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후기] 경북도립대, 스스로 꽃이다

by 이우 posted Jun 17, 2012 Views 7041 Replies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스스로 꽃이다

 - 경북도립대 <인문고전 만남> 강의를 마치고 -

 

 

이우

 

 

제3강.jpg

 

 ▲ 3월.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며 풍경처럼 앉아 있었다. 혹은, 세상의 배경인 양 앉아 있었다. 

 

 


  맞습니다. 서울에서 경북도립대학까지의 거리는 214.4km입니다.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2시간 42분이 걸리죠. 경북도립대학 인문고전 만남을 위해 달린 거리가 4,716.8Km(214.4.Km×왕복×11회). 우와! 5천Km를 달린 셈입니다. 그 사이 봄은 여름으로 달려 가고 있습니다. 인문고전 만남 <Reader가 Leader다>를 시작한 것이 3월. 봄꽃들이 딱딱한 나무 표피를 뜷고 화약처럼 터지다가 꽃을 피웠고,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더니 진달래가 터집니다. 연이어 개나리, 목련들이 얼굴을 내밀고 고개를 흔들다가, 어느듯 봄꽃들이 핀 도로에는 여름꽃들이 가지런히 앉아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길 위에서 많은 풍경을 만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우리는 풍경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혹은, 세상의 배경인 양 우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다들 꽃인데, 모두 다 꽃인데 우리는 배경이었습니다. 30여년전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 찍었던 흑백의 단체사진 속에서 나도 배경이었습니다. 사진마다 앞줄에 있지 못하고 늘 뒷줄에 서 있었던 탓에 내 앞에는 항상 그 누군가가 있었고, 나는 늘 누군가의 뒤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진 속에서 나를 찾으려면 얼굴을 짚어가며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찾아봐도 지금도 나를 찾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헐! 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 거야’를 외치며…. 그러고보면, 나는 지금도 배경일지도 모릅니다. 낡은 옥탑방에 앉아 어두워지는 서울 시내를 혼자 내려다 보고 있으니까요. 오래된 사진 속에 배경처럼 서 있던 나처럼 세상의 배경처럼 말없이 앉아 있던 학생들을 보며 많이 아팠습니다.

 

 

독서토론_전체.jpg

 

▲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 독서토론.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왜 배경으로 서서 멈칫거리고 서성이고 있는지.... 

 

 

 

  그러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배경으로 서서 멈칫거리고 서성이고 있는지, 길 가의 꽃처럼 서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지.... 우리 스스로가 파 놓은 ‘홈 패인 공간*’ 속에서  일렬로 줄 서고 있었던것이지요. 그러면서 1등, 2등, 3등 경쟁의 낙인을 받았고 앞으로 달려나가라 호명받았지요. 누군가는 '1할2푼5리의 승률'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누군가 1등을 하면 그 누군가 꼴등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홈이 패인 공간 속에서는 반드시, 어느 누군가는, 배경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앞에 나서면  어느 누군가가 배경으로 서 있어야 하는 구조. 이런 저런 구조가 있었던 겁니다. 그 안에서 ‘내 탓이야’를 외치고, 또 외치며 앞으로 달리라고 가르치는 홈 패인 공간. 달리면 달릴수록 뒤로 물러 앉는 나무, 꽃, 돌, 풀….. 참, 슬픈 풍경입니다.

 

  이 풍경 속에서 나오고 싶었습니다. 홈이 패인 공간이 아니라, 바다와 초원을 닮은 ‘매끄러운 공간’ 속으로 함께 나오고 싶었습니다. 이 곳은 줄을 서지 않아도 되고, 줄을 서지 않아도 되어 앞과 뒤가 없으며, 앞과 뒤가 없어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곳입니다. 호명이 없어 제 스스로 나무며 꽃이며, 제 스스로 산이며 강인 곳이고,  소리치고, 부딪히며 제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곳입니다.

