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노크하지 않는 집

by 이우 posted Sep 26, 2013 Views 857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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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리뷰 ]


노크하지 않는 집
현대적 사유와 그 고민을 엿보다


이우


 

 오랜만에 좋은 연극 한편을 보았습니다. 극단 ‘떼아뜨르 노리’의 <노크하지 않는 집>. 이 연극은 ‘한국공연예술센터 새개념 기획공연 선정작’이자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활성화 다원예술부문 선정작’입니다. 이 극을 준비한 극단 떼아뜨르 노리(Theatre Nori)는 1993년 어느 겨울 모스크바에서 ‘떼아뜨르 프로스뜨란스토브 이그리(놀이 공간)’라는 이름으로 창단해 1996년부터부터 ‘떼아뜨르 노리’라고 개명하고 <6호실>, <냉정과 열정 사이>, <바람의 키스> 등의 공연을 해 왔습니다. 이 극단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연극(演劇)과 전시(展示) 개념을 더한 ‘드라마 전시’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공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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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展示)와 극(劇) 사이

 

03노크하지않는집02.jpg   ‘드라마 전시’는 전시(展示)와 극(劇)을 합쳐 놓은 새로운 개념의 공연입니다. 2013년 9월 7일부터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 <노크하지 않는 집> 또한 ‘드라마 전시’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연은 1시간 20분 동안 3개의 파트(part)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처음 15분간은 <파트I: 전시>. 전시장을 온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마당극처럼 자유롭게 놓인 관람석 의자 가운데 무대가 꾸며져 있습니다. 임시 의자가 관람석이고 그 가운데 그저 다섯 개의 방과 공용 샤워룸, 오래된 세탁기가 덩그렇게 놓여 있습니다. 다섯 여자들이 사는 다섯 개의 방에는 오래된 이불이며, 밥상, 낡은 텔레비전, 앉은뱅이 책상 등 소품들이 흩어져 있고 관객들은 ‘노크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그녀들의 방’을 마음대로 구경하고, 마음대로 소품들을 만질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녀들의 방에 들어가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파트II : 배우 있는 전시>. 이 부분은 전시에서 극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있습니다. 기타리스트 박세환이 벤치에 앉아 스페인풍의 기타 연주를 시작하면 <파트II>가 시작됩니다. 다섯 개 방의 주인인 배우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 각기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갑니다.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관객들은 그녀들의 방에서 나와 방 밖의 잔디 위에 앉거나, 혹은 누워서, 더러는 서서 그녀들의 행동과 방을 구경하면 됩니다. 다섯 명의 여배우들은 관객이 없는 듯 그저 제 할 일을 합니다. 옷을 갈아 입거나 샤워를 하는 등 그녀들의 은밀한 일상도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빗소리가 들리면 본격적인 공연인 <파트III>입니다. <파트I>이 전시였다면 <파트II>는 전시에서 극으로 넘어오는 인터페이스이고 이 <파트III>는 극입니다. 배우들이 공연을 하고 있지만 다른 관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관객들은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임시 의자에 앉아 있거나 혹은 잔디 위에 철퍼득 주저 앉거나 혹은 서서 자신이 편한대로 관람하면 됩니다. 때로 개방되어 있는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서 무대를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다른 느낌으로 이 극을 관람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 연극은 무대가 마당극처럼 관람객 사이의 ‘마당’에 펼쳐져 있고, 현대극처럼 배우는 관람객과 호응하거나 소통하지 않습니다. 마당놀이가 기지고 있는 ‘열림(개방성)’과 현대 극(劇, drama)의 ‘닫힘(폐쇄성)’이 함께 혼재되어 있고, 관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전시장처럼 마음대로 이동하면서 관람할 수 있어, 현대 극의 관람 룰인 ‘고정’과 전시의 관람 룰인 ‘흐름’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렇게 ‘드라마 전시’는 닫힌 듯 열려 있으며, 열린 듯 닫히는 극(劇)과 전시(展示)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편함과 불편 사이

 

