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

by 에피 posted Jan 20, 2012 Views 8777 Repli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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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2012년 1월 17일 (화) 오전10시- 오후1시

□ 장   소: 금천가산정보 도서관

□ 토론책: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최나미 동화/ 청년사 /2005)

□ 참석자: 책주인공을 만나는 사람들 (가산정보도서관 독서토론모임)

                 김은진(사서), 김미진(사서), 나은정, 오지현, 오진화, 이순화, 이주연, 조현욱, 홍미숙

□ 진   행: 정현(에피)

□ 후   기: 정현(에피)

 

책_엄마의마흔번째생일.jpg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L’?tre et le N?ant)에서 인간의 기초적인 존재론적 차원의 하나로 '대타존재(代打存在)'와 '대자존재(代自存在)'를 이야기했다. '타자에 대하여 혹은 타자에 있어서 존재하는 '주체(나)'를 '대타존재(代打存在)'라고 한다면, '대자존재(代自存在)’는 ‘주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주체'이지만, 다른 주체에 대해서는 그 신체가 물(物)로서 나타내는 '객체'로서 몸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객체로 몸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대자존재’가 아니라 ‘대타존재’가 되고 '나'는 '자유'*를 잃는다. 대타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대자존재로 살면서 자유를 꿈꾸기 때문에 샤르트르는 사람이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했다.

 

  '책주인공을 만나는 사람들'과 동화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최나미, 청년사)로 독서토론을 했다. 동화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은 나이 마흔에 자기를 찾아 나서는 가영이 엄마와 열세 살 가영이의 이야기다. 가영이 엄마가 그림을 그리겠다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본인은 물론 가영이의 아빠, 가영이 모두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영이 엄마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고, 그 이유로 주인공 가영이가 불편해하고 남편과 별거해야 했다. 나이 마흔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별거를 선택하는 가영이 엄마는 샤르트르가 말한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와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독서토론 모임 '책 주인공을 만나는 사람들(이하 ’책주사‘)'의 회원인 대부분 모두 여성이면서 주부인 것을 생각하다면, 우리도 가영이 엄마처럼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일까? 이 ’저주‘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제까지 유보시키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책주사 회원들은 가영이 엄마의 삶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자유토론

 

  "이야기할 것이 많은 어린이책이었어요. 여러 상황을 그려보며 재미있게 읽었어요."라고 노트 가득 메모해 온 은정님이 말했다. "저는 고학년 동화 내용 맞나?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가영이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아줌마로 살고 있는 저에게도 할머니의 삶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어요."라고 진화님이 덧붙였다. 동화 습작을 하는 은진님은 이렇게 말했다. "가영이 엄마가 떠나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다는 내용에 전 공감하지 못했어요. 작가의 인위적 느낌으로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아 읽는 내내 불편했어요. 마치 열세 살 아이의 생각에 작가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아 푸는 과정에서 억지스럽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역할이나 나이에 따라 작품을 다르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전 같은 40대 여성의 삶으로 크게 공감했어요. 그런데 결론을 놓고 본다면 가영이 엄마가 시어머니 병간호가 끝나고 일을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라고 주연님이 대답했다.

 

  사실, 이 책에서<엄마의 마흔번 째 생일>은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가영이의 할머니 병 때문에 아빠랑 심하게 다투고 한 달쯤 뒤에 엄마는 마흔 번째 생일을 맞는다. 바로 이 날은 엄마가 전공을 살려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한 날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선언을 한 적이 있었나요? 혹은, 이런 선언을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하지 못 한 적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라고 내가 물었다. "전 유아교육, 사회복지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항상 남편의 일이 우선이라 보류하고 있어요. 경제적인 의존도 실행하지 못 하는 이유이구요"라고 지현님이 대답했다. 열심히 자신의 꿈을 찾는 중인 미숙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꿈의 대한 선언은 토론 공부가 출발점이었어요. 남편이 지지해주고, 얘들도 커서 할 수 있는데, 가정,자녀교육 때문에 제 스스로 선택을 못하고 있어요“, ”저는 전업주부들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일과 육아 모두 다 잘하기 힘들어서 전공일을 하는 것보다 살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라고 사서 미진님이 말했다.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에서 가영이의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는데도 엄마는 화실 일을 나간다. 가영이의 아빠는 아내가 못마땅하다. 아빠는 엄마에게 화를 내고, 가희도 엄마에게 짜증을 낸다. 가영이 엄마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아내에게 화를 내는 남편이나, 혹은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가희의 행동은 정당한 것인지 내가 물었다. 가영이 엄마의 행동은 ‘용기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일을 찾고 싶어 나간 일은 잘한 일이다’, ‘남편은 아내를 이해해줘야 한다’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내가 주목했던 것은 소통의 문제다. 특히 가영이 엄마와 아빠가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면, 좀 더 평화롭게 이 일을 해결해서 엄마의 자아 찾기는 물론, 행복한 가정을 지키는 것도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중략) 엄마도 아빠도 가희도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있을 뿐 소통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온라인 독자 서평 중에서)

