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연극 <라이어>를 보고

by 이우 posted Aug 06, 2012 Views 15048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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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분열적인 삶에 던지는 ‘추파(秋波)’
- 연극 <라이어>를 보고 -


 

이우

 

 라이어_전단01.jpg

   대학로 <해피씨어터>에서 연극 <라이어(1탄)>를 봤습니다. 제목처럼 주인공은 라이어(거짓말쟁이) ‘존 스미스’. 윔블던과 스트리트햄에 ‘메리’와 ‘바바라’라는 두 부인을 두고 정확한 스케줄에 따라 두 집을 바쁘게 들락거리던 택시 운전사 ‘존 스미스’의 이중생활이 가벼운 강도 사건에 휘말리면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존은 경찰서와 병원에 서로 다른 주소를 적어서, 그를 메리의 집까지 바래다 준 ‘트로우튼’ 경사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당황한 존은 그의 위층에 사는 실업자 친구 ‘스탠리’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둘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거짓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웅담이 신문에 사진과 함께 실리면서 일은 커지기만 합니다. 존은 바바라와 메리의 집을 오가며 동분서주하지만 바바라의 집에도 ‘포터하우스’라는 경사가 찾아와 해명을 요구하는 등 상황은 자꾸 꼬여만 갑니다. 스탠리는 그때마다 임기웅변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농부 흉내도 내고, 술과 마약을 하는 다섯 살짜리 문제아가 되기도 하다가, 존 스미스인 척도 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존을 감싸려 하지만 오히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마침내 존과 스탠리는 동성애자로까지 몰리는 상황이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짓말을 시작했지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복잡해지기만 하자 ‘이제 그만’을 외치며 존은 모든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의 진실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존과 스탠리조차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모르게 되고, 연극을 보는 관객들조차 무엇이 참(True)이고 ‘거짓(False)'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자꾸 더해지는 거짓말과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꼬인 상황을 보며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립니다. 웃음이 아니라 배꼽을 쥐게 하는 폭소 수준입니다. 아마 이런 매력이 <라이어>를 우리나라 연극사상 최초로 1만5천회 공연을 돌파하고 1999년 12년 장수 연극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지난 1999년 이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 <파파프로덕션>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만큼 힘든 상황에서 마지막 돈까지 쓸어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연극은 마침내 ‘대박’을 터뜨렸고, 지난 2009년부터는 극장을 직접 운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피씨어터>의 옛 이름은 '바탕골소극장'. 지난 1999년 '라이어 1탄'이 처음 무대에 오른 곳이기도 합니다. 2012년 현재 라이어는 3탄까지 완성돼 서울에서만 5개관에서 공연이 이어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나는 존 스미스 역을 맡은 김원식, 스탠리 역할을 맡은 김연철 등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고, 복잡한 동선을 정교하게 맞추어가는 연출진의 연출력에 놀랐습니다. 극의 기본은 ‘극본(시나리오)’입니다. 관객들에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극본이 없는 연극은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탄탄한 극본에 배우의 연기와 연출진들이 함께 어울어지면서 정말 좋은 명품 연극을 만들어 냈습니다. 무엇보다 매력은 극이 끝나 조명이 켜져도 관객들은 극이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극에서 연출진이나 배우, 관객은 대부분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무한자’입니다. 인간사를 모두 알고 있는 ‘신(神)’과 같은 존재이지요.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 그것이 ‘연기’고 ‘연출’입니다. 관객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펼치는 동안 그 모든 것을 지켜봅니다. 무대에서 존과 스탠리의 거짓말을 메리나 바바라, 포터 하우스 형사, 트로우튼 형사, 바비 등 출연 배우들은 모른 척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나 이 연극 <라이어>는 관객까지 무엇이 ‘참(True)’이고 ‘거짓(False)’인지 알 수 없게 만듭니다. 거짓말에 지친 존이 마침내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은밀한 눈으로 스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관객은 존이 정말 동성애자이며, 스탠리가 그의 애인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극이 가지는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존과 스탠리는 동성애자일까요?