04노크하지않는집.jpg   ‘편하게’ 관람하면 되지만 이 극의 풍경은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직업도 생활 패턴도 모두 다른 다섯 여자가 한 집, 한 층, 다섯 개의 단칸 방에 각각 살고 있습니다. 이 다섯 여자들은 관객이 없는 듯 그녀들의 은밀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내보입니다. 방바닥에 난 담배빵 자국이 난 2평도 되지 않는 누추한 방이 편안하지 않고, 그 방에 놓인 낡은 가구와 널부러진 책이 편하지 않습니다. 관객이 없는 듯 속옷을 갈아입고, 생리혈이 묻은 이불을 공동 화장실에서 부비는 여자들의 은밀한 일상을 본다는 것 또한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살아가는 것이란 결국 먹고 자고, 배설하는 생리적 과정임에 틀림없는데 왜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며 불편해 하는 것일까요? 왜 이들은 구태여 불편한 일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 편함과 불편함 사이에 이 극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실제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추상을 더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환각(幻覺)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환각이 관념입니다. 서구의 근대철학은 정신(이성)과 몸(육체)을 구분하고 이성을 우위에 놓는 관념론적 사유 체계입니다. 서구 근대철학의 관념론적인 사유를 따라가면 욕망이란 것은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혹은 심지어 저주 받은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이 사유에서 욕망이란 식욕과 같이 생명체의 이기적인 것과 관련되거나 혹은 성욕과 같이 윤리적으로 위험한 욕구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서구 사유의 전통은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순수한 이성과 정신을 최고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이 사유 체계들이 나도 모르게 나에게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자고, 배설하는 너무나 당연한 생리적 과정을 보면 불편해지는 겁니다. 이 연극은 서구의 근대철학이 부정하거나 하대하는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것이 불편하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세계가 이성과 정신을 우위에 두고 있는 근대적인 관념론적인 사유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이성과 정신으로 추상하는 세계이며 개념화된 사회입니다.  좌와 우, 혹은 진보와 보수, 도덕과 질서라는 이념이 몸을 억압하고 있으며, 국가·지역·사회, 혹은 가족이라는 추상화된 개념을 위해 실제하는 개별자를 억압하고 있지요. 이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의 세계가 우리 사회이고 이 인식론적인 구조물은 개인의 내면에 무의식처럼 쌓입니다. 이 연극 <노크하지 않는 방>은 이 불편하기만한 그녀들의 일상을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주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불편하지?’ 이렇게 이 연극은 이성과 정신을 우위에 놓고 몸을 부정하는 근대철학의 관념론을 뒤집습니다.

 

 

  동일자와(同一者)와 개별자(個別者) 사이

 

06노크하지않는집.jpg   우리 각각의 내면에는 ‘도덕’과 ‘질서’와 같은 사회의 인식론적인 구조물이 무의식처럼 쌓여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들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이름하고 우리는 이 에피스테메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며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에피스테메는 한 시대의 인식론적인 구조물, 혹은 담론적인 실천을 묶어내는 관계들의 내면화된 집합을 의미하며 이 체계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을 일러 ‘동일자(同一者)’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사회가 규정해 놓은 인식론적인 구조물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하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개별자(個別者)’라고 말합니다. 살짝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동일자는 ‘보편자(普遍者)’, 혹은 ‘존재(存在)’로 혼용되고, 개별자는 ‘존재자(存在者)’로 혼용하기도 합니다.

 

  열 다섯살의 A와 B와 C는 모두 ‘개별자’로 실제하고 있지만, ‘중학교에 다닌다’는 개념과 의미를 부가하면 A와 B와 C는 모두 ‘중학생’이라는 ‘동일자’가 됩니다. 동일자는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고 그들의 명령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오롯하게 ‘나’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개별자 A, B, C는 제각기 차이를 가지고 있어 저마다의 삶을 향유하지만, 동일자 A, B, C는 동일한 패턴 속에 내던져진 채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등교하고 시간표에 맞추어 수업 받고, 자율 학습을 하다가 지친 채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이지요. 마찬가지로, 다섯 여자들의 일상을 보며 대부분 불편해 한다는 것은 우리는 개별자들을 실제하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해 놓은 도덕과 질서, 혹은 이러저러한 관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렇다면 우리는 개별자가 아니라 동일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동일자로서의 삶과 개별자로서의 삶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동일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실제하는 개별자를 억압하고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나’는 자유로운 개별자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의 인식론적인 틀에 갇힌 ‘동일자'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주체(主體, subject)일까요, 아니면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객체(客體, object)’일까요? 이 물음이 이 연극과 이 극의 원작인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문학(文學)과 극(劇) 사이

