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서울을 걸어 인문학을 만나다·2

by 이우 posted May 01, 2012 Views 6800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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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걸어 인문학을 만나다?2
소공동 산책로

 

 

□ 대상 :  한겨레교육문화센터(분당) 인문학기행팀 외
□ 모인 장소 : 전철 4호선 회현역 7번 출구
□ 모인 시간 : 2012년 4월 28일(토요일) 오후 2시
□ 헤어진 시간 : 2012년 4월 28일(토요일) 오후 6시
□ 헤어진 장소 : 명동예술극장
□ 답사 여정 : 신세계백화점 → 한국은행 → 포스트 타워 → 웨스틴 조선호텔 → 을지로 2가 → 명동성당 → 명동예술극장 구간. 약 2.5km)
□ 사진 촬영 테마 : ‘나’를 구성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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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행은 4호선 회현역 7번 출구, 신세계백화점 입구에서 만났습니다. <서울을 걸어 인문학을 만나다> 두 번째 답사 여정은 신세계백화점을 출발하여 한국은행과 포스트타워, 조선호텔을 거쳐 을지로 2가를 돌아 명동으로 진입하는 산책로. 오래된 서울의 번화가를 가로지릅니다. 어느 시간에든 차도에는 차량이 넘치고 거리도 매우 혼잡해 조용한 산책을 위한 코스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자본주의’, ‘근대화’, ‘식민지 경험’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들이 길 위에 있습니다.

 

  답사 전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있었던 인문학 강좌의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주체(Cogito)'를 세계의 출발점으로 상정했지만 우리는 주체가 세계의 출발점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주체는 출발점이 아니라 세계가 구성해 놓은 결과물입니다. 일제 강점기 춘원 이광수가 그러했으며, 육당 최남선이 그러 했습니다. 또, 동시대 다른 곳에 살며 홀로코스트의 주범이었던 ’‘아이히만’이 그러했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틀어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는 라캉의 말이, 또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그’라는 지젝의 시니컬한 명제가, 나아가 ‘모든 이데올로기기가 객체를 주체로 호명한다’는 알 튀세르의 절망적인 외침처럼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못 하고 타인의 욕망이 지정해주는 자리에 살고 있는 지 모릅니다.

 

  오늘 걷는 소공동산책로에서는 생각하지도 않는 곳에 존재해야 했던 일제강점기 우리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난 역사를 단순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일방적으로 친일이라는 혐의만 세우는데 급급하지만 차근차근 그 시대를 바라보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구조가 있었던 겁니다. 그 시대 지식인들을 무지하게 만들었던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었습니다. 일부 국가에 의해 자행된 식민지 확대 정책으로 전세계가 식민지화되어 가고 있었고, 그마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 동북아시아. ‘동북아시아인이 단결하지 않으면 유럽의 식민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대동아단결’ 구호 아래 자유로울 수 있었던 지식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힘의 구조가 ‘생각하지 않는 곳’이었고 당시 시대인을 호명하고 있었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친일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왜 친일화되었는지 그 구조를 아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곳’, ‘나’를 호명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그야말로 ‘나도 모르게’ 나의 삶에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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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본관이 있는 자리에는 일본강점기에는 우리나라 백화점 제1호인 미쓰코시백화점이 있었습니다. 1930년 10월, 경성 최고의 번화가인 <혼마치 1정목>에 장한 미쓰코시백화점은 당시일본인 상권이던 진고개의 중심이었습니다. 청계천을 경계로 하여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북촌과 일본인들이 활동하던 남촌으로 나뉘어 있던 당시 경성에서 미쓰코시백화점은 남촌의 중심가였습니다. 문화가 유입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해 그저 정신만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사실 문화와 정신이란 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상품과 패션, 건축, 책과 같은 '실재' 속에 정신이니 문화니 하는 추상적인 것들이 얹혀져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 남촌의 중심가라는 이야기는 이른바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이 남촌의 중심가를 두고 ‘근대 상품의 진열장’이라 불렸던 것은 이런 맥락입니다.

 

  일제강점기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도꾜 긴자를 방황하는 것처럼 이 거리를 부유했습니다. 소비 문화에 대한 조선인의 선망이 극에 달하자, 무작정 경성우편국과 미쓰코시백화점 부근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을 '몽유병자와 같다'해서 일본말로 ‘혼부라’라고 불렀습니다. ‘혼부라’의 무리들은 부나비처럼 이곳을 지나 경성우편국 옆 길을 지나 혼마치상점가로 휩쓸려 다녔습니다. 작가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 또한 ‘혼부라’처럼 ‘쏘다니다’ 미쓰코시 옥상에 올라 근대 도시의 일상을 바라보고, 마침내 ‘날개’를 펼치고 뛰어내립니다.