 

 

 

 

제10강.jpg

 

▲6월. 제10강 <노마디즘> 인문학 강의. 버릴 것이 무엇인지, 움켜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버릴 게 많습니다. 내가 세상의 출발점이라는 해묵은 근대정신을 버려야 하고, 정신과 몸, 이성과 육체를 구분하는 낡은 데카르트를 버려야 하고, 타인을 전제하는 사랑을 버려야 하고,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성, 스토아를 버려야 합니다. 잡을 것도 많습니다. 내가 세상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이지만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는 알 튀세르를 잡아야 하고, 세상이 호명하는 의미에서 벗어날 줄 아는 니체를 잡아야 하고, 차이를 생성하는 질 들레즈의 노마디즘을 잡아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움켜쥘 것은 움켜쥐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무엇보다 버릴 것이 무엇인지, 움켜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버려야 할 것은 움켜쥐고 있고, 움켜줘야 할 것은 버리기도 하니까….

 

  그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테카르트를 이야기하고 라캉과 알튀세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신과 몸의 관계를 이해하기 의해 플라톤과 아리스트텔레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말했고, 사르트르를 통해 왜 대타존재로 사는 것인지, 왜 대자존재가 되지 못 하는지 이야기 했습니다. 스토어와 에피쿠로스를 통해 다수와 소수, 전체와 부분의 경계점을 걸었습니다. 의미를 해체하는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몸을 사랑하는 니코스 카잔나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갑론을박하기도 했으며, 박민규의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왜 그들이 ‘지는 야구를 시작하는지’ 토론했습니다. 소설가 박민규를 초청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으며. 정답이 없어 오답도 없다’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남을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라’는 그의 말에 환호와 박수로 호응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끄러운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공간은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드는 공간입니다.

 

  

 

북콘서트.jpg

 

▲ 소설가 박민규 초청 북콘서트. 세상은 호명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참가학생.jpg

  

▲ 지금, 꽃이 한창이다.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나무고, 꽃이고, 산이고, 강이니까.

 

 

 

  지금, 꽃이 한창입니다.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 팬지가 웃고 있습니다.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 달맞이꽃이 뿌리를 내리고 제 허리 힘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주인공 마타리가 꽃잎을 펼치고 비를 맞고 있고, 동자꽃이 햇빛 아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수수꽃다리, 주인공 난향초, 주인공 감태나무, 주인공 찔레버섯, 주인공 산초나무, 주인공 뱍양목, 주인공 향나무, 주인공 구상나무, 주인공 편백나무, 주인공 자귀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 꽃, 꽃, 꽃들이 숲에 가득합니다. 누가 불러주어서 꽃이 된 것이 아니라, 누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주어서 나무인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나무이고, 꽃이고, 바람이어서, 제 스스로 산이고, 강이며, 숲입니다. 삶이란, 세상이 호명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제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가치의 창안. 새로운 삶의 창조, 그것을 통해서 낡은 가치를 버리고 낡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탈주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겁니다. 제 스스로 나무고, 꽃이고, 산이고, 강이니까요.

 

   3월에 시작했던 <인문고전 만남>을 마치고 나니 6월입니다. 우와! 꽃이 한창이네요. 동훈, 성희, 경원, 강민, 상희, 정은, 성민, 전복, 형진, 국화, 승기, 영호, 태희, 소영, 경구, 예은, 미애, 민철, 은진, 지희, 대성, 진주, 효석, 예진, 현희, 지윤, 우근, 유리, 예원, 소영, 영진, 재영, 보람, 진석, 문구, 소진, 향정, 선영, 연지, 하경, 주현.... 정말, 꽃이 한창입니다.

 

 

 

 

 

...................................

  *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의 하나>에 나오는 개념이다. 삶에는 기하학적인 공간, 물리적적인 공간, 도시 공간, 논리적 공간 등 많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공간 종류가 아닌 공간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다. <홈 패인 공간>은 자동차길이나 수로처럼 홈이 파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선 오직 주어진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 옆으로 '샐' 수가 없다는 뜻이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단일한 방식으로만 행동하게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거나 아니면 낙오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것인 <홈 패인 공간>의 속성이다. 그에 반해, <매끄러운 공간>은 초원이나 사막처럼 홈이 없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서 사방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 아이스링크장이나 알래스카의 설원을 연상하면 된다. 이 공간에서는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를 하며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관련 사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