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우리 동네 미자 씨_ 따뜻함과 차가움 사이

by 에피 posted Feb 21, 2012 Views 9275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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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과 ‘차가움’ 사이

- <우리 동네 미자 씨>(유은실 동화/ 낮은산/ 2010) -

 

 

 

□ 일 시 : 2012년 2월 17일 (금) 오전10시- 오후1시

□ 장 소 : 서대문시립도서관

□ 대상도서 : 우리 동네 미자 씨(유은실 동화/ 낮은산/ 2010)

□ 참 석 자 : 강향자, 김애경, 김정선, 김희선, 문혜숙, 백인심, 이미자, 윤미란, 최진경(서대문도서관 독서토론모임 <책과 노니는 사람들>)

□ 토론형식 : 논제 자유토론과 찬반토론 혼용

□ 진 행 : 정현

□ 패 널 : 이우

□ 토론후기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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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전체 속에 개인이 있다’는 인식과 ‘개인이 모여 전체가 된다’는 인식을 결과론적으로 바라본다면 같은 의미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혹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식의 부질없는 논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로 인식하느냐, 혹은 후자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차이는 큽니다. ‘전체 속에 개인이 있다’는 인식은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고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하게 됩니다.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하면 개인의 자유가 담보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 속에 개인이 있다’는 인식은 감성적이기 보다는 이성적이고, 따뜻하기보다는 냉혹합니다.

 
  반면에 ‘개인이 모여 전체가 된다’는 인식은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계열화를 그립니다. 전체를 우선하는 인식 위에 외로움이나 따뜻함이라는 감성이 자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령 자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텅빈 제스쳐’가 되고 맙니다. ‘배려하자’, 혹은 ‘친절하자’는 구호는 전체 영역에서만 유효하며 개인이 실제 ‘배려’하고 ‘친절’한 것과는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회사에서의 김 부장은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지만 집에서의 김 부장은 불친절하고, 비배려적이며 심지어 권위적이기까지 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를 실천하며 살다가 홀로 서서 강을 바라볼 때, 다시 말해 전체 속의 ’나‘가 아니라 전체를 떠난 ’나‘를 만날 때 쓸쓸함과 공허함이 찾아오고 ’나‘는 바람처럼 흔들립니다. 그 흔들리는 사람이 전체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영역에서 오롯이 마주할 때 따뜻함이 생깁니다.

 


  “책과 노니는 사람들’'이 유은실의 동화 <우리 동네 미자씨>(유은실 동화/ 낮은산)로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동화 <우리 동네 미자씨>는 엄마 아빠가 이혼한 뒤 큰 집에 맡겨진 외로운 아이 ‘성지’와 보증금 백만 원짜리 방에서 혼자 사는 ‘미자 씨’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은 친절하자, 배려하자는 제스츄어 없이 그저 ‘나’라는 개인으로 마주해 서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 못마땅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 동화에서 따뜻함을 읽어냅니다. ‘책과 노니는 사람들’은 독서토론을 통해 외로움과 따뜻함을 그려내는 작가 유은실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1. 외로움

 

 

  "전 ‘미자’라는 이름에 꽂혔어요. 구시대의 유물 같은 느낌이지만, 정감이 갔어요." '책과 노니는 사람들'의 진짜 미자 님이 운을 뗐습니다. 원래 눈물이 많다는 미란 님이 말했습니다. “성지랑 안고 우는 장면에서 울컥 눈물이 나왔어요.”, "미자 씨가 아플 때, 간장밥을 함께 먹는 성지, 그 모습이 너무 따뜻했어요“라고 진경 님이 덧붙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향자 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경 님을 안았습니다. "우리는 왜 그동안 함께 나누지 못했을까요? 서로의 몸을 안아 주고, 또 내가 나를 안아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한대요." 향자 님과 진경 님의 허그가 끝나고 이우 님이 질문했습니다. "왜 안고 싶은 걸까요?"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답했습니다. "고독하니까요”, “외로워서요”, “기대고 싶어서요"….

 

  어쩌면, ‘책과 노니는 사람들’ 회원들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외로울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동네 미자 씨>를 읽으며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향자 님 말씀처럼 고독하고, 외로운 우리는 왜 그동안 함께 나누지 못했을까요?

 

 

  …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죠. 미자 씨는 먹고 싶은 걸 참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돈을 몽땅 잃어버린 다음부터 말이에요. "오늘도 눈치 없이 먹고 다녔나 보다." 밤이 되면 미자 씨는 하루를 돌아보며 슬픔에 잠기곤 했어요. 어떤 날은 훌쩍훌쩍 울기도 했죠. …

(본문 중에서)

 

 

  미자 씨는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 근근이 먹고 살고 있으며, 갚아야 할 빚도 많습니다. 다행히 덩치가 크고 힘이 장사라 과수원 일도 하고 밭일도 해가며 열심히 빚을 갚는 중입니다. 하지만 곤궁한 처지는 별로 나아지지 않아, 항상 풍년슈퍼 아줌마에게 외상으로 뭔가를 사고, 슈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동네 꼬마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고 다녀서 아이들의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런 자신 때문에 슬픔에 젖어 울기도 합니다. 이 동화에서 ‘미자 씨’는 외롭습니다. ‘성지’도 외롭지요. 그러나 미자 씨는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 유은실도 미자 씨가 외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이 동화에서 외로움을 읽어냅니다. 누구에게나 고독한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이죠.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여길 때는 언제인가요? 그리고 이 외로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미자 님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인용해 말했습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저는 이 구절을 좋아하는데요, 존재자체가 외롭다고 생각해요", "그럼 생명 있는 것들은 원래 외롭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라고 이우님이 물었습니다. "예.” 미자 님이 대답했습니다.


