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고독한 연대기_ <기다림>과 <광인>

by 이우 posted Oct 02, 2011 Views 9657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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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진의 소설, <광인(The Crazed)>(시공사, 2007)과 <기다림(Wating)>(시공사, 1999)



기다림 뒤에 ‘더는 없다’_ <기다림>(시공사, 1999)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가. 강변역에서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 사랑이 버스를 타고 도착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하진은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균형감각과 예술성과 절제미, 서정성까지 갖춘 필체로 ‘아니다’라고 말한다. 혹은 니체가 ‘행위자란 행위에 덧붙여진 단순한 상상적 허구일 뿐이며, 행위가 전부인 것이다’ 2)라고 했듯 ‘삶의 의미는 현재형이니 미래를 꿈꾸지 마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혹은, ‘사랑보다는 편안함을 택하겠다’는 린의 말처럼 그저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왜 그렇게 ‘목 메어 우는가’3)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미국 문단에서 ‘이 시대 최고의 리얼리스트(Realist)’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작가 하진이다. 리얼리스트. 스토리에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실재하는 그대로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 리얼리스트가 '있는 그대로’ 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서술해 나간 <기다림>의 줄거리는 단 석 자, ‘기다림’이다. 작가 하진의 뛰어난 문체를 빼고 보면 이 소설은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다림만 남는다. 소설의 주인공 ‘린’이나 그의 아내 ‘수위’, 유부남 린을 사랑하는 골드 미스 ‘만나’ 모두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심지어 소설이 끝나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기다림을 계속할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란 게 마냥 기다리는 일이라니!

 

     기다림은 이렇다. (1)도시의 골드미스 ‘만나’를 사랑하는 유부남 ‘린’은 촌스럽고 못생긴 그의 아내 ‘수위’와의 이혼을 기다린다. 이혼하기 위해 그는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고향을 방문하고, 해마다 법원에 가지만 늘 실패한다. (2)‘만나’가 기다리는 것은 린이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는 것이다. ‘린’이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오면 이혼에 성공했는지 늘 궁금해 한다. (3)린의 촌스럽고 못생긴 아내 수위는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위의 기다림은 침묵이다.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지만 시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셨고 딸 ‘화’를 잘 기른다.

 

     아내 수위와의 이혼을 위해 몇 번이나 집을 찾지만 그때마다 에피소드를 만들며 실패했던 린이 중국 법에 따라 별거 후 17년이 지난 후에야 수위와 이혼하고 만나와 결혼하면서 그 모든 기다림이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니었다! 기다림은 다시 반복하고 변조된다. (4)린과 결혼하고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는 만나는 심장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녀는 이제 죽음을 기다린다. (5)만나의 요청으로 전처 수위를 만난 린은 울면서 수위에게 돌아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린은 이제 수위에게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6)돌아오겠다는 린을 반갑게 맞이하는 수위는 다시 린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소설 속 인물들의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는데 작가 하진은 소설을 끝낸다. 린이 수위에게 돌아가지 않은 채, 만나가 죽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나고 주인공들은 그 상태로 소설 안에 갇힌다. 게다가 하진은 또 다른 기다림을 배치한다. (7)린과 만나의 딸 ‘화’는 애인과의 결혼을 기다린다. 딸 ‘화’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겠지만 앞선 세대 린과 만나처럼 연애와 결혼, 환상과 현실의 격차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다시 무엇인가를 기다릴 것이다. 앞선 세대와 같은 모양새로 사랑하고 기다리진 않겠지만 다른 이유, 다른 모양으로….

 

     ‘역사는 반복한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사>를 쓴 투키디데스가 한 말이다.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후 가라타니 고진 또한 설령 ‘종언(終焉)’을 선언한다 하더라도 ‘종언이란 역사에 있어 반복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4)고 냉정하게 말했고, 현대철학의 거봉 마르크스도 역사는 반복하지만 변조한다고 말했다.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을 거쳐 양(量)에서 질(質)로 변형되며 변화를 산출한다. 정의 모순은 반을 산출하고 동일화되고, 부정은 다시 부정되어 또 다른 질의 변화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하고 변조하면서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삶을 영위해 왔다. 만약 이야기를 이어간다고 해도 소설 속의 인물들이 다시 기다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하진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소설 속 인물들의 기다림을 종언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리얼(real)이다. 대체 리얼(real)이란 무엇인가. 리얼(real)을 ‘실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대체 무엇이 실재하고 어떤 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 참 리얼하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있는 것인가, 혹은 없는 것인가? 이미 눈치 챘겠지만 <기다림>은 삼각구도다. 얼마 전 종영된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김수현 극본, 정을영 연출)에 대입한다면, 세련되고 럭셔리한 외모의 ‘이화영(김희애 역)’은 ‘만나’, 착하고 천사 같은 아내 ‘김지수(배종옥 역)’는 ‘수위’, 궤도를 벗어나 두 여자 사이를 방황하는 ‘홍준표(김상종 역)’는 ‘린’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소설 <기다림>의 인물들과는 다르게 미워하고 분노하고 갈등한다. 이 삼각구도에서 절제와 기다림이 리얼인가, 아니면 갈등과 분노가 리얼인가. 혹은 소설 <기다림>이 리얼한가, 드마라 <내 남자의 여자>가 리얼한가.