 

05노크하지않는집.jpg    이 연극의 원작은 <달려라 아비>, <나는 편의점에 간다>, <스카이 콩콩>,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영원한 화자>, <사랑의 인사>,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종이 물고기>, <노크하지 않는 집> 등 8개의 단편을 모은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년)입니다. 이 극은 원작 <달려라 아비>을 완벽하게 변주((變奏, variation)해 냅니다. 특히 작가 김애란이 전하고 메시지를 연극으로 옮겨내는 탁월한 변주는 정말 감탄할 만합니다.

 

  극의 공간적 배경은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의 변주((變奏, variation)입니다.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의 소설적 배경처럼 직업도 생활 패턴도 모두 다른 다섯 여자가 한 집, 한 층, 다섯 개의 단칸 방에 각각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탁월한 변주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놀랍게도 극 중의 인물들은 모두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에 나오는 소설 속 인물들의 변주입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늘 미래가 불안한 1번 방의 여자(최솔희 역)는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 속의 인물이며, 빛 독촉에 시달리며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2번 방의 여자(안하나 역)는 <종이물고기> 속의 인물입니다. 왕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학원 강사로 일하며 우울증을 앓고 있는 3번 방 여자(이승희 역)는 단편 <영원한 화자> 속의 인물이며, 나레이터 걸로 일하면서 늘 술에 취해 있는 4번 방 여자(김원정 역)는 단편 <사랑의 인사> 속의 인물입니다. 너무 소심해서 불면증을 앓으며 포스터 잇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5번 방 여자(김수레 역)는 단편 <노크 하지 않는 집>과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속 인물의 합(合). 여기다가 이들 사이를 다녀가는 불청객 수례의 아버지(강윤석 역)와 3번 방 여자의 후배(윤소영 역)까지 모두 소설 <달려라 아비>의 단편에서 도출한 인물들의 변주입니다. 무엇보다 탁월한 변주는 작가 김애란이 그의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어하는 전언(傳言)을 극으로 살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주제의 변주는 드라마틱하며 극적이기까지 합니다.

 


  … (전략) 철커덕, 4번방이 열린다. 방안에는 세 칸짜리 분홍색 서랍장 하나, 오른쪽 모서리 귀가 닳은 한 칸짜리 금성냉장고 하나, 그리고 생리 중에 흘린 피가 까맣게 말라 있는 아이보리색 요 한 채와 장미가 무더기로 그려진 이불이 있다. 세 칸짜리 서랍장 중 언제나 한 칸은 양말이나 티셔츠가 기어 나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이가 물려 있고, 냉장고 옆의 책장에는 몇 개 안 되는 씨디와 책들이 있다. 대개 서태지, 김현철, 이승환, 너바나, 비틀즈 등의 씨디다. 방문 쪽 콘센트에는 항상 휴대폰 충전기가 노란불을 켠 채 충전돼 있고 방바닥엔 군데군데 담배빵 자국이 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리고, 끝끝내 마지막 방까지, 나는 기어이 목격하고야 만다. 내 방과 가구에서부터 옷, 장신구, 책, 그리고 방바닥에 난 담배빵 자국까지 하나의 오차도 없이 징그럽게 똑같은 네 여자의 방을. (후략) …

 

-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 중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에서


  이것이 작가 김애란이 그의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에서 보여주는 풍경입니다. 1번 방 여자가 자신의 속옷을 찾기 위해 몰래 문을 따고 들어 간 여자들의 방은 ‘징그렇게’ 똑같습니다. 실제로는 성격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 그러니까 저마다 존재하는 서로 다른 여자들인데도 불구하고  풍경이 모두 같다는 것은 이들 모두가 동일한 패턴과 의식 속에 살아간다는 메타포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실제 있는 그대로의 개별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시스템과 시대 의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동일자라는 겁니다.