 


  "위의 글은 여기서의 문제가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면 '좀 더 평화롭게 일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라고 내가 질문했다. "현실적으로 대화로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생각이 다른 사람이 대화로 간극을 좁히는 일은 어려워요. 겉도는 대화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선으로 끝나죠"라고 현욱님이 대답했다. 미숙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TV에서 어버이 연합과 자식연합이 토론하는 장면을 봤는데, 대화가 통하지 않자 한쪽에서 화를 내고 큰소리가 나오고 더 이상 소통이 되지 않았죠. 신념이 다른 사람들의 대화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자기에 대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대자존재(代自存在)' 동시에 '타자에 대하여 존재하는 '대타존재(代打存在)'라고 했죠. 대자존재와 대자존재, 대타존재와 대타존재의 대화와 소통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대자존재와 대타존재의 대화는 부딪힐 확률이 많죠. 이해하려는 태도나 경향에 따라 임시방책은 될 수 있겠지만, 계속 반복되면 언젠가 힘들어질 거예요. 근원적 해결은 할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주제는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대자 존재로 살고자 하는, 꿈을 이루려는 것 사이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어요“라고 내가 말했다.

 

  이 책에는 세대가 다른 3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 마흔에 일을 시작한 엄마,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13살 가영이다. ‘앞으로 가영이가 살아가야 할 미래의 바람직한 모습과 그 모습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61세의 순화님이 대답했다. "결혼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와 보니 책임감이나 자식교육이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삶이 너무 복잡해요.“, "여성이 직장을 다녀도 다른 여성이 희생되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해요.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구조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은진님이 덧붙였다. "가사의 역할 분담에서 내가 누구의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생각의 변화와 보육복지 정책 등 사회 구조적인 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내가 말했다.

 


찬반토론

 

  대부분 자유롭고 싶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꿈을 유예시키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이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는 샤르트르의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 ’저주‘를 풀 수 없을까?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면서, 혹은 나의 꿈을 향해 가면서도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책 속의 내용과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유토론에 이어 찬.반의 입장을 정하고 솔직한 의견을 나누는 찬반토론을 했다.

 

  이 책의 주인공 가영이는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대회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선수에서 제외된다. ‘가영이가 축구대회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제외된 이 결정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논제에 '정당하다'의 찬성표가 4표, '정당하지 않다'의 반대표 6표로 의견이 나뉘었다. 찬성표를 든 토론자들은 '승부를 떠나 남자 축구팀의 유일한 여자선수인 가영이는 몸의 조건이 달라 몸싸움을 할 때 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라고 말했고, 이 의견에 반대표를 든 토론자들은 이렇게 반론했다. '가영이가 계속 축구를 함께 해왔는데 갑자기 여자라는 이유로 경기에 못 나오게 한 것은, 상대팀이 여자선수가 있는 팀(가영이가 잘해서)에게 졌다는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분명 가영이의 의사를 묻지 않고 선수에서 제외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 남성과 여성은 극복할 수 없는 신체적인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가임 유무. 이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로부터 생물학적인 차이(Sex)로 남·여를 구분하고 사회적으로 그 역할을 분담했다. 생물학적인 차이에 따라 사회적인 역할(Gender)이 달라지는 것이 어쩌면 바람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영이의 엄마와 우리에게 내려진 이 ‘자유의 저주’는 ‘내’가 만든 것일까? 저주의 주체를 알아야 이 저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제시문을 읽고 다시 토론에 들어갔다.