 

라이어_전단02.jpg  존은 정말 동성애자일까요? 그렇다면 스탠리는 동성애자 존의 애인일까요? 나아가 우리는 무엇이 사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주체인 ‘나’가 대상인 ‘너’를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인데 가능한 일일까요.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가능하다고 믿었던 근대철학의 문제가 여기에 노정되어 있었고 이 문제 때문에 근대철학이 무너졌으니 말입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나 근대 철학의 종결자 ‘임마누넬 칸트’의 사유도 결국은 주체인 ‘내’가 대상인 ‘너’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을 뿐입니다.

 

  1596년 프랑스 중부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생후 1년 만에 "마른 기침과 창백한 안색"을 그에게 물려준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웁니다. 그는 몹시 병약했기 때문에 의사들조차도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의사들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돌봐준 유모 덕분에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약했기 때문에 덕도 봤지요. 학교 수업이 있을 때에도 친구들의 부러움과 시기 속에서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침대에 누워서 사색하는 습관을 평생 지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그가 바로 프랑스의 대표적 수학자이자 근대철학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프랑스어: Ren? Descartes, 라틴어: Renatus Cartesius, 1596년~1650년)’입니다. 좌표계로 대표되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했고, 방법적론적 회의를 거쳐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틴어: Cogito ergo sum , 프랑스어: Je pense, donc je suis)의 명제를 선언하여 서구 세계가 마침내 신(神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답게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을 T(참, True)와 F(거짓, False)으로 나누고 T만을 선택해 나가는 것. 그래서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해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감각을 배제합니다. 감각을 두고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감각과 감성이란 진리의 세계가 아니지요. 이렇게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야 말로 지식의 확실성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신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확실한 것을 찾겠다는 데카르트의 열망, 즉 참과 거짓(진리)을 가려내겠다는 것. 이것이 서양 근대 철학의 열망이기도 했지요.

 

  데카르트는 참과 거짓을 구분해낼 수 있었을까요? 데카르트는 교권의 권위가 싫어 자유의 도시라 불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 곳에서 프랑스 자신의 고향에서 '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암스테르담에서는 '거짓'이 되어버리는 사실에 데카르트는 놀라게 됩니다. 실제하는 사실을 참인지 거짓인지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외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이 명제가 근대철학을 출발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명제가 바로 근대철학을 미완성으로 만든 ‘아킬레스근’이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년~1804년)가 다시 진리를 찾아내는 작업을 합니다. 잘만 하면, 진리를 찾아내어 근대철학을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현상’은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도출했을 뿐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흔히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의 딜레마’라고 함축하여 말하곤 합니다.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년~1753년)의 말처럼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Esse est percipi)’되는 것이었고,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년~1776년)의 말처럼, ‘정신이란 관찰한 사람이 갖는 습관적인 추론’일 뿐이었던 겁니다.

 

라이어_전단03.jpg  분명 ‘나’는 실재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친구가 바라보는 ‘나’라는 형상이 사실일까요, 아니면 벌이나 잠자리 등의 곤충들이 바라보는 ‘나’의 형상이 사실일까요? 사실 우리는 그 어느 것이 나의 모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볼 수 없는 ‘유한자’이기 때문입니다. 존과 스탠리는 동성애자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존과 스탠리를 동성애자로 생각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지각되는 것’이고, 그저 ‘관찰한 사람이 갖는 습관적인 추론’일 뿐인 것이지요. 심지어, 존과 스탠리조차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모를 수 있습니다. 동성애적인 사랑을 해봐야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동성애를 해보지도 않고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 있습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주체인 ‘나’만 알 수 있으며 타자로 있는 ‘나’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조차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근대철학이 증명해 놓은 것이니까요. 존과 스탠리는 물론 심지어 관객으로 앉아 있는 ‘나’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하고 있지 않는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존이 하는 거짓말을 나는 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나는 너만을 사랑해’, 혹은 ‘다시 태어나도 너와 결혼할 거야’를 외치며 다른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도 사실은 존이 벌이는 거짓말의 해프닝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으로 앉아 있는 ‘나’조차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하고 있지 않는지조차 모를 수 있는 겁니다. 우리도 그 동일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극 <라이어>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거짓말인가 아닌가, 혹은 ‘거짓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이 연극을 보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구나.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교훈을 얻어낸다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무엇이 거짓말을 하게 하는가?

