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정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_ <정의란 무엇인가>

by 이우 posted Sep 30, 2011 Views 2653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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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출판사 서평에 따르면, ‘자유민주사회에서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과 이견이 난무하는 이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 책이 ‘명쾌하게 대답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본 독자는 ‘명쾌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스럽다’. 이 책을 읽어본 대부분의 CEO들은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고 대학생들은 이 책으로 독서토론을 하고 ‘정의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말했다.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정의(justice)라면 정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마이클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등 고대부터 시작해 근대까지의 철학을 토대에 놓고 ‘행복 극대화(전체의 행복의 강조하는 이론), 자유(개인의 권리 존중을 강조하는 이론)’, ‘미덕’을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삼았다. ‘태풍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생활재의 가격폭리처벌법에 대한 찬반 논쟁’, ‘이라크 전에 참전한 군인 중 상이군인 훈장 수여 대상의 자격에 대한 국방부의 선택은 옳았는가에 관한 논란’ ‘구제금융을 둘러싼 논쟁’ 등 현대 사회의 문제를 사례로 들면서 각각 ‘행복 극대화’와 ‘개인의 권리 존중’, ‘미덕’이라는 기준에서 찬반입장을 제법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문제는, 찬반 입장 모두가 정의인 것처럼 보이거나 혹은 그 어느 것도 정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마이클 샌델이 규정하고자 했던 ‘정의(正義, justice)’는 철학자들에게도 골칫거리였다. 울피아누스는 정의를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했고, 존 롤스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본질이 평등’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했다. 평균적 정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만, ‘배분적 정의’는 ‘각자가 개인의 능력이나 사회에 공헌·기여한 정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분이 되는 평등이라니! ‘정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 책에서처럼, ‘정의’의 개념이 ‘행복 극대화’와 ‘개인의 권리 존중’, ‘미덕’이라는 관점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있는 것인가, 혹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인가. ‘정의(正義, justice)’란 관계를 전제로 한다. 언어적으로 말한다면 불완전명사(의존명사)다. 명사처럼 완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명사처럼 띄워 쓰지만 홀로 떼어 놓으면 아무런 내용도 갖지 못한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것, 그것이 ‘정의(Justice)’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지역과 지역 사이, 단체와 단체 사이의 관계를 떼어놓고 ‘정의(正義, justice)’를 말할 수는 없다. ‘그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할 때 ‘정의롭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 사람과 외부가 관계하면서 생기는 부차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그것이 ‘정의(正義, justice)’다.
 
     그래서, 관계의 양상이 변하면 ‘정의’도 달라진다. A에서 바라보는 정의와 B에서 바라보는 정의는 다르다. 미국이 ‘정의’를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정의’로운 행동이겠지만 이라크의 입장에서 보면 ‘정의’롭지 않다. 누아르의 세계에선 의리가 정의이고, 활빈당은 탈취가 정의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이 ‘자유사회의 시민은 타인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때도 있는가?’, ‘도덕적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도덕을 입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개인의 권리와 공익은 상충하는가?’라는 테제를 논제로 삼았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사실,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근대철학이다. ‘진리란 무엇인가’로 시작한 근대철학이 끝내 ‘진리’가 무엇인지 규정하지 못 하고 막을 내렸듯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역시 공허하다. 근대철학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테제로 철학을 딜레마로 빠뜨렸을 때 철학자들은 ‘진리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테제로 바꾸면서 현대철학을 열었다. 그럼, 물음을 바꿔보자. ‘정의’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의는 ‘정의’라는 모토를 앞세워 ‘정의롭지 못한 것’을 구분하고 제거하거나, 혹은 어떤 행동을 권장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법이나 제도 혹은 제도나 규칙 등 합목적적 질서체계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정의’는 그 ‘목적’에 잘 부합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토는 대부분 지배 원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헤게모니’로 작동한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를 규정하는 기준의 하나인 ‘행복 극대화(전체의 행복의 강조하는 이론)’는 ‘옳고 그름의 척도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도덕과 입법의 원리 입문>)이라는 ‘제레미 벤담’의 ‘모토에 따른 것이다. 공리주의로 불리는 이 테제 또한 합목적적 질서체계의 목적에 잘 부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다.
 
    벤담이 주창한 이 공리주의는 ‘행복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발상에서 시작한다. 벤담이 행복을 수량화하겠다고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연장선’이란 우스꽝스러운 척도를 만들었지만, 벤담의 사상을 전수받았던 ‘스튜어트 밀’조차 문제점을 깨닫고 개선하려고 했다. 행복을 수량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행복을 수치화하기는커녕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사람이 많은가,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가’라는 문제처럼 단순한 수치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현대철학에서의 공리주의는 '지배 원리로 작동하면서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것이든 도구로 삼아 사람을 감시하고 교육해, 질서를 만들고 유령처럼 군림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의 기준으로 내세운 ‘개인의 권리 존중’이나 ‘미덕’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권리란 무엇인가?, ‘미덕은 무엇인가’라는 테제로 바꿔보자. 이 또한 저마다 해석이 달라진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기준 삼아 ‘정의’를 규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가변적인 자로 물건의 길이를 잴 수는 없다.

     이렇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오래 묵은 중.근대의 철학적 담론들 중에서 자유민주사회(자본주의)에 잘 영합하는 부분만을 취하여 현대사회의 사례와 적당히 배열하고 알맞게 버무려 놓은 것이다. ‘행복 극대화, 자유’, ‘미덕’이라는 뭔지 모르는 것들을 기준 삼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에 답하지 못했고, ‘정의’란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 책은 ‘정치철학’이라는 ‘실용주의’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정의(justice)'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고 각자의 관점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 버린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아메리카적이다. 이 책은 미국이 세계2차 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본을 대상으로 첩보 활동을 하고 발간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나 단순히 인간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생물학 중심으로 전 학문을 통합시키자는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책 <지식의 대통합 통섭>을 떠올리게 한다. 철학이나 문화인류학, 심지어 물리학(오펜하이머 사건)과 같은 학문을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실용주의 냄새가 짙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마이클 샌델이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인 ‘행복 극대화, 자유’, ‘미덕’이 권력을 유지하고 영속하기 위한 헤게모니로 이용될까 싶어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