 

  이 풍경은 연극에서 다섯 여자가 서로 방을 바꾸는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변주됩니다. 어느 날 1번 방 여자는 3번 방으로 퇴근하고, 3번 방 여자는 1번 방으로, 2번 방 여자는 4번 방으로, 4번 방 여자는 5번 방으로 퇴근합니다. 분명 자신의 방이 아닌데 이 다섯 여자들은 자신의 방인 듯 ‘아무렇지 않게’ 생활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1번 방 여자인가, 2번 방 여자인가, 혹은 3번 방 여자인가? 이 사건을 바라보던 1번 방 여자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악!”

 


  주어(Subject)와 목적어(Object) 사이

 

09노크하지않는집.jpg    1번 방 여자의 이 단말마(斷末魔,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고통)는 자신이 개별자로 존재하며 나의 생각과 의지대로 살아가는 주체(主體, Subject)요 주어(主語)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하나의 동일성에 포획되어 있는 객체(客體, Object)이자 목적어(目的語)에 불과했다는 자각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개인 삶을 향유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김애란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의 풍경처럼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먹고 씻는 모습이 동일하며,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이 같습니다. 입고 있는 옷과 은밀한 속옷마저 같지요.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싫다’고 외치지만 실은 윤전기로 신문을 찍어대듯 대량생산된 옷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작가 김애란이 현대인이 가진 동일성을 자신의 단편 <노크 하지 않는 집>에서 단칸방 풍경으로 선언했다면, 극단 ‘떼아뜨르 노리’는 1번 방 여자의 비명으로 선언합니다.  극 중 인물인 다섯 명의 여자들도 가만 보면 자신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현대 우리 사회의 코드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즉, 주어(주체)가 아니라 사회가 항구적으로 결정해 놓은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목적어(객체)인 것이지요. 섬뜩한 것은 이것이 소설이나 연극 속 풍경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풍경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주어(Subject)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엇인가’와 ‘누군가’에 끌려다니고 제어당하고 있는 목적어(Object)라는 사실은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 아니, 슬픔에 잠기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대체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저 현대 사회라는 거대한 콘베어벨트가 생산하는 상품(동일자)일 뿐일까요?

 


  구성되는 주체(主體, Subject), 혹은 객체(客體, Object) 사이
 
  사실 이 문제는 중요한 철학적 화두(話頭)입니다. 서구 근대철학이 중세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데카르트의 ‘주체철학’ 덕분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란 그의 명제는 신(神)에게 복속되어 ‘객체’로 존재하고 있던 인간을 ‘주체’로 서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체’라는 이 관념론적인 환각은 오래 가지 못했지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버클리), ‘나, 주체 자아, 정신은 관념의 다발’(흄)일 뿐이라는 경험론을 거치면서 인간이 주체라는 환각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일 뿐이라는 ‘칼 맑스’의 선언,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라캉’의 발견,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그’라는 ‘지젝’의 명제를 거치면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무엇에 따라, 혹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는 객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呼名, interpellation)한다. (중략) 우리는 경찰의 일상적인 호명과 같은 유형 속에서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헤이, 거기 당신!” 이렇게 호명된다면 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 이 단순한 180도 물리적 선회에 의하여 그는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알 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중에서