 

  이 연극의 중요한 포인트는 주체(나, 존 스미스, 스탠리)가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연극은 거짓말 때문에 벌어지는 희극(코믹극)입니다. 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존은 ‘메리’와 ‘바바라’ 두 여자를 모두 사랑하고 있습니다. 착한 ‘바바라’와 예쁜 ‘메리’. 존은 두 여자 중 어느 한 사람만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집’ 살림을 하며 ‘스케쥴링의 달인’으로 삽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명령(동일성)은 ‘일부일처’입니다. 존도 이 동일성을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두 집 살림’이 밝혀지면 안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존은 절친 스탠리와 함께 거짓말을 시작하는 겁니다.

 

  결국 존이라는 한 남자의 거짓말로 벌어지는 이 하루 동안의 해프닝은 ‘일부일처’라는 제도와 도덕명령 때문입니다. 관객도 이 동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동일성의 부조리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제도와 도덕명령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성’이 만들어낸 이성의 명령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그래서 두 여자를 오가며 사는 존의 비도덕적이고 탈제도적인 행동을 승인합니다. 화내기는 커녕 존이 인간적이라 좋아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폭소를 터트리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학에서는 이를 두고 ‘파토스(pathos)적인 효과’라고 합니다. ‘파토스(pathos)’는 '일시적인 격정이나 열정, 또는 예술에 있어서의 주관적?감정적 요소'를 뜻합니다. 사전적 어의로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말하며, 애상감, 비애감의 뜻을 가지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지만, 특정한 시대·지역·집단을 지배하는 이념적 원칙이나 도덕적 규범을 지칭하는 ‘에토스(ethos)’와 대립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이 연극에서 ‘에토스(ethos)’는 ‘일부일처’이며 ‘파토스(pathos)’는 ‘두 집 살림’입니다.

 

  사실 존이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원인인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는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만들어진 지 45억년, 여기에 인류가 출현한 것이 3백만년전이지만 일부일처, 즉 한 남자가 한 여자만 사랑해야 한다는 이런 제도가 생긴 것은 기껏해야 400년 남짓입니다. 우리나라의 일부일처제는 조선후기 근대화시기 이후부터 생겼으니 그 역사는 겨우 100년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마치 ‘진리’이고 ‘참(True)’이라는 동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동일성은 ‘사랑’이라는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혹은 법적인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명령이나 지배이기 때문에 강력합니다.

 

  일부일처제는 욕망이란 것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혹은 심지어 저주 받은 개념으로 사용했던 서구의 사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의 욕망은 식욕과 같이 생명체의 이기적인 것과 관련되거나 혹은 성욕과 같이 윤리적으로 위험한 욕구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500년전 플라톤의 사유에도 나타납니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대화 형식으로 쓴 <국가론>에서 지배자에게는 ‘지혜(이성의 혼), 수호자에게는 용기(기개의 혼), 생산자에게는 절제(정욕의 혼)가 미덕이라고 기술합니다. 즉, 생산자에게는 절제가 가장 중요한 미덕입니다. 그러면서 <법률>에서 ‘수 많은 쾌락과 용감에 대한 싸움을 계속하지 않고서, 또한 놀이에서건 행동에서건 이성(logos)과 훈련(ergon), 기술(techne)의 덕택으로 승리를 거두지 않고서는 절제적인 사람(sophron)이 될 수 없다(Platon, Lois, I, 647e)’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절제’가 가장 ‘영혼의 첫 번재 요소이며, 최고의 선’(Palton, republigue, IV 430b)’이라고 주장합니다. 쾌락의 포기를 통해 성적 활동에 의해서는 불가능한 진리와 사랑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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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플라톤의 망령은 신플라톤주의, 스콜라철학으로 이어지고 데카르트와 칸트로 이어지면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고 이성을 중시하는 근대철학이 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양 정신을 지배해온 것은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입니다. 여기에서도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사유됩니다.욕망이란 것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혹은 심지어 저주 받은 개념으로 사용했으며 윤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욕구로 간주되었던 것이지요.