  정말 외로움과 고독은 생명이라는 원초성에서 생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엇인가가 외롭고 고독하게 했는데, 외롭게 한 것이 너무나 공고하여 없앨 수 없는 일이라 원래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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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군중 속의 고독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어느 청바지 회사의 텔레비전 광고 문구다. 개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젊은 세대에게는 상당한 호소력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 만드는 청바지가 실은 윤전기로 신문을 찍듯이 대량생산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그 회사의 목적, 그 광고의 목적은 개성을 빌미삼아 똑같은(따라서 개성 없는) 제품을 될수록 많이 판매하려는 데 있다. ‘개성 있는’ 청바지를 ‘대량’으로 판매하려는 회사 측의 모순.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게 죽기보다 싫어 대량복제품을 사서 입는 소비자의 모순-개성의 상품화란 이렇듯 자체 모순에 불과하다. (중략) 어의상으로는 고독과 거리가 멀어야 할 군중이 고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군중이란 타인 지향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이다. ...

 

(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 중에서 )

 

 

  리스먼은 <고독한 군중>에서 우리가 ‘타인 지향적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고독하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라는 전체를 구성하고도 외롭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원래부터 외롭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주체로 서기 위해 동일성에 포획되면서 외로워졌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태어날 때 외롭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지향하면서 살다가 외로워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먼의 이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책과 노니는 사람들‘ 회원 모두가 동의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리스먼이 말하는 타인 지향적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일괄하면 경제성장, 이른바 잘 살기 위하여 개인이 아니라 전체 사회를 위해 달려왔기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이른바 잘 살자는 전체의 질서 속에서 희생한 세대가 있어 지금 우리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개인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전제를 위한 부분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외로워졌던 것이죠. 사회와 국가, 혹은 가정이라는 전체를 바라보는 것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 이 이성의 영역 안에는 감성적일 수밖에 없는 ‘나’가 있으니까요. 지금의 ‘나’는 어떨까요? 또, 현재의 내가 외롭다고 해서 현재 우리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도 외로워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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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인 지향적인 사회

 


  최근 서울지하철에서는 에티켓 지키기 캠페인을 벌이면서, 주기적으로 ‘잡상인’에 대한 단속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전철에서 상인 단속에 대한 찬반의견을 물었습니다. 찬성 3표, 반대 4표. 찬성표의 미자 님, 향자 님, 정선 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나친 소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돼요. 만약 허용하게 되면 지하철 안이 시장화 되어 승객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요”, 반대를 하는 진경 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좀 참아 주면 안 될까요? 요즘 우리 사회는 도시 미관이나 질서를 위해 정비를 하다 보니 영세한 사람들이 갈 곳이 없는 것 같아요.”


  전철의 쾌적한 환경을 위하여 쫓겨나는 상인이 동화 속 ‘미자 씨’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한 ‘미자 씨’는 풍년슈퍼 아줌마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사고, 슈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동네 꼬마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습니다. 마을의 질서 유지, 그리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자는 전체적인 시선 아래에서의 우리의 미자 씨는 전철의 상인처럼 쫓겨나야 할까요? 얼마 전 용산 참사의 피해자들처럼 없어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안됐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용인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작가 유은실은 ‘미자 씨’를 쫓아내기는커녕 도리어 가슴에 안습니다.

 
  “이런 사안은 감상이나 온정적 시선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회적인 케어가 필요한 일이죠”라고 미자 님이 다시 반론했습니다. 이우님이 대답했습니다. “그 사회적 케어 때문에 얼마 전에 노점상 부부가 목을 맸습니다. ‘전체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무시하고 사회적 제도를 전체적인 시선으로 만든다면 우리의 ‘미자 씨’는 설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자씨’처럼 자꾸 외로워지겠죠.


  우리는 <우리 동네 미자 씨>를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가 ‘미자 씨’의 삶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조망해주고 있어 미자 씨의 속사정을 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미자 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알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우선하는 경향이 더해진다면, ‘미자 씨’는 전체를 중시하는 시선 속에서 외면될 수밖에 없습니다. ‘승객’이라는 ‘전체’의 쾌적함을 위해 물건을 파는 ‘개인’이 쫒겨 나듯이 말입니다.

