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영화 「붉은 수수밭」 : 전쟁을 피하는 방법

by 이우 posted Dec 05, 2012 Views 14008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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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영화 <붉은 수수밭> ]

 


전쟁을 피하는 방법
 <붉은 수수밭> · 개봉 : 1989년 09월 09일 · 감독 : 장예모

 

 

이우

 

 

  <영화로 보는 인문학> 세번째 영화로 <붉은 수수밭 (Red Sorghum, 紅高梁)>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중국작가 ‘모옌(Mo Yan, 莫言, 본명: 管謨業)’의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이 원작입니다. 모옌이 1987년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발표하고 그 작품을 장예모 감독이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 모두 사실주의 표현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이나 영화나 모두 인물들의 삶을 묘사하여 보여줄 뿐 감독이나 작가의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요.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아름다운 이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에 포인트를 맞춘다면 이 영화는 ‘드라마’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영화 끝 부분에 나타나는 중일전쟁에 초점을 둔다면 ‘전쟁 영화’로도 분류될 수 있습니다. 이런 애매성은 원작 소설을 쓴 ‘모엔’의 작가성에서 생깁니다. 모옌은 최근 중국 최초로 ‘계획생육’을 정면으로 다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소설 <개구리>(민음사. 2012년)를 내놓았습니다. 그는 이 책의 한국어 판 서문에서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을 쓰는 것’이며 ‘나는 사람을 똑바로 보고 쓰기로 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옌에게 글은 바로 ‘사람’. 그래서 모옌은 직접적으로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 제도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저 삶을 담담하지만 실감 있게 표현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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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사람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절로 사회 제도나 질서체계, 정치적 성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혼자 존재할 수 없고 군집으로, 즉 사회를 만들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어떤 형태로든 사회 질서나 제도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옌의 작품 속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사회 제도나 국가 질서 안에서 힘들어하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설 <개구리>가 그랬고 그의 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장예모 감독의 이 영화 <붉은 수수밭>도 그렇습니다. 소설 <개구리>가 자국의 제도와 사회 질서, 푸코 식으로 말하면 ‘공동의 강제, 공동의 의견’ 속에 힘들어 하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면 영화 <붉은 수수밭>은 일본이라는 근대국가에 의해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옌에게 있어 국가란 공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강제와 억압의 주체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실체입니다.

 

  국가가 정말 강제와 억압의 주체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실체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국가의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중세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 형식은 서구 근대국가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중세 사회를 지탱하게 했던 것은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축이었습니다. 종교는 신성의 영역을, 국가는 세속의 영역을 분담해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신을 대신했고, 국가는 교회의 정치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이 질서체계가 해체되자 국가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성립한 서양의 근대국가는 신성의 원리로 구성되는 중세 국가와는 달리 영토를 중심으로 하는 영토국가였으며, 이 새로운 근대국가를 정당화시킨 것은 계몽주의자 영국의 홉스와 로크가 중심이 된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이었습니다.

 

 

  “사회가 없었을 때, 우리는 자연 상태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었지만, 자율성 안에는 해로운 자유와 해롭게 하는 자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긍정적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연권과 끝없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만이 있었다."

(<Bellum omnium contra omnes>. Hobbes, 1651년)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피하고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사회 계약에 동의하게 된다는 것이 사회계약론입니다. 몇 가지의 자유를 버리는 대신 우리는 각각 시민권을 얻게 되고 안전과 평화를 보장 받습니다. 근대국가의 탄생을 정당화한 사회계약론은 결국 자연 상태에서 벌어지는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이를통해 정당성을 획득한 국가 또한 전쟁을 피하기 위한 사회 형식이었습니다. 정말 자연 상태에서의 우리는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정말 우리는 국가가 있어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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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열 여덟 살의 '추알'(공리 역)은 나귀 한 마리와 맞바뀌어 쉰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고 있는 양조장 주인 문둥이 '리서방'에게 팔려갑니다.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는 ‘추알’은 황톳길을 지나 붉은 수수밭을 지납니다. 가마꾼 ‘유이찬아오’는 아름다운 ‘추알’을 사랑하게 되고 흔들거리는 가마 문틈으로 보이는 ‘추알’의 가죽신에 눈을 뗄 줄 모릅니다. 신행길에 올라 친정으로 가던 날, 마침내 ‘추알’과 ‘유이찬아오’는 붉은 수수밭에서 사랑을 나눕니다. 장예모 감독은 이들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바람에 몸을 누이고 일으키는 붉은 수수들의 흔들림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내어 두 사람의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해 냅니다. 바람에 누웠다 일어나는 넓은 수수밭 영상은 압권입니다.

 

  이 ‘붉은 수수밭’은 씨를 뿌린 것도 아니고 가꾼 것도 아니라는 나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그저 바람에 날려 왔던 씨가 뿌리를 내리고 해와 물이 길러낸, 대지가 만들어낸 자연 그대로의 수수밭입니다. 이 원시 상태의 붉은 수수밭에서 그저 자연인(自然人)으로서의 '추알'과 '유이찬아오'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자연인이 아니라 국가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는 ‘추알’은 분명 유부녀입니다. ‘추알’이 이 제도와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면 이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사랑을 두고 우리는 ‘원초적인 사랑’이라 표현합니다. 사실 ‘추알’은 영화의 초반부에서부터 질서체계를 무너뜨리는 인물로 상정되어 있습니다. 당나귀 한 마리에 자신을 판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고, 시집을 가면서도 가차 없이 내리쬐는 햇볕 아래 '유이찬아오'의 우람한 몸을 보면서 흥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비적이 등장했을 때 ‘추알’은 과감하게 ‘비적’을 처치하라는 신호를 '유이찬아오'에게 보내는 당찬 여자입니다. 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 있는 여성이 아니라 태어난 그대로 원시의 생명력을 가진 여자가 ‘추알’입니다.