 

  부나비처럼 이곳을 지나 경성우편국 옆 길을 지나 혼마치상점가로 휩쓸려 다녔던 당시대인의 대부분은  ‘개화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일제의 식민지 통치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몸 안에 장착되리란 사실을 모릅니다. 여기에 제국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겹쳐지면서 나도 모르게 친일스러워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시대의 ‘나’를 부르는 호명, 즉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무엇이 ‘나’를 호명하는 것인지, 타인이 지정해주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식하지 못 하고 살아갑니다. 바로 그 자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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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우리 시대 '나'를 호명하는 것 중 무겁고 벅찬 이데올로기는 ‘돈’입니다. ‘돈’, 즉 화폐는 실재성과 추상성의 사이에서 생활에 개입하고, ‘나’를 구성해 냅니다. 일행은 한국은행 건물로 들어섭니다.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한국은행 건물은 1910년대에는 근대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하나였던 ‘조선은행’이었습니다. 1912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유럽의 성을 떠올리게 하는 좌우대칭형의 석조건물로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문화적,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국가 중요문화재인 사적 280호로 지정된 한국은행 건물은 1907년 착공되어 1912년부터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이 건물은 국내의 화폐문화의 역사를 전시하는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화폐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페에서부터 최근의 화폐,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주화인 ‘건원중보’에서 최근의 주화인 500원권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인의 삶은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문재 시인이 늦게 딸을 얻고 기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언제까지 일해야 하지’라며 고개를 가웃거리고, ‘빌린 주택융자금을 갚다가 보니 늙었더라’는 소설가 김훈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 삶이 곧 돈의 획득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내 삶에 개입해 행복하다면 문제가 아닌데, ‘돈’이 개입하면서 행복하기보다는 슬프고 힘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돈’이란 우리 시대가 ‘나’를 호명하는 큰 이데올로기입니다.  나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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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타워

 

  일행이 서울중앙우체국인 포스트 타워를 돌아 조선호텔 쪽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포스트 타워는 2007년 11월에 완공된 건물입니다. 건물의 모습이 마치 ‘마징가Z'의 머리 부분을 닮았다고 해서 사람들에게는 ’마징가 빌딩‘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는 일본강점기 시절 ’경성우편국‘이 있었습니다.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서 등장인물 윤직원이 자신이 데리고 있는 어린 기생인 ’춘심이‘를 데리고 당대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였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로 산보를 갔다가 이 ’경성우편국‘의 약국에서 자신의 몸무게를 알게 됩니다. 신소설로 널리 알려진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는 생동감 있게 ’우체사령‘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을 보면 ’우체사령‘은 국가로부터 ’남의 집 안마당을 함부로 들여다 볼 권한‘을 얻은 자로 표현됩니다.

 

  현대를 두고 흔히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정보화 시대’라고 생각해서인지 정보기기가 발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보기기들이 발전하면서 ‘정보화 시대’가 된 것인지 선후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정보기기 또한 나를 호명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정보가 내 삶을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1900년대 우편으로 소식을 주고 받을 때와, 스마트폰으로 주고 받는 ‘나’의 삶은 엄청 달라집니다. 달라진다는 의미가 단순히 정보의 소통 시간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편으로 주고 받았던 시기 삶의 패턴과 지금의 삶의 패턴은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정보의 질과 양에 따라 주체(나)가 세계를 바라보는 사선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편의 시대가 ‘기다림’과 ‘느림’이라는 삶을 영위했다면,스마트폰 시대는 ‘조급증’과 ‘빠름’의 삶을 영위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문재 시인은 ‘기다림이 삭제되는 시대’라고 현대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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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틴 조선호텔

 

  1914년 10월 10일 환구단(원구단) 자리를 헐고 개관한 조선호텔은 한국 최초의 호텔입니다. 철도호텔로 불리기도 했던 당시, 이 호텔은 조선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선보였던 곳이고, 조선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했으며, 조선 최초로 댄스 파티가 열리기도 하면서 당시 서구 문화를 이 땅에 정착시켰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 호텔은 고종 황제의 즉위식과 제사를 위한 환구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 남아 있는 환구단 건물은 길에서 보이지 않아, 호텔 정문까지 올라가야 보입니다.

 

  환구단(?丘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壇)입니다.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입니다. 1897년(고종 광무 원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환구단에 나아가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드린 후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당시 환구단이 마련된 곳은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남별궁(南別宮)이 있던 자리로, 이때 만들어진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습니다. 환구단에서 하늘과 땅, 별과 천지만물에 깃든 신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동지(冬至)나 새해 첫날에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1912년(융희 4년) 일본은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으며, 1968년에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이 세워집니다.