08노크하지않는집.jpg   사람은 태어날 때 그저 벌거벗은 한 개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언제나 ‘나’를 부를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김이라는 성을 쓰는 가정의 한 성원, 남자, 한국인, 노동자 계층이라는 사회구조 속에 던져지는 것이지요. 사회구조에 익숙해 있는 가족들은 하나 둘씩 순차적으로 정해진 내용들을 가지고 ‘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얘야”라고 부르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대답하는 순간, 개별자인 나는 점점 특정한 주체로 구성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호명이란 행위를 통해서 개별자는 사회 구조의 어떤 한 가지 배역을 떠맡으면서 동일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젊은 시절의 알튀세르는 주체가 설정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먼저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데올로기’란 ‘사람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의식의 형태’입니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에피스테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사회적 인식들이 개인를 지배하기 때문에 나는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구성되어진 주체’, 극단적으로 말하면 ‘객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언하면, 나는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구성되어진 주체’, 혹은 ‘객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주체 형식이 구체적인 개별자에게 삶의 행복을 가능하게 해주는가의 문제입니다. 분명 이 연극에서 내린 결론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연극에서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있거나 우울증이나 불면증을 앓고 있으며, 빚 독촉에 괴로워하며 폭식합니다. 좋은 옷과 화려한 옷을 입고 출근하는 동일자는 자신만의 공간 안에 들어서면 초라한 개별자가 됩니다. 1번 방 여자는 자신의 몸을 옥죄였던 브래지어부터 벗어던지고, 2번 방 여자는 미친 듯이 과자를 먹고 성경 구절을 흥얼댑니다. 3번 방 여자처럼 우울증 치료제를 먹고 작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4번 방 여자는 술에 취해 구토를 하거나, 5번 방 여자처럼 불면증을 앓습니다.그러나 이 극에서 그 해답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그래서, 어쩌자고?

 

  철학자들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일 뿐이라는 ‘칼 맑스’의 선언,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라캉’의 발견,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그’라는 ‘지젝’의 명제를 거치면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무엇에 따라, 혹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는 객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에 대하여 답을 구한 것이 현대 철학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던 루소가 그랬고 정상과 비정상인의 경계를 걸었던 푸코가 그랬으며, 노마디즘으로 탈주를 외쳤던 들뢰즈도 그랬지요.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말년에 알튀세르는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는 제목을 단 장문의 논문을 통해서 ‘자신이 속한 구조가 슬픔을 준다면 인간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는 온전한 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존의 의미 체계와는 다른 의미 체계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우리는 과거의 의미 체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연극이 미처 말하지 않았거나,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현대인의 병적인 증후와 조짐에 대하여 말하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 황지우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엄격하게 말해, 이 연극은 또 작가 김애란은 현대인들의 병적인 증후를 드러내었지만 그 해답을 제시하지 않거나, 혹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극괴 작가 김애란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 황지우는 '문학이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짐과 상처에 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작가 김애란은 현대인의 병적인 조짐과 증후를 잘 포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며, 이 연극 <노크하지 않는 집> 또한 우리 삶의 상처와 징후를 김애란 만큼이나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0노크하지않는집.jpg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왕이 사라지고 코드화의 중심이 없어짐으로써 다양한 욕망이 자유롭게 충족될 수 있는 탈코드화 사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느 사회 보다 강력한 초코드화 사회라고 합니다. 현대 사회가 겉으로는 이전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본에 의해 욕망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상품생산과 이윤추구만을 강요하므로 인간 내면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욕망은 자본을 향한 것이거나, 자본으로 성취 가능한 것이거나, 자본에 의해서 결정되면서 개인들의 욕망들은 폐기되거나 억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바라본 현대 사회의 병적인 증후이고, 또한 작가 김애란이, 연극 <노크하지않는 집>이 바라보는 우리의 병적인 증후이자 상처입니다.

 

  극으로 돌아오면,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늘 반듯한 직장을 찾아다니는 1번 방 여자, 빛 독촉에 시달리며 장기 매매 제안를 받는 2번 방 여자, 우울증을 앓고 있는 3번 방 여자, 늘 술에 취해 있는 4번 방 여자, 불면증을 앓는 5번 방 여자, 몸 누일 곳조차 없어 몸 누일 곳 없는 5번 방의 아버지와 3번 방 여자의 후배까지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지금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욕망을 따라가는 인간 군상들의 합(合)입니다. 이들은 모두 안정적인 직장과 사회적인 성공, 돈을 벌고 싶다는 사회의 욕망을 따라 코드화되어 있습니다.

 

  극단 ‘떼아뜨르 노리’는 이 불편한 사실을 용기있게 연극 <노크하지 않는 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원작을 완벽하게 변주((變奏, variation)해 낸 각본이 예사롭지 않으며 큰 무대 장비 없이 1시간 20분 동안을 런닝하는 연출과 진행도 훌륭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 김애란이 전하고 메시지를 극으로 옮겨내는 탁월한 구성력은 정말 감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편한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잖아요? 이 연극, 롱런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