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창한 '관용'의 논거, 즉 모든 인간, 모든 종족은 평등하다는 논거는 부메랑이다. 그러한 논거는 감각적으로 쉽게 반박될 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종족이 아니다'에 대한 가장 강제력 있는 증거조차 대량 학살에 직면할 때 전체주의자들은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죽이지 않아야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변경하지 못할 것이다. (..) 모든 사람이 같다는 것은 바로 사회에 잘 맞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적인 차이 또는 상반된 차이를 '아직 멀었다'는것, 또는 잘 돌아가는 메커니즘에서 튕겨나온 무엇이 있다고 여긴다. (...) 해방된 사회는 아마 획일화한 국가가 아니라 차이들의 화해 속에서 보편성이 실현되는 것일 것이다. 이런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치는 그 때문에 인간의 추상적 평등을 결코 이념으로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 (...)
(...) 사실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흑인에게 백인과 동일하다고 납득시키려 드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흑인에게 다시 한 번 은근히 불의를 가하는 것이다. 흑인은, 체계의 압력 아래서는 자신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또한 충족시키기에는 현실성이 없다고 의심되는 기준을 적용받음으로써 친절한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통일 지향적인 관용의 옹호자는 항상 순응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서는 비관용적이 될 경향이 짙다. 유대인의 무례에 대한 분개는 흑인의 평등에 대한 비타협적 열광과 잘 조응한다. 모든 것을 녹여 뒤섞는 용광로는 고삐 풀린 산업자본주의의 장치였다. 이 용광로 안에 뛰어들려는 사유는 민주주의가 아닌 고문사(拷問死)를 주문으로 외우고 있는 것이다. (...)
(..) 지식인에 대한 충고는 "누군가가 너를 대신하게 하지 마라"는 것이다. 모든 활동이나 모든 인간의 대체가능성, 그리고 거기서 도출된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기존 질서 내에 있는 족쇄임이 입증된다. '대신 할 수 있음'이라는 평등주의적 이상은, 일반인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들에 의해 파면될 수 있다는 원칙이 뒷받침된다 하더라도 사기에 불과하다. 이들이야말로, 스스로는 가능한 적게 행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짐을 지우면서 이득을 취하는 강력한 자이다. 이것은 집단주의와 비슷하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타인의 노동을 관장함으로써 자신은 노동을 면제받으려 든다.
물질생산에서 대체 가능성은 물론 객관적 근거가 있다. 노동 과정의 계량화는 사장이 하는 일과 주유소 직원이 하는 일의 차이를 점점 줄여가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존건 아래서 대기업의 관리가 기압계를 검침하는 일보다 더 많은 지성, 경험,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은 빈약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끈질기게 유지되는 반면, '정신'은 정반대의 것에 종속된다. 그것은 거덜이 난 보편 교육의 이념으로서,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감독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비슷한 정도로 잘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학문 공화국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교리이다.
대체 가능성은 교환이 사물에 부과한 것과 비슷한 과정에 사유 또한 굴복시킨다. '불가공역적인'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환 관계에서 생겨난 포괄적 공약 가능성을 비판하는 것이 사유의 일차적 과제이기 때문에 정신적 생산 관계를 주성하는 이러한 공약가능성은 생산력과 배치되게 한다. 물질적 영역에서 대체 가능성은 이미 가능한 것이며,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대체 불가능성은 이것을 가로막는 핑계에 불과하다. (...)
대체 불가능성만이 정신이 피고용 상태에 떨어지는 것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자명한 듯이 슬쩍 끼워 넣은 요구, 즉 모든 정신 활동은 조직체의 모든 자격 있는 구성원에 의해 동일하게 수행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가장 고루한 과학 기술자를 학문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 정신적 생산의 개인주의에 완전히 내맡기지도, 평등주의적이고 인간 경멸적인 대체 가능성에 기초한 집단주의에 마구 몸을 팔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공동 책임 아래 자유로운 협업과 단단한 연대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정신'을 '장사'에, 그리고 그와 함께 결국 장사의 이익을 위해 팔아넘기는 것이다. (...)
- <미니마 모랄리아>(테오도르 아도르노 · 길 · 2005년 · 원제 :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a"digten Leben, 1951년) p.140~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