 

  홉스의 말대로라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투쟁과 전쟁만을 일삼는 간악한 무리’여야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수수밭에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전쟁이 아니라 사랑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붉은 수수밭에서 등장하는 비적이나 누군가 양조장 주인 리서방이 살해하는 정도가 홉스가 말하는 만인 대 만인의 전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영화는 줄곧 이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초첨이 맞춰집니다. 사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투쟁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고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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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계속됩니다. 남편이 살해되는 바람에 과부가 된 '추알'은 양조장을 재건합니다. 친정에 가는 날 붉은 수수밭에서 그녀를 범한 '유이찬아오'는 그녀와 동침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떠벌려 그녀를 괴롭히고 새로 빚은 고량주에 오줌을 누는 등 말썽을 피웁니다. 그리고는 '추알'을 안아들고 자신이 주인이라며 안채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유이찬아오'가 오줌을 눈 고량주는 어느 해보다 맛있는 고량주가 돼 '18리 고량주'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습니다. ‘유이찬아오’가 ‘추알’의 남편으로 양조장을 돌보게 되자 양조장에 가장 나이 많은 일꾼인 '라호안'이 사라집니다. 여기까지 이 마을은 평화를 유지합니다.

 

  그로부터 9년 후. 이 마을의 평화는 들이닥친 일본군에 의해 깨지고 맙니다. 중일전쟁이 터진 겁니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입니다. '추알'과 '유이찬아오'가 사랑을 나눈 붉은 수수밭은 군용도로를 만드는 일본군에 의해 파헤쳐지고 공산당원이 되어 항일 게릴라로 활동하던 '라호안'은 산 채로 일본군에게 잡혀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 끝에 죽습니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붉은 고량주에 불을 붙여 기관포를 앞세운 일본군과 싸우지만 '추알'이 일본군의 기관총에 맞아 죽고, 뒤늦게 터진 폭탄으로 수수밭은 붉은 화염에 휩싸입니다. 삽시간에 수수밭은 피로 물듭니다.

 

  요약하자면, 원시의 붉은 수수밭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던 근대국가들이 일으킨 전쟁에 의해 파괴됩니다. 수수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인의 만인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던 근대국가는 ‘추알’과 ‘유이찬아오’, 붉은 고량주를 만들며 대지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던 양조장의 일꾼들 등 모두의 존재를 소멸시킵니다. 근대국가는 산 채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게 하고, 대지가 사람의 피로 물들어 붉어질 만큼 잔혹한 집단 살인을 저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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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홉스에게 '정말, 당신의 사회계약설이 맞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홉스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괴물 ‘리바이던’을 저서의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막강한 힘을 지닌 그 괴물을 국가에 비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홉스는 그의 책 <리바이던>에서  ‘국가란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국가 안에서의 모든 개인들은 상호 간의 계약을 통해 공동 행동을 하고 자신들의 평화와 방어를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막강한 힘은 전쟁을 막는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는데 사용됩니다. 사회계약설을 기반으로 했던 이 근대국가가 만들어낸 것은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만약, 홉스가 살아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자신이 세운 이론 체계를 포기하고 싶었을 겁니다.

 

  정치인류학이라는 독창적인 학문을 개척했던 정치철학자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년~1977년)는 ‘국가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디언 사회는 야만사회가 아니라 고대의 문명사회였으며, 이런 점에서 진정한 야만사회는 오늘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국가사회’라고 말했습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년~1984년)나 질 들뢰즈(Gliies deluze, 1925년~1995년) 같은 현대 철학자들도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의 개념’을 부정합니다. 국가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며, 모엔의 소설 <개구리>에 나타나듯 사회 구성원에게 ‘강제성’만 행사하는 어쩔 수 없는 합법적인 폭력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나 사회를 해롭게 하는 행동을 법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공동의 강제, 공동의 의견”에 의해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푸코에게 있어 국가는 사회 계약이라는 명분을 통해 합법적으로 ‘강제’를 행사하는 권력이며 범죄자를 생산해 내는 적극적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푸코는 ‘국가 안에 있는 우리는 모두 잠재적 범죄자들이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붉은 수수밭에서 사랑을 나누던 원시의 ‘추알’과 붉은 수수로 붉은 고량주를 만들어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건장한 청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자연 상태 속에서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막겠다며 기획했던 국가 형식이 도리어 전쟁을 일으킨다면, 자연 상태가 전쟁을 일으키는 야만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 사회가 전쟁을 일으키는 야만상태라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춘추전국시대 국가가 있어 전쟁이 일어난다던 세계 최초의 아나키스트 양주(楊朱, BC 440년~ BC 360년)처럼 국가를 부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다행으로 아직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개념과 형식을 다시 정립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 구성원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구성원 삶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국가의 개념과 형식을 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참, 다행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도가 이루어진다면 아름다운 이 영화를 참혹하게 만들었던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죠? 국가 형식의 재정립은 바로 우리 자신의 합의에 의해 도출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