 

    리얼리스트 작가 하진은 착했다. 착한 하진은 분노와 갈등과 배신이라는 극적인 요소를 빼고 위트와 해학이라는 다른 장치들을 스토리 속에 숨겼다. 이 장치는 자못 심각해질 수 있는 삼각구도를 갈등 없이 해결해 버리는 마력을 발휘했고 미움과 분노, 갈등라는 감정의 조울(躁鬱) 없이도 그의 소설은 재미있게 읽힌다.

     그런데, 읽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 인생이 뭐 별 것 있는가. 먹고(eat), 생존하고(survive), 재생산(re-produce)하는 것!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면 뒤에 더는 없다’는 니체의 말처럼 하진의 소설도 ‘기다림 뒤에도 더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리얼리스트는 ‘삶에 뭔가 있다’라는 망상을 버리라고 말한다. ‘사람들이여. 그게 다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아포리즘. 그렇게 마침내 리얼리즘은 니힐리즘(nihilist)5)과 만나고, 리얼리스트는 니힐리스트(nihilist)와 조우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뒷맛은 갑갑하다. <기다림(The Waiting)>은 저녁 거리의 한 모퉁이 앉아 ‘뭐, 그게 인생이지’를 중얼거리며 술 한 잔을 마시게 하거나 김행숙의 싯구처럼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헬리콥터처럼 공중6)”에 뜨고 싶게 만든다. 정말 ‘그저 그런 것’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그런 것’이라는 사실(real)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가끔 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Cogito ergo Boom!


(c)Copyright by Mudbull


▲ Canon EOS D60 / Tokina 80-200mm / 하회탈춤_중탈



무엇이 그를 미치게 하는가_ <광인(The Crazed)>(시공사, 2007)


    이 착한 리얼리스트가 세상에 쓴소리를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그의 소설은 문예사조로 치면 ‘리얼리즘(realism)’이다. 실물(實物)을 뜻하는 라틴어 'realis'에 생각이나 관념의 뭉치를 뜻하는 ‘-ism’이라는 꼬리표를 단 것이다. 관념이나 상상에 대립되는 ‘리얼’로 그는 세상에 관념의 소리를 내질러야 한다. 그것도 1989년 자신의 조국에서 일어났던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사태라는 참극을 이야기해야 하니 조심스러울 밖에 없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하는 현실주의적인 문예사조인 리얼리즘으로, 관념적인 유형보다 구체성을 중시하며, 이상주의와 같이 선택적/수사적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를 추구하는 리얼리즘으로 ‘관념’을 이야기해야 하는 난감함이다. 하진은 그 이야기를 ‘광인’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한다. 소설 <광인(The Crazed)>이다.

 

     소설 <기다림(The Waiting)>의 주인공들이 ‘사랑’에 몰입한다면 <광인(The Crazed)>의 주인공들은 <지적인 자유>에 몰입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 것도 없기는! 여기 사색과 문학의 즐거움이 있다.’ 적어도 샨닝 대학 중문학부의 ‘양 교수’에게는 그렇다. 그에게 있어 삶의 가치는 ‘먹고, 생존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라기보다 문학을 통해 삶을 조명하고 해석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돈이나 권력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지만 문학이란 범주 안에서만은 자유롭고 싶어 하는 이상주의자다.

 

     문제는 그런 그에게도 정치와 권력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는 ‘미쳤다’. ‘자유로운 문학은 없다. 단지 정치와 권력에 끌려 다니는 종에 불과하다’는 양 교수의 진술은 그를 미치게 했던 이유의 함축이자 이 소설의 핵심이고, 하진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정치와 권력에 끌려 다니는 종’으로서의 지식이라면 그것은 ‘지식 권력(savoir pouvoir)’7)이며 이를 거부하는 양 교수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란 뇌졸중이라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용하여 스스로 광인이 되는 것이었다. 양 교수가 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천천히 알아 가는 양 교수의 제자 ‘완지안’. 그는 미치는 대신 어디론가 떠난다. 혹은 잠적한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쓰면서 ‘미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자체도 하나의 광기일지도 모른다’는 파스칼의 말로 시작한다. 학생 식당의 ‘광인’은 권력 쪽에 썼다가 희생된 광인이며, 양 교수는 미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광인이다. 양 교수를 이용하는 권력의 하수인 ‘펭’은 권력의 기제 편에 선 광인이며 돈과 권력을 찾아 떠난 완지안의 애인 ‘메이메이’는 권력 기제를 받아들이는 자발적이고 소극적인 광인이다. <베이징 텐안먼 광장 인민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은 권력 기제를 거부하는 적극적인 광인들이다. 미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광인, 하지 않더라도 광인이라면 이 세계에서는 온전하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이것도 ‘리얼’이다.