 

 
    ( 제시문 A )

… 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呼名, interpellation)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중략) 우리는 경찰의 일상적인 호명과 같은 유형 속에서 그것을 표상할 수 있다. “헤이, 거기 당신!” 이렇게 호명된다면 호명된 개체는 뒤돌아볼 것이다. 이 단순한 180도 물리적 선회에 의하여 그는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호명이 바로 ‘그’에게 행해졌으며, ‘호명된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


( 알 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중에서 )


    ( 제시문 B )

  … 샤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란 항상 고독하며, 자신만이 스스로를 짐질 수 있다. 그런데 나를 존재하게 하는 타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타인이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무시하고 타인에게 기대어 산다. 자기 앞에 '객체'(타인)'로 향한 절대 목적을 놓음으로써 자기 자유성을 잃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적 도구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것이 자기 뜻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이 베푼 희생이 짓밟혔다고 여긴다. 자기(주체)목적과 타인(객체)의 목적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


( 이우의 <이야기가 있는 인문학> 중에서 )


 

  제시문 A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呼名, interpellation)한다'는 알 튀세르의 주장을 설명해 놓은 글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당시의 '이데올로기'인 '열녀((烈女)', '삼종지도(三從之道)' 라는 당시의 사회 질서를 지키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찬성표가 5표, 아마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대표 5표로 반반씩 갈렸다.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아요. 교육을 받지 못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을 지키고 살았을 것 같아요“라고 찬성토론자가 말했다. "전 전생에 대해 생각해 보면 기녀였을 것 같아요. 당시의 틀을 못 견뎌했을 거예요”라고 주연님이 솔직하게 말해 웃음과 감탄이 쏟아졌다.

 

  ‘인간이 이데올로기의 호명(呼名, interpellation)을 받아야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알 튀세르의 주장이 맞다면, 사람은 한 시대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을 것이 때문에 역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해 왔다. '열녀(烈女)', '삼종지도 (三從之道)'라는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명했지만 이제는 이를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라고 내가 물었다. "탈농경 사회, 여성교육, 사상의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미숙님이 대답했다. "저는 가영이 엄마와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외롭고 고독하지만 대자존재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가영이 엄마의 용기 있는 선택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시대정신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내가 덧붙였다.

 

  ‘가영이 엄마가 그림을 그려도 다른 사람(남편이나 가영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샤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는 나의 질문에 회원들은 많이 망설였다. 그러나 "생각의 그릇을 키워 나가야죠. 끊임없이 공부하고, 대화하면서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잘 풀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라고 은진님이 답하면서 우리는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주체, 대자존재

 

 

  그렇다. 내가 스스로 존재하는 대자적인 존재인데 상대가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는 대타적인 존재라면, 대자적인 존재는 대타적인 존재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기영이 엄마가 대자적인 존재라면, 가영이의 아빠는 가사를 아내에게 의존하고 있는 대타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가영이 엄마의 ‘독립 선언’은 아빠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되었고 결국 화해하지 못 하고 별거를 해야 하는 고통을 낳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다. 차라리 나를 희생해서라도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고, 자신의 꿈과 자유를 유보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샤르트르가 내린 ‘자유의 저주’를 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래 샤르트르의 글처럼 내가 대자존재로 바로 서고 상대도 대자존재로 선다면,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 받은 존재’가 아니라 ‘자유롭도록 축복 받은 존재’가 될 것이다. 가영이의 엄마는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존재하고, 가영이의 아빠 또한 스스로 존재한다면 이 책과는 다른 행복한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은진님이 말한 "생각의 그릇을 키우고 공부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의존하고 기대하는 대타적인 존재를 대자적인 존재로 바로 설 수 있게 하는 키(Key)다. 원인을 알 지 못한다면 문제를 풀 생각조차 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샤르트르가 규정한 ’저주‘는 풀려갔다.

 


  … 사랑이 자유로운 증여의 성격을 띠기 위해선 증여받는 상대 역시 자유로운 상태여야 한다. 이럴 때만 타인의 자유와 만나는 자신의 자유가 실재성을 띤다. 그리고 자유와 자유의 만남은 다른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의 모습을 보인다. 자유를 향해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


(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

 


  나는,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의 '가영이 엄마'와 '책주사' 회원들에게서 행복한 미래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대자존재(代自存在)'적 삶으로 나아가는 기쁨을 보았다.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었다.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낯선 사람과 마주치고 또 마주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면, 가영이가 또 한 사람의 엄마가 되는 미래에는 이 ‘저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주) ...................................

자유 :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자유를 "나의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자는 자유롭지 못 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를 가진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