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세계의 징후를 포착하다.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by 이우 posted Oct 02, 2011 Views 11388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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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를 읽었다. ‘에티카(ethica)’란, 윤리(倫理)라는 뜻. 윤리(倫理)란, 인륜 ‘륜(倫)’에 다스릴, 이치 ‘리(理)’가 더해진, 풀어 말하면 ‘인륜의 원리’라는 의미다. ‘륜(倫)’을 파자(破字)로 풀어보면 사람 ‘人(인)’에 조리(條理)를 세운다는 ‘侖(륜)’이 합쳐진 것이다. 사람 ‘인(人)’ 대신 '차(車)'를 붙이게 되면 '바퀴 륜(輪)’이 된다. 바퀴가 궤적을 만들며 길을 따라가듯 사람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 ‘륜(倫)’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젊잖게 말하면 '륜(倫)’이란 자연적이기보다 인위적으로 조직된, 열렸다기보다는 닫혀진 표의를 가지고 있다. 대놓고 말해 윤리란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사회 관계’가 중심이며 우리의 삶에 울타리를 치고 테두리를 만드는 '지켜야 할' 규제의 성격을 갖는다. 법과 질서의 개념이 가시적이고 강제적인 규제라고 한다면, 윤리는 개인이 스스로 만들고 받아들이는 비가시적인 규제이다. 


  신형철의 이 책『몰락의 에티카』는 평론답게 문학 작품을 대상으로 ‘현상’만을 젊잖게 논(論)하지만 스스로 말하듯 ‘윤리학은 다급한 질문보다는 온화한 정답을, 내면의 부르짖음보다는 외부의 압력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면 ‘Anti-Ethica’쯤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신형철의 평론적 시각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나 레비나스의 윤리학보다는 라캉의 윤리학에 더 가깝다. 사실 윤리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가


     “먼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있다. (...)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내 변용의 원인이 되는 것이 윤리적인 삶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 (...) 그리고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있다. ‘기쁨의 윤리학’은 온 세상의 눈물을 닦지 못한다. 눈물이 있는 곳을 향해 ‘나’라는 좁은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빠져나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체의 자발성이 아니다. (...) 마지막으로 라캉의 윤리학이 있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이 추구한다고 간주되는 것은 ‘이상(ideal)' 혹은 ’선(good)'이다. 그러나 그런 윤리학들은 속임수가 아닐까라고 묻는다. 우리는 대체 ‘언제’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선한 것들은 과연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말이다. 라캉은 이상의 윤리학과 선의 윤리학이 유토피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p.164~165)


  ‘몰락의 에티카’라는 제목에 걸맞게, 신형철은 720쪽에 이르는 이 두꺼운 평론집에서 이른바 ‘반(反)-윤리’적인 작품들에게 무게를 싣는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밤의 푸른 냉장고는 고장이 났고 나는 거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둠으로 불 밝히는 캄캄한 대낮, 갈퀴 달린 내 손톱은 빙산처럼 희게 빛나는 검은 저 삼각주를 박박 긁어대는데 내 음부에서 철철 피 흘렀다. 달콤 쌉싸래한 시럽, 붉은 고 촛농에 젖어 살빛 카스텔라는 곰팡 난 매트리스로 푹 번져가는데 그 위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꿈틀, 꿈틀거리는 이봐요 고등어 부인 씨...... 그녀는 한창 자위 중이었다./ 대지의 손을 빌려 뜨거운 혀와 같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속속곳 속곳 속에 물살을 일으키는 그녀, 출렁출렁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를 이불처럼 덮어쓰고도 푸들푸들 살 떨어대는 그녀, 그녀가 내게 윙크하는데 새까만 그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오더니 가속도가 붙은 볼링공처럼 삽시간에 날 쓰러뜨리며 말했다. 너 하고 싶지? 에이 하고 싶으면서 뭘. 아뇨, 나는 아냣. 순간 나는 하이힐 벗어 그녀의 양쪽 뺨을 후려찍고 말았다. 거짓말! 분명 넌 하고 싶은 거야! 이런 씨발, 아니, 아니라잖아. 참다못한 내가 그녀의 알주머니를 싹둑싹둑 가위질하자 김말이 속 당면처럼 빼곡히 들어찬 그녀들이 잘린 입 밖으로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이봐 고등어 부인 씨, 난 단지 갑갑증이 나서 살짝 따고플 뿐이라고!”

(이 책 p.195)


  김민정의 시(詩) <고등어 부인의 윙크>라는 작품이다. 이를 두고 신형철은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움과도 무관하다. 그녀의 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p.196)라고 평한다. 신형철의 평론 또한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그의 목적지는 ‘에티카의 몰락’이다.


  사실 문학이란 에티칼(ethical)하지 않다. 문학이 윤리적이라면 상상의 힘을 빌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전 시가가 그랬고 신라 향가가 그랬고, 고려 별곡(別曲)이 그랬다. 열린 세계가 아니라 윤리라는 닫혀진 세계, 그 울타리 안에서 문학이, 작가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문학은 원래 ‘아름답지도’, ‘윤리적’이지 않지만 시대적·사회적으로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적'으로 때론 윤리적인 것으로, 때로는 반-윤리적인 것으로, 어떤 때는 금서(禁書)로, 또 어떤 때는 '장려 도서'가 되기도 한다. 신형철은 당연한 것으로 나아갔으나 세상은 놀랐다. 혹자는 '우리 문학의 서정성'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탄하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우리 문학의 몰락'이라고 평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니체의 말처럼, 윤리란 동요되면서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 동안 아무도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 문학도 있는 그대로 ‘대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신형철이 있어 평론 또한 있는 그대로 ‘대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신형철은 문학 평론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회와 관계하면서 윤리와 도덕이라는 속박에서 이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세계의 징후를 포착하고 있다. 단언하지 않지만 그 또한 억압과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 '해방'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주지 않는 세계, 상처받지 않는 '새로운 인간'을 산출하기 위하여.


   "도덕의 영역에서 모든 것은 동요하고 변화하며 생성하고 있다. 만물은 흐름 속에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유전한다.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잘못 평가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유전적인 습관이 우리를 내부를 끊임없이 지배할 지라도 말이다. (...) 새로운 습관, 즉 사랑하지 않지만 이해하고 미워하지 않고 달관하는 습관은 조금씩 같은 땅을 경작하여, 수천 년 후에는 아마도 현명하고 죄 없는(무죄를 인식하는) 인간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인류가 현명하지 못하고 부당하며 죄의식을 가진 인간을 산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권)』(프리드리히 니체·책세상·2001년·원제 :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1880년) p.121


  "우리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문학이란 의사소통의 일종이다. (...) '우리'는 말하자면 '의미 공동체'이다. 이 의미공동체는 의미의 발생과 파생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듯 '지금 여기'서 함께 진행되고 있는 삶의 공동체에 앉혀져 있다. (...) '지금·여기'란 계속해서 '언젠가·어느 곳'의 연쇄고리로 움직여 간다. '시(詩)'와 '경제'는 동일한 사회적 사건, 동일한 행동, 동일한 역사 안에서 '함께 의미지워진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그 징후를 예시받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래서 독자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징후의 내적인 의미를 자발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해방을 예시하는 방식이다."


- 황지우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황지우·한마당·초판 발행 1986년) p.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