 

    그래서 마침내 하진이라는 리얼리스트는 푸코와 조우한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하는가? 미셀 푸코식으로 말하면 그들이 정말 미친 것이 아니라 ‘권력이 미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그의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이른바 ‘광인’의 역사와 사회체제를 정리하고 ‘생산적 권력’, ‘생체권력’, ‘지식권력’이라는 개념을 탄생시킨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광인은 정상인과 구별되어 감금되거나 병자 취급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정상인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거리의 부랑자들은 예전에는 나병환자를 가두던 수용소에 감금되기 시작했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그들은 감금에서 해방되지만, 사회적 질서를 따르겠다는 전제하에서 풀러난다는 것이다. 양 교수처럼 책임지길 거부하는 자는 감금될 수밖에 없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한때는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어떤 특징으로 간주되던 유별난 행동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광기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가둬두어야 할 대상, 치료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의사’로부터 치료받아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광인과 정상인을 가르는 구분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고, 그렇게 병정신리학자와 권력은 밀착되어진다. 결국 지식과 권력이 뗄 수 없는 하나의 복합체. 푸코는 이와 같이 권력에 봉사하는 지식을 ‘지식 권력(savoir pouvoir)'이라 명명했다.

 

     여기서 미셀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국가권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인과 정상,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선을 만들고 유지하는 힘’을 말하는 것으로 ‘리얼’하게 표현하자면 ‘권위’라는 개념에 가깝다. 양 교수에게 어떤 모종의 권력에 순종하라고 음모를 꾸미는 ‘펭’은 하나의 권력이다. 펭의 권력은 국가권력(미국 출장비 문제)이기도 하고 지위(地位)를 이용한 개인 권력(추천서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권력은 우리 삶의 곳곳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다. 감옥은 물론이고 병원, 학교, 가정, 직장, 군대, 심지어 마켓 등 모든 근대적인 사회 체제에서 영역은 모두 권력이며 관습이나 고착화된 관념 또한 권력이다. 학교가 진정한 배움의 터전이 아니라 지식 상업을 통하여 사회 유지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학교 교육의 목적이 사회화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권력 기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슬라보에 지젝은 화장실에서조차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선언했다.8)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이데올로기 또한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념과 관습에 가까운 개념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러므로, 그래서 누구나 이데올로기로부터,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하진은 양 교수를 병사(病死)케 하고 완지안을 이름 모를 곳으로 떠나보내며 소설을 끝낸다. 독자에게 생각해 보라는 배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완지안의 이야기를 이어가봤자 결론은 같을 것이라는 하진식 ‘리얼’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소설 <기다림>에서 주인공들이 기다림을 반복하듯이 떠난 완지안은 ‘지식인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해묵은 담론과 만나고 스승 양 교수의 절망감을 다시 반복하고 변조할 것이다.

 

     동일자가 알지 못하도록 변장하고――머리를 깎고 옷을 바꿔 입고――어디론가 떠나는 타자(他者) 완지안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결국 하진식 반복과 변조의 끝, 그 결론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완지안은, 아니 우리는 이 담론의 해결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인가, 혹은 짜라투스트라처럼 체념이라는 깊은 절망을 안고 이 시대를 떠돌게 될 것인가?

 

 



 

각주)-----------------

1)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계 소설가. 본명은 진쉐페이(金雪飛)이며 하진은 필명 진하(金哈)의 영어 표기다. 1956년 2월 21일에 중국의 헤이룽장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으며, 그도 문화 혁명기인 1969년에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헤이룽장 대학교에서 영문학 학사를, 산둥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미국에서 톈안먼 사태를 접한 그는 미국에 남기로 결심하고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96년 <Oceans of Words>로 펜 헤밍웨이 문학상을, 1997년 <Under the Red Flag>로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문학상을 받아 미국문학의 흐름에 당당히 합류하였고, 1999년에 출간된 <기다림 Waiting>으로 그해 전미 도서상과 2000년 펜 포크너 문학상을 수상,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며 미국 문단에 파란을 일으켰다. 2004년에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War Trash》로 펜 포크너 문학상을 수상했고, 두 번째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2)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3)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중에서

4)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도서출판비, 2008)

5) 니힐리즘(Nihilism, 虛無主義)은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니힐)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사상적 입장이다. 우주·인생의 진실을 무(無)에서 보려고 하는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나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과 닿아 있다. 니힐리즘에서 니힐(nihil) 즉 무(無)가 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는 없는 것’이다.

6) 김행숙 시집 <<이별의 능력>>(문학과 지성사, 2007) 중 시 <착한 개> 중에서

7) 푸코(Michel Foucault, 1926-84)가 정립한 개념.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을 통하여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힘을 ‘권력’이라 해석하고, 지식이 그 경계선 유지에 사용되면 ‘지식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정신병리학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인 준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상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냐, 없느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처럼 지식과 권력이 뗄 수 없는 하나의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푸코는 ‘지식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8)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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