 

   어떤 시대를 지배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방해되는 생각과 신념과 가치를 무너뜨려야 하지요.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物)을 붕괴시켜야 합니다. 알 퉤세르나 지젝의 말처럼, 세계가 ‘나’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문’을 ‘동대문’으로 개명하고, 나아가 ‘환구단’ 위에 호텔을 세우면 ‘나’도 모르게, 그러니가 ‘주체’도 모르게 시대 정신, 신념, 가치 등을 버리고 새로운 신념과 가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지요. 이런 과정을 안다면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문’을 ‘동대문’으로 개명하고, 나아가 ‘환구단’ 위에 호텔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쉽게 시대정신을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세계란,  아는 만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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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사적 제258호. 강점기에 ‘종현천주교당’으로 불렸던 명동성당은 189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 건축물입니다. 명동성당에는 1880년대 ‘성성활판소’가 설치되어 <경합잡지>, <경향신문>이 간행되기도 했으며,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수일과 심순애를 탄생시킨 <장한몽>(1913년),  이태준의 소설 <사상의 월야>에서 당시 ‘종현천주교당’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종교’도 있습니다. 종교는 ‘돈’ 못지 않게 여전히 유효한 우리의 이데올로기입니다. 명동성당으로 가기 위해 명동을 지나다가 포교를 하고 있는 몇 단의 종교 집단을 보았습니다. 기원전 플라톤이 만들어 내었던 이데아(Idea)가 거의 이천년 넘는 세월을 견디고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명동성당엘 들렀지만, 사실 저는 종교를 부정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엄청남 폭력, 즉 전쟁의 대부분은 종교전쟁이었습니다. 나는, 사랑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살육과 약탈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종교를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까요. 종교가 사람들에게 전쟁과 폭력이 아니라 행복과 즐거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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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예술극장

 

  1936년 ‘명치좌’라는 영화관으로 문을 연 이 극장은 해방 후에는 ‘사공관’으로 불렸으며, 1957년에서 1973년까지는 ‘국립극장’으로 사용했습니다. 1950년대 이후 문화와 예술의 공간으로서 영화, 연극, 무용 등 각종 공연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열려서 문화예술인들을 끌어모으는 거점이었습니다. 19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일반인에게 매각되어 명동의 상업적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자리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36년 건립된 명치좌(明治座)는 건립 당시는 극장 전용 건축물이었습니다. 명치좌는 명동의 한 복판에위치하고 있어 미도파 백화점으로부터 명동성당까지를 한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민관, 약초극장, 황금좌 등과 함께 1930년대의 일본인들을 위한 위락 시설로 지어진 것으로 주로 일본영화만 상영했습니다. 관객 수용인원은 1178명으로 1층은 664명, 2층은 354명 그리고 3층은 160명. 명치좌는 8·15해방 후 미 군정청 시대가 되며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재개관되었습니다.

 

  이후 국제극장은 서울시에 의해 접수되어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집회시설로 쓰이거나 연극 등의 공연을 했습니다. 시공관은 6·25 동란으로 황폐해져 52년 개수되었습니다. 57년 6월1일, 시공관은 다시 명동예술회관이란 이름으로 바뀌며 국립극장이 되었습니다.  명동예술회관은 1962년 3월21일 명동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었고 1973년 9월에 국립극장으로서 연극 오페라 무용 등의 다양한 공연이 열리게 됩니다. 73년 10월17일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될 때까지 10여년간 국립극장으로 역할했습니다. 그 후 명동예술회관은 폐쇄되고 75년에는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이 되었습니다. 1985년 12월 내부를 전면 개수, 대한종합금융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이어 헐릴 위기를 맞습니다. 1994년 명동 상가번영회가 시민 서명운동을 벌이며 복원운동을 시작했고 99년 대한투자금융의 영업인가가 취소되면서 법원경매에 부쳐지자 문화관광부가 2002년 8월 23일 결단을 내려 사들이고 명동국립극장으로 개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04년에 문화관광부가 400억원에 건물과 땅을 사들여 2009년 6월 5일<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했습니다. 현재 명동 예술극장은 연극 전문 공연장입니다.

 

     이제 왜 우리가 이 명동예술극장이 여정에 들어 있는지 눈치 채셨을 겁니다. 문화예술이 미의식(美意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시대의 호명을 받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느낌의 층위조차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강의로 말씀 드렸지만, ‘춘향전’이 그러했고 ‘신파’가 그러했습니다. 아름답다고 느꼈던 오래전 미인들(‘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이 이제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름답다'는 느낌조차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정해준 자리니까요. 느낌의 층위조차 이데올로기라니! 그래서 지젝이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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