 꿈틀거렸고, 날이 선 연장들은 햇빛에 빛났다. 아아, 연필과 지우개는 죽어 마땅하리라. "


- 김훈,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중에서

 


    “ 러브호텔의 주차장 입구는 비닐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대낮에도 주차장은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다. 비닐커튼 밖은 인도다. 그 인도 위로 유모차를 미는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비닐커튼은 자동차를 가려서 러브의 익명성을 보호하는 장치다. ...(중략)... 혼내 정사건, 눈먼 치정이건, 다급한 간통이건, 매춘이건 간에 러브의 익명성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간통과 치정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의 존엄을 편든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 (중략) 러브호텔이 창궐해서 성업 중인 사태의 문명사적 배경은 이 시대의 도덕이 특별히 타락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중략) 아마도 러브호텔이 창궐하게 되는 배경은 인간이 일부일처제에 승복할 수 없는 마음의 바탕을 지니고 오랜 세월 동안을 일부일처제의 억압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 ”

 

- 김훈 에세이, <10만년 된 수평과 수직 사이에서> 중에서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정신’이 아니라 ‘몸’을 존중할 줄 아는 김훈이 몽진과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가 있었던 남한산성을 바라본다면 주전과 주화라는 이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신화, 백성의 고단했던 삶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김훈에게 남한산성은 전쟁의 현장이 아니라 당 시대를 살아간 자의 고통이 담긴 현장이었고 그래서 슬픈 현장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는 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치욕을 긍정하고, 인조를 따라 내려갔던 시녀들의 통곡을 긍정하고, 주화파와 주전파 그 모두를 긍정할 수 있다.

 

 


     “... 남한산성의 서문(西門)은 처연하다. 산성 내의 수많은 용루와 옹성과 전각들 중에서 서문은 가장 비통하고 무참하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중략) 서문은 남한산성의 4개 대문 중에서 가장 외지고 작아서 출입구는 높이가 210센티미터, 폭은 14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성벽이 산비탈을 따라 낮게 내려간 골짜기에 이 서문의 출입구는 군사들이 성벽 안팍을 은밀히 드나들던 암문(暗門)처럼 보였다.(중략)

 

     1637년 1월 30일(음력) 새벽에, 인조는 세자를 앞세우고 서문을 나섰다. 도성과 대궐을 적에게 내주고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와 농성을 시작한 지 47일 만에 인조는 다시 산성을 버리고 치욕의 투항 길에 나섰다. 농성은 희망이 없었고, 기약이 없었고, 대책이 없었다. (중략) 왕은 곤룡포를 벗고 청나라 군대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이 청태종이 요구한 투항의 패션이었다. (중략)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언어의 전쟁은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 간의 논쟁이었다. 그것이 47일 동안에 남한산성에서 벌어졌던 싸움의 핵심부였다. 성 밖은 기마부대와 포병부대를 선봉으로 삼는 25만의 적병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그들의 목표가 아주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어도 사직과 백성과 국토의 보존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해 선택해야 하는 길은 정반대롤 갈라졌다. (중략)

 

     나는 투항으로써 나라를 지켜낸 인조의 치욕을 긍정한다. 나는 투항하는 임금의 뒤를 따라 눈 쌓인 산길을 걸어 내려갔던 시녀들의 통곡을 긍정한다. 삶이 불가능할 때, 영광보다도 치욕을 내포하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가르쳐준다. 치욕은 삶의 일부라고 가르쳐준다. 삶이든, 역사든, 오로지 온전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

 

- 김훈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2>>(생각의 나무, 2007) 중에서

 

 

 

    소설 <<남한산성>>의 매력은 이와 같은 작가정신에 있다. ‘정신’이라는 추상성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라는 구체성을 가지고 그 가치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는 과학과 문명, 기술이라는 구체성을 발전시키면서도 추상성을 가진 정신을 긍정하고 구체성의 총체인 ‘몸’을 부정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 사회와 서양 중심의 문화 영역에서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심화되면서 매우 기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좌와 우, 보수와 평등, 경쟁과 평등,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그 모든 것은 삶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요 관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의 행복을 위해 주장되는 이러한 이념과 관념에 집착하여  ‘투신자살하라’는 말을 서슴없이 외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정신’을 위해 ‘몸’을 버리는 이 기형의 모습은 역사적으로는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는 좌우 논란을 불어 일으키며 불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소설 <<남한산성>>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이즘과 관념, 윤리와 도덕, 그 모든 것의 앞에 ‘삶’과 ‘생명’이 있다는 것을 소설 <<남한산성>>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삶’과 ‘생명’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주전과 주화, 좌와 우, 모두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작가 김훈은 수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산성을 오르내렸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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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북 브리핑>을 위한 교육 자료로 쓰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