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영화 「케빈에 대하여」

by 이우 posted Aug 12, 2012 Views 20675 Replies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탈근대로 포장한 근대성
- <케빈에 대하여> | 원제 : We Need to Talk About Kevin | 감독 : 린 램지 | 2011 -
 


이우


 

영화_케빈_포스터.jpg

  아주 애매하고 모호한, 그리고 매우 영국적이거나 미국적인, 혹은 모르거나 비겁한, 그리고 근대적인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012년 7월 개봉한 <케빈에 대하여>(감독 : 린 램지 | 출연 : 틸다 스윈튼, 에즈라 밀러, 존 C. 라일리 / 원제 : We Need to Talk About Kevin | 2011)입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자유로운 여행가처럼 보이는 ‘모험가’ 에바(틸다 스윈턴)는 원치 않던 임신 끝에 아들 케빈(이즈라 밀러)을 낳습니다. 그러나 행복했던 그녀의 삶은 아들의 출생과 함께 불행해지고 맙니다. 다른 가족과는 잘 지내는데 엄마 에바에게만 교묘하면서 집요하게 엄마의 신경을 건드리는 케빈 때문입니다. 어느 날, 케빈이 다니는 학교에서 수십 명이 다쳤다는 TV 뉴스를 듣고 다급하게 학교로 찾아가는 에바. 그러나 끔찍한 소식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케빈은 아무런 이유 없이 아버지가 사준 활로 학교 친구들을 무차별 살상합니다.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 케빈은 학교 친구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2002)이나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2003)와 같은 내용입니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주인공 케빈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눈치 채셨을 겁니다. ‘케빈’은 2005년 미국 북부 미네소타 주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이고, 2012년 7월 미국 콜로라도 주 한 극장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 한국계 미국인 조승희이기도 합니다. 또,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묻지마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원제가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인 것을 보면 린 램지 감독은 왜 케빈이 그런 일을 일으켰는지를 말하고 싶어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린 램지는 영화에서 어머니인 에바와 아들 케빈의 갈등만 드러냅니다. 영화를 홍보하는 전단지에도 ‘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고, SBS는 <영화 소개>를 통해 ‘케빈을 위하여, 당연한 그러나 절박한 그 사랑’이라고 리뷰하고 있습니다. 모성에 대한 아이의 갈구와 엄마가 된 여성의 두려움을 담은 영화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애증의 모자관계에서 사랑보다 증오가 앞서 표출될 때 벌어질 수 있는 파국에 대한 처절한 기록’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비해 MBC는 조금 더 논리적인 리뷰를 싣습니다. ‘악몽의 모자관계, 케빈에 대하여’라고 타이틀을 달고 ‘뒤틀린 모자관계’나 ‘헝클어진 인간관계에 대하여 섬세하게 풀어낸 시적인 영화’라고 평합니다. 그러면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2003)가 청소년기의 불안한 심리와 각종 차별과 같은 사회적인 접근으로 텍스트를 다루는 데 비해 <케빈을 위하여>는 인간의 본성과 모자 관계의 근원적인 불안감 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봅니다. 또 영화는 ‘엄마이기 때문에 악마와 같은 아들 케빈을 견딜 수밖에 없는 천형(天刑)을 극복해야 하는 에바의 시선을 잘 따라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하늘이 내린 형벌, 천형(天刑)’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일까요?

 

  이들의 리뷰가 틀리지 않았다면, 케빈이 친구들을 학살한 이유가 ‘모성에 대한 아이의 갈구와 엄마가 된 여성의 두려움’, 혹은 ‘모자간의 갈등’에서 생겨난 것이고, 나아가서는 ‘가족 문제’로 환원됩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 그렇다면, 가족의 화합이나 소통, 그리고 모자 간의 화해 정도로 이야기되고, 나아가서는 자녀교육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유독 왜 왜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일까요? 케빈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묻지마 범죄’, 혹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총기 난사 사건’의 주인공들이 그저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영화에서도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전적으로 ‘케빈’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상정됩니다. 주인공 ‘케빈’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인 에바의 기대와는 반대로 엇나가가기만 하고 오직 엄마만 알 수 있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힙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겁니다. 영화에서 케빈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론적으로 ‘악마’였던 겁니다.

