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말과 사물』 : 서문 · 분절(分節, articulation)의 문제

by 이우 posted Oct 14, 2019 Views 1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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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의 탄생 장소는 보르헤스의 텍스트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 존재물의 무질서한 우글거림을 완화해 주는 정돈된 표면과 평면을 모조리 흩뜨리고 우리의 매우 오래된 관행인 동일자와 타자의 원리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오래도록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사유, 우리의 사유, 즉 우리 시대와 우리의 지리(地理)가 각인되어 있는 사유의 친숙성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은 웃음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는 "동물이 a)황제에게 속하는 것, b)향기로운 것, c)길들여진 것, d)식용 젖먹이 돼지, e)인어(人魚), f)신화에 나노는 것, g)풀려나 싸대는 것, h)지금의 분류에 포함된 것, i)미친 듯이 나부대는 것, j)수없이 많은 것, k)아주 가느다란 낙타털 붓으로 그린 것, l)기타, m)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것, n)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등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분류에서 누구에게나 난데없이 다가오는 것, 교훈적인 우화의 형식 덕분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사유의 이국적인 매력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갖는 한계, 즉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적나라한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을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어떤 불가능성이 문제일까? 이 특이한 항목들 각각에는 분명한 의미와 정확한 내용을 부여할 수 있고, 몇몇 항목은 명백히 환상적인 존재들, 이를테면 신화적인 동물이나 인어나 채워져 있지만, 중국 백과사전은 바로 이것들에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이것들의 확산을 차단하고, 미친듯이 나부대거나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정말로 실재하는 동물과 상상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동물들을 세심하게 구분한다. 위험한 혼합이 철저히 배제되고, 상징적인 표지와 지어낸 이야기가 제각기 높은 정점에 이르며, 상상할 수 없는 양서(兩捿) 동물도, 발톱 달린 날개도, 비늘 덮인 보기 흉한 피부도, 악마 같은 다형(多形)의 얼굴도, 불꽃의 입김도 없다. 여기에서 기괴성은 실제로 어떤 육체도 변화시키지 않고, 상상 속의 동물 우화집에 어떤 변모도 일으키지 않으며, 기이한 힘이 꿈틀대는 어떤 심층 속에 감춰져 있지도 않다. 심지어는 빈 공간 전체로, 존재물들을 서로 분리하는 공백의 간극으로 스며들지 않는다면, 이 분류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전설상의 동물'은 그 자체로 지칭되므로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한 것은 전설상의 동물이 아니라, 풀려나 싸대는 개 또는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들과 전설상의 동물이 나란히 놓일 때의 좁은 간격이다. 모든 상상, 모든 가능한 사유를 벗어나는 것은 그저 이 각각의 범주를 서로 연결하는 알파벳순의 계열(a, b, c, d)이다.

  엉뚱하고 기묘한 마주침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극단적인 것들의 근접이나 관계가 없는 사물들의 느닷없는 인접만 해도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없지 않고, 그런 것들을 서로 마주치게 하는 열거만 해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가령 외스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이제 나는 배고프지 않다. 아스픽스, 암피스메데스, 아이아르트라즈, 암모바테스, 아피나오스, 알라트라반스, 아락테스, 아스테라온스, 알카라테스, 아라이에스, 아스갈리베스, 아틸라베스, 아스칼라보테스, 아에모로이데스가 내일까지는 내 힘으로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벌레와 뱀, 이 모든 끈적끈적하고 썩은 동물들은 이 명칭들의 음절처럼 외스텐의 침 속에서 우글거린다. 이 모든 것의 공통의 장소(논리가 들어 있는 저장소)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처럼 바로 그의 침 속이고, 이것들의 야릇한 마주침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확고하고 자명해서 병치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 및 "안에", 그리고 "위에"라는 어위를 토대로 해서이다. 물론 독사, 거미, 사막의 뱀이 어느 날 외스텐의 입속에서 뒤섞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요컨대 뭐든지 게걸스럽게 삼켜대는 그러한 입 안에서 이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공존의 궁전을 발견할 여지는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보르헤스의 열거에 감도는 기괴성은 항목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가 무너져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불가능한 것은 사물들의 근절이 아니라, 사물들이 인접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열거하는 목소리에서가 아니라면, 열거의 항목들에 기입되는 종이 위가 아니라면, 과연 어디에서 "i)미친 듯이 나부되는 듯한 동물, j)수없이 많은 동물, k) 아주 가느다란 낙타털 붓으로 그려진 동물"이 마주칠 수 있을 것인가? 언어의 (非)-장소(non-lieu, 원래 법률용어로서 '기소 면제'를 뜻한다. 여기에서는 언어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장소 아닌 장소'다.)가 아니라면 어디에 이것들이 나란히 놓일 것인가? 그런데 언어는 이것들을 늘어놓으면서 오로지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을 열어 놓을 따름이다. "현재의 분류에 포함된" 동물이라는 중심의 범주는 앞뒤에 이어 나열된 항목들 사이의 부조리에 명시적으로 의거하는 만큼, 이 집합들 각각과 이 집합들을 통합하는 집합 사이의 인정된 포함 관계가 결코 규정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분류된 동물이 분류 항목들 중의 하나에 예외없이 놓이는 것은 다른 모든 동물이 이 항목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 항목은 어떤 공간에 존재할까? 이처럼 분명한 부조리로 말미암아, 열거된 사물들이 분류될 "안에"라는 전치사에 불가능성의 충격이 가해지면서, 열거의 접속사도 훼손된다. (중략)

  중국 백과사전에 나오는 열거에서 유일하게 가시적으로 길잡이 구실을 한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알파벳순 계열에 의해 가려진 소멸, 더 정확히 말해서 미미하게 드러나는 소멸…. 물러나는 것은 한마디로 유명한 "수술대"인데, 나는 루셀에게서 늘 빚지고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갚으려는 마음에서, 대(臺) 또는 탁자라는 의미의 낱말 '테이블'을 두 가지 중첩된 의미로 사용하고 싶다. 하나는 어둠을 삼키는 유리 태양(전구) 아래 반짝거리고 니켈 도금이 되어 있으며 방수포와 하얀 면직포로 둘러싸여 있는 수술대이다. 거기에서는 어느 순간, 우산이 재봉틀과 마주치고 어쩌면 계속해서 마주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유로 하여금 존재물의 정돈과 종류별 분할, 존재물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지정되는 명목적인 분류를 실행하게 해주는 도표이다. 거기에서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공간과 교차한다. (...)

 - 『말과 사물』(지은이 : 미셸 푸코 · 옮긴 이 : 이규현 · 민음사 · 2012년 · 원제 : Les mots et les choses, 1966년) <서문>  p.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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