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후기] 상처받지 않을 권리

by 이우 posted Jul 12, 2013 Views 628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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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세계를 추상하여 인식합니다. 사랑, 정의, 정치, 경제, 도덕, 예술, 환경, 법, 국가…. 세계에 실재하는 것들에게서 차이를 제거하고 공통분모를 축출함으로써 사랑은 이러저러하고, 국가는 저러이러하다며 규정하고 그 개념을 포착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개념은 규정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기 힘들고, 평화라고 말하지만 평화가 무엇인지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의(正義)를 외치지만 무엇을 두고 정의라고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확하지 않은 개념들을 명확한 것처럼, 틀림없는 사실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추상화된 개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이 이러하고 저러해야 한다고 하지만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 없으면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릿하고 멍청합니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인식이 없으면  단순한 이야기조차 이어갈 수 없으며 글 한 문단도 쓰기 힘듭니다. 우리에겐 추상화된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구체적인 인식이 필요합니다. 도서관 계단을 올라가다 만난 동기의 눈망울이 사슴 같다는 구체적인 사건을 만날 때,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녀의 등 뒤로 봄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구체적인 사건이 있어야 우리는 마침내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그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당신은 낙타인가’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낙타라는 의미는 누군가 올려준 짐을 지고 이유도 모른 채 땀을 흘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때의 짐이란, 개별자들에게서 그 차이를 배제하고 추상화한 개념으로 규정해 놓은 책임감, 의무, 도덕, 법과 질서 등과 같은 추상성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책임감, 의무, 도덕, 법과 질서와 같은 개념들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며 삶을 살아갑니다. 이 추상적인 개념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삶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재하는 것은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이며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이러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재하는 개별적인 사랑은 저마다 다릅니다. 개별자들은 차이를 제거한 공통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른, 아주 특별한 사랑을 합니다. 개별자가 하는 사랑의 공통성을 축출해 사랑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지만 가만 보면 개별자가 하는 각기 다른 사랑은 추상화시킨 사랑이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삶이 특별해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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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추상화하고 개념화하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실제에서 차이를 제거하고 그 개념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상화하고 개념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설령, 추상화하고 개념화하지 않은 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망각하기 쉽지요. 개념화할 수밖에 없다면 제대로 개념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잘못된 개념을 가지면 자칫 삶 전체가 잘못될 수 있습니다. 

 

  2013년 경북도립대학교 <인문고전 만남>의 주제인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라 불리는 철학자 강신주의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 살아가는 이 땅의 개별자들의 아픔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순하게 말해, 저마다 차이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에게서 그 차이를 배제하고 추상화한 개념으로 동일화하는 사회 속에서는 누구나 상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동일성은 ‘돈’을 향한 욕망입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통해 ‘자본’이라는 추상성을 따라가는 삶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처럼, 현대 사회는 왕이 사라지고 코드화의 중심이 없어짐으로써 다양한 욕망이 자유롭게 충족될 수 있는 탈코드화 사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왕의 역할을 자본이 대신하며 이를 중심으로 욕망이 통제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는 오히려 어느 사회보다도 강력한 초코드화가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현대 사회는 겉으로는 이전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듯 보이나 실상은 자본에 의해 욕망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상품생산과 이윤추구만을 강요하므로 인간 내면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욕망은 자본을 향한 것이거나, 자본으로 성취 가능한 것이거나, 자본에 의해서 결정되면서 개인들의 욕망들은 폐기되거나 억압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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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용산 참사'와 '흡연에 대한 담론들', 사람을 자원으로 인식하는 이런저런 경제 논리들, 나아가서는 개별자의 사랑까지도 경제 논리로 포획하는 우리 사회의 저런이런 모습들이 그 좋은 예입니다. 늦둥이의 탄생을 보고 ‘언제까지 일해야 하는가’를 떠올렸다는 이문재 시인과 ‘주택대출금을 갚다보니 늙었더라’는 소설가 김훈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을 향한 욕망들 때문에 학교는 이미 돈을 구하기 위한 컨베이어 벨트가 되었고, 사람이 자원화되었으며, 심지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경제재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젊음들입니다.

 

  사회의 동일성에 편입되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존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동일성에 포획되지 않을수록 상처받지 않습니다. 강신주의 말처럼 ‘삶은 항상 낯설어지는 과정'이며, 차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개체들입니다. 사람을 추상화한 관념으로 환원시키지 마십시오. 자신이 선택하는 온전한 내 삶을 시작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기존의 의미 체계와는 다른 의미 체계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과거의 의미 체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순수한 결단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친 타자의 타자성입니다. 기존의 의미를 뒤흔드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주체는 의미를 새롭게 생산할 수 있습니다.

 

 

  “… 친숙하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에 길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길들면, 우리는 그것을 나의 일부분인 듯 편하게 여기기 쉽지요. 누군가 그것을 문제 삼을 때, 우리가 마치 모욕을 당한 듯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친숙한 것이 항상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하는 일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은 우리의 뜻과는 다르게 항상 낯설어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 서문 중에서

 

 

 

 

 

 

 

 

 

 

 

2013년 경북도립대학교 인문고전 만남 커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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