 

  헐!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다니! 에바는 가족 중 유독 자신에게만 마음을 열지 않는 케빈과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케빈은 교묘한 방법으로 에바에게 고통을 줍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사랑할 수 없는 아들을 끝까지 홀로 사랑해야만 하는 어머니의 고통’이라고 리뷰합니다. 에바가 고통스러워하며 거리를 걷는 장면에서는 ‘삶은 기쁘기보다는 슬프고,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하며, 지옥’이라는 찬송가 같은 OST가 흘러나오기도 하지요. 세월이 흘러 청소년이 된 케빈은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계획적으로 활을 들고 학교로 가서 동급생들을 살상합니다. 이것 역시 이유는 없습니다. 케빈이 태어날 때부터 이유 없이 ‘악마’였다고 상정되었으니 일을 내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반면에, 어머니 ‘에바’는 ‘세계 곳곳을 누리는 여행가’, 악마 같은 아들 케빈을 끝까지 사랑하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케빈이 친구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교도소에 가지만 영화의 끝 장면은 어머니 에바가 말없이 악마 같은 아들 ‘케빈’을 안아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아들 ‘케빈’ 때문에 삶을 파괴당하지만 끝까지 사랑하지요.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이니까요. 이쯤되면 이 영화가 서구의 근대적인 사유 패러다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영화_케빈A.jpg  케빈은 날 때부터, 그러니까 존재론적으로 ‘악마’로 태어납니다. 서구의 근대적 사유의 전통인 <그리스로마 문화>와 <기독교>에서는 케빈처럼 이유 없는 ‘악마’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인간은 이유 없이 악을 행하는 존재였습니다. 처음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사람들은 모두 선(善)하고 진리(眞理)와 정의(正義)가 행해졌지만, 인간은 점점 매우 부도덕(不道德)해져서 전쟁을 일삼는 존재가 됩니다. 더 이상 신들이 타락한 땅 위에서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게 되어 떠나 버리지요(제2장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그래도 정의(正義)의 여신 ‘디케(Dike)’는 인간을 내버리지 않고 혼자 남아서 정의를 계속 설교하고 교화합니다. 한 손에 정의를 심판하는 큰 칼을 들고 말입니다. 그런 설교와 교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계속 여기에서 악하게 되자 디케마저 인간을 떠납니다. 여기에서 선(善)과 진리(眞理), 그리고 정의(正義)의 문제, 나아가 ‘계몽주의’라는 근대적 사유가 잉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서구 근대국가의 기반이 된 이론인 ‘사회계약론’도 기본적으로 인간을 악한 존재로 전제하고 시작합니다. 사회계약론에 입각하여 국가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최초의 근대철학자는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외부의 강력한 위협으로부터 보존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의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혹은 ‘전쟁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었고,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투쟁과 전쟁만 일삼는 간악한 존재였지요. 홉스는 이 상황으로부터 모든 갈등과 대립을 종식시켜 줄 공통적인 권위가 필요해져서 국가를 탄생시킵니다. 홉스의 이야기가 타당하다면, 인간은 국가라는 공통적 권위에 의해 무질서와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문명상태’로 이행하는 데 성공하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서구의 근대성의 특징은 몸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욕망이라는 것은 그저 이성이 통제하고 지배해야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란 것에 좋은 점수를 줄 리가 없습니다. 서구 근대성의 특징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 케빈도 그저 태어나자마자 이유 없이 ‘악마’로 묘사됩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 ‘린 램지’지만, 그녀 또한 근대를 주도했던 영국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에바’는 어떨까요? 영화를 설명하는 공식적인 자료, 또는 대부분의 언론에서 에바는 ‘자유로운 여행가’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행가’가 아니라 ‘모험가’라고 해야 맞습니다. 영화에서 에바는 자신의 모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발간합니다. 어느 날 그의 아들 케빈은 서점에서 엄마 에바가 쓴 모험기를 광고하는 대형 포스터를 보게 되지요. 거기에는 분명히 에바를 ‘모험가’로 광고하고 있지요. 또, 영화에서 케빈의 아버지가 정원이 있는 주택으로 집을 옮기고 싶어하지만 에바는 아파트를 고집합니다. 자유로운 여행가가 편리한 아파트를 고집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에바가 ‘자유로운 여행가’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반증일 겁니다.