 

  욕망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견해는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적인 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과 육체란 이원론적인 사유는 신에게서 인간을 독립시키고,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순수한 이성만을 가진 존재가 ‘신(神)이며 이성과 동물성이 섞여 있는 존재가 ’인간‘, 그리고 순수하게 동물성을 가진 존재가 '동물'이라는 도식 속에서 인간을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규정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적인 이유가 인간만이 가진 이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구 사유 전통에서 인간이란 이성과 육체(동물성, 욕망)로 분열된 분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성과 같은 정신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구 사유의 전통은 이성으로 동물성(욕망)을 통제해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동물성(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이성’입니다. 그래서 순수 이성과 정신을 최고 가치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성이 내린 도덕명령, 또는 지배

 

   이런 사유의 결과가 ‘일부일처제’라는 도덕명령을 낳았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성(性)적인 이유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법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이데아를 상정했던 플라톤도 <국가론>에서 ‘절제(sophrosune)는 쾌락과 욕망에 대한 명령이요, 지배(kosmos kai enkra enkrateia)’(Platon, Republigue, IV, 430b)라고 서술합니다. 올바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쾌락과 욕망을 지배하는 ‘절제’를 중요한 미덕이라는 것이고, 스스로 ‘절제’는 ‘명령’이고 ‘지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이어_스틸_s.jpg  이 명령은 타인에 의해서 내려지기도 하고, 스스로 내면화해서 자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두고 ‘도덕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이 명령으로  타인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주체(나)를 지배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명령을 내면화해 스스로 지배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도덕지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과 ‘지배’라는 말이 의미하듯, 성(性) 의식은 권력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성(性) 의식의 계보를 살피면서 <성의 역사>를 기술했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년~1984년)는 시대가 발달함에 따라 ‘성이 억압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증대’되었다고 말합니다. 제1권 <앎의 의지>, 제2권 <쾌락의 활용>, 제3권 <자기 배려>의 3부작으로 이뤄진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노동력이 이전보다 훨씬 많이 필요하게 되고, 불필요한 노동력을 사용하게 하는 수음을 금지하게 하고 청교도주의나 금욕주의로 전개되지만 이것은 ‘권력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밝혀냅니다.

 

  결국, 결혼이란 ‘사랑’이라는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법접인 질서, 나아가 경제질서를 세우는 ‘이성의 영역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늘 사랑을 외치지만, 우리 시대의 성(性)은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이었고 이 시대의 결혼이나 가족은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Tool)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기원전 500년전 서구 플라톤의 망령 아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우리는 몸에서 몸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아무리 일부일처라는 도덕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의 정신(이성)은 몸(욕망)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극 <라이어>의 ‘존 스미스’를 긍정합니다. 일부일처라는 것을 이 시대의 동일성으로 인정하지만, 우리는 늘 다른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부일처’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 동일성은 명령이요, 지배의 다른 이름이니까요. 그래서 나를 포함해서 우리, 연극 속의  존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분열적인 삶 안에 연극 <라이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연극 <라이어>를 보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연극 <라이어>는 몸을 부정하는 시대, 이성적인 삶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삶, 현대를 살면서도 근대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분열적인 우리 삶에 대한 조롱이고,  ‘추파’였던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영원히 거짓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