 

   사실, 전체를 의미하는 ‘승객’은 ‘물건을 파는 개인(잡상인)’을 배제합니다. ‘물건을 파는 개인(잡상인)’은 승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승객’일까요? ‘나’는 승객일까요? 원론적으로 말한다면, 이 ‘승객’이라는 말 속에 ‘개인’은 없습니다. ‘전체의 질서를 잘 따르는 사람’, 즉 ‘전철 에티켓을 지키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평소에는 ‘전체의 질서를 잘 따르는 사람’인 나는 분명 승객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술을 마시고 탑승하거나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순식간에 ‘승객’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되어 버립니다. 쫓겨난 ‘나’는 추운 도로 위를 걸으며 외로워하겠지요. 전철을 타고 가려면 ‘나’는 전체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마침내 ‘승객’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리스먼이 말하는 ‘타인 지향적 사회’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나’는 또 외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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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체와 개인의 경계에서

 


  어느 날 성지는 미자 씨에게 “아줌마의 보통은 보통이 아니라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미자 씨는 “내 보통이 보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불행해져”라고 답합니다. 여기에서의 성지가 말하는‘ 보통’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준 삼는다’는 점에서 ‘타인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자 씨의 말은 타인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 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미자 씨가 타인 지향적이 되면 우리의 미자 씨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제시문을 읽었습니다. 김훈 소설 <남한산성> 중에서 전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상헌에 관한 글 <제시문 A>, 그리고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1> 중에서 개인을 우선시하는 아마데우에 관한 글 <제시문 B>. 의견을 물었습니다. 김상헌처럼 전체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늙은 뱃사공’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람이 3명, 개인을 우선시하는 ‘아마데우’처럼 폭군 ‘맹지스’를 살려야 한다는 사람이 4명이었습니다. 어쩌면, ‘늙은 뱃사공’과 ‘맹지스’가 ‘미자 씨’일지 모릅니다.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향유하기 위해서는 전체 사회질서가 먼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미자 님이 찬성 이유를 말했습니다. 이우 님은 “전체를 우선시하는 사람이 정책 입안자가 되면 사회 안정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거나 자유를 억압하게 될 겁니다. 개인이 불행질 수 있죠“라며 반론했습니다. “제 삶은 딱 구분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개인의 행복 추구가 우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정을 위해 희생을 하는 편이니까”라고 혜숙 님이 덧붙였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혜숙 님처럼 갈등과 모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체 우선의 김상헌 선택에 찬성하신 분도 그 모순 때문에 개인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혜숙 님처럼 개인의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정이나 사회를 위해 희생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갈등이 정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일하는데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집에서 놀고 있는 줄 알아! “, ‘저런 놈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거야. 저런 놈들은 죽여야 해!”' 이런 갈등이 가정 문제로, 사회 문제로 비화하면서 개인의 삶을 어그러지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자 씨’보다 더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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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따뜻함

 

 

… “성지야." / "왜 그러는데." / "나 한 번만 안아 줄래?" / "그러면 들어갈 거야?" / "응."/ "여우 목도리 풀어. 그럼 안아 줄게.”/ 미자 씨는 목도리를 풀었어요. 그리고 성지를 꼭 안았지요. / "아, 숨 막혀. 팔에 힘 좀 빼." / 성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어요. 사람 품에 안겨 본 게 아주 아주 오랜만이었거든요. …

 

(본문 중에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감동했고 울었습니다. ‘너무 따뜻해 눈물이 났다’고 진경 님이 말했을 때, 갑자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향자 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경 님을 안았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왜 그동안 함께 나누지 못했을까요? 서로의 몸을 안아 주고, 또 내가 나를 안아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한대요." 이런 향자 님이지만, 전체 질서를 우선해야 한다는 김상헌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우 님이 안고 싶다고 할 때에는 안아주지 않았지요.


  이처럼 전체가 우선이냐, 개인이 우선이냐의 문제는 선택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부분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 때문에 전체 질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전체와 개인 사이에서 우리는 방황합니다. 독서토론을 하면서 나를 포함한 ‘책과 노니는 사람들’ 회원 모두가 스스로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책입안자나 사회 제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지위에 있었다면, 많이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전체 질서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며 사는 것이 바른 삶일까요? 아니면, 전체의 질서보다는 ‘나’를 우선시하며 사는 것이 바른 삶일까요? 그 해답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우리 동네 미자 씨> 독서토론을 통해 작가 <유은실>의 시선이 전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따뜻했지요.

 

 

 

  에필로그


  우리는 이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동화에 나타나는 따뜻함은 오롯하게 개인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서 생기는 것이라고요. 전체의 질서를 우선시하는 사회는 따뜻하기보다  냉혹한 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전체의 질서가 아니라 구성원인 개인에게 향할 때, 그 개인을 소중하게 생각할 때, 개인의 삶을 바라볼 줄 아는 우리가 될 때 우리 사회가 따뜻해진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작가  유은실이 <우리 동네 미자 씨>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일 겁니다. ‘잘 둘러봐, 미자 씨가 많아. 미자 씨에게 사회가 원하는 잣대를 대고 ’바보 미자 씨‘, ’가난뱅이 미자 씨‘로 보지 말고 사람 미자 씨’로 봐. 그럼, 우린 따뜻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