 

  ‘여행’과 ‘모험’의 의미는 매우 다릅니다. ‘여행’의 표상이 ‘자유’라면, ‘모험’의 표상은 ‘탐험이나 개척’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하는 에바는 탈근대적이지만, 모험을 하는 에바는 근대적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나 ‘콜럼버스’, 그리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는 ‘바스코 다가마’를 두고 우리는 ‘자유로운 여행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국은 이런 ‘모험’을 감행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고 이런 모험 덕분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이성’을 강조하고 ‘몸’을 부정하는 근대적인 명제를 합법화시켜 나갔지요. 그러나 그건 분명한 것은 학살이었고 지배였습니다.

 

영화_케빈B.jpg

  영화에서 에바는 ‘자유롭게’ 세계 곳곳을 누비지만 뜻하지 않게 아들 케빈을 낳고는 정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불행해지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녀는 존재론적으로 악마인 케빈 때문에 ‘희생’해야 했지만, ‘사랑’의 이름으로 견뎌냅니다. 근대적으로 본다면 정말 도덕 명령과 기독교적인 계율도 잘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유’롭게 세계를 누렸다는 것을 근거로 해 근대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라고 오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에바의 ‘여행’은 ‘자유’가 아니라 ‘구속’입니다. 일상적으로 ‘자유(Freedom)’의 상대어는 ‘구속’입니다. 즉, 구속되지 않은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상적으로 볼 때, 영화 속 에바는 구속되지 않고 세계 곳곳을 누비기 때문에 ‘자유롭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에서 ‘자유’의 상대어는 ‘필연’입니다. 즉, 필연이 없는 상태를 ‘자유’라고 말합니다. ‘자유’를 뜻하는 영어 ‘free’, 프랑스어 ‘libre’, 독일어 ‘frei’의 형용사들은 모두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자유란 ‘자신을 얽매이는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의미에 따르면, 스스로 얽매임이 있다면 자유로운 상태가 아닙니다. 에바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여행을 떠난다면 그 여행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구속’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도 얽매임이 없는 것입니다. 케빈을 낳기전 에바의 삶은 ‘자유’가 아니라 ‘구속’ 상태였고, 케빈을 낳은 후에도 에바는 구속 상태였습니다.

 

  또, 에바를 두고 들뢰즈 식으로 말해 ‘탈영토화’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현대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탈영토화’는 현대철학자 들뢰즈의 ‘노마디즘’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노마디즘, 즉 유목주의란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고, 다시 탈영토화하면서 동일성과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지 못한다면 ‘탈영토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화 속 에바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낯선 풍경에 대한 동경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에바의 여행은 ‘탈영토화’가 아니라 익숙함을 참을 수 없어, 혹은 낯선 풍경의 동경심 때문에 떠난 것 뿐입니다. 정말 탈영토화한다면, 재영토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에바는 그러지 못합니다.

 

  에바는 ‘자유로운 여행가’가 아니라 얽매임이 많아 도망 다니거나, 목적을 두고 계획해서 떠나는 ‘모험가’였을 뿐이지요. 즉, 주인공 에바는 ‘로빈슨 크루소’나 ‘콜럼버스’, 그리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는 ‘바스코 다가마’였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현대는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가 살았던 시대처럼 모험을 떠나 개척한다고 하더라도 대놓고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무주물선점(無主物先占)’이라는 존 로크의 근대적인 통치 이념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처럼 남의 땅을 점령하고 원주민을 지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이지요. 에바가 개척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점령하고 지배할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식민지 개척시대, 또 제국주의 시대의 질서를 따를 수 없는 현대의 모험가는 ‘자유로운 여행가’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에바는 대놓고 점령할 수 없는 시대의 ‘로빈슨 크루소’나 ‘콜럼버스’, 그리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는 ‘바스코 다가마’였고,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가’가 아니라 변형된 ‘모험가’입니다.

 

  그런 에바가 케빈을 낳고 어머니가 됩니다. 에바는 ‘재영토화’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바에게 케빈은 ‘구속’이니 짐덩어리처럼 느껴지겠지요. 그러나 어머니의 혹은, 희생이라는 근대적인 도덕 명령을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참고 견디지만 삶은 더욱 힘들어지기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에바가 ‘자유로운 여행가’처럼 오인되면서 영화가 현대성이라는 인상을 품기지만 사실은 현대성이라는 가면을 착용한 근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더군다나, 감독 린 램지는 문제의 원인을 케빈에게로만 돌립니다. 원래의 타이틀을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라고 붙이지요. 사실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라는 이 원제는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케빈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회 문제로 거론할 수도 있는 반면에, 케빈 개인 혹은 가족 문제로 파악하고 자녀 교육이나 가정 화목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근대철학이 주체(나)를 세계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현대철학이 주체(나)를 세계의 구성물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을 감안하다면,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파악한다면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대로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라고 본다면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_케빈C.jpg

  영화에서 린 램지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하라고 말하면서 케빈 자신이나 모자(母子)의 문제, 즉 가족의 문제로만 연출할 뿐 사회적인 ‘Why this would happen(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영화만 놓고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케빈이 학교 친구들을 계획적으로 이유 없이 살상한 것은 케빈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론적으로 ‘악마’였기 때문입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저 엄마이기 때문에 악마와 같은 아들 케빈을 견딜 수밖에 없는 천형(天刑)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였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 영화는 아주 근대적이면서 미·영국적인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론적으로 ‘악’을 규정하는 신(神)적인 질서, 삶을 고통과 불행, 슬픔이라는 현재 삶의 부정, 그러면서 사회의 문제를 가족문제로만 한정시키는 ‘텅 빈 제스처’, 희생과 사랑을 강조하는 도덕명령, 그러면서 자녀 교육의 문제를 연상시키게 하는 ‘동일자’ 등 아주 근대적인 의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젝이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그’라고 말했던 가요. 린 램지, 그녀 역시 이데올로그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영화제작자로서의 감독 린 램지의 기술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방안 테라스 앞 흩날리는 커튼 자락을 비춥니다. 그리고 연이어 토마토 축제에서 환희와 고통 사이의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틸다 스윈튼의 얼굴을 비추고, 핏빛 토마토 더미에서 허덕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담아내며 영화가 보여줄 비극을 예고합니다. 영화 초반부터 효과적인 플래시백을 사용해 이야기가 품고 있는 비밀에 대한 긴장감을 높이고, 또 환희와 고통의 순간을 표현하는 라디오 헤드의 음악도 파국의 드라마를 효과적으로 받치고 있습니다. 린 램지의 이번 영화에는 음향기술도 잘 이용합니다. 차가 달리는 소음, 도로를 부수는 드릴의 날카로운 기계음,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의미심장한 OST….

 

  이런 예술적인 영화기술 장치들을 보며 린 램지가 케빈의 문제를 현대 사회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오해를 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어디에도 케빈의 문제와 직접 관련된 메시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마로 태어났다는 마녀 사냥식의 전개, 그리고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영국과 미국식 근대성만 가득했습니다. 린 램지의 영화적 기술은 색깔과 소리로 영화의 예술성만을 높이는 장치일 뿐 메시지는 아니었습니다. 린 램지는 작가성을 가진 감독이 아니라 실력 좋은 기술자일 뿐입니다.

 

  이 영화는 왜 ‘Why this would happen(이 문제가 왜 일어났지)’라고 말하지 않고, ‘We Need to Talk About Kevin(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린 램지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누구나, ‘총기 난사 사건’라는 사건 보도를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We Need to Talk About Kevin’할 것인데 말입니다. 정말, 린 램지는 케빈이 일으킨 무차별 학살의 원인이 케빈이 원래부터 ‘악마’였기 때문이고, 케빈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당연히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지요. 케빈이 일으킨 문제는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무차별적인 자본주의라는 구조의 문제이고,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문제이니까 당연히 봉합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잘 아시죠? 아무리 ‘We Need to Talk About Kevin’하더라도  문제를 일으킨 그 자체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