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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입술 · 입맞춤 · 기관

by 이우 posted Feb 02, 2018 Views 1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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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키스하기에 앞서 우리가 사귀기 전 그녀가 바닷가에서 지녔다고 생각했던 신비로움으로 다시 그녀를 가득 채워 그녀 안에서 예전에 그녀가 살았던 고장을 되찾고 싶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런 신비로움 대신에, 나는 적어도 우리가 발베크에서 보낸 온갖 삶의 추억을, 내 창 밑에서 부서지던 파도 소리와 아이들의 고함 소리를 넌지시 밀어넣을 수 있었다. (중략)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베크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마침내 알베르틴의 두 뺨의 맛을, 그 미지의 맛을, 그 미지의 장밋빛 맛을 이제 드디어 알게 되는구나. 우리가 사는 동안 사물이나 존재가 관통하는 동심원은 그리 많지 않으며, 내가 다른 모든 이들 중에서 택한 이 꽃핀 얼굴을 멀리 있는 틀로부터 나오게 하여 새로운 도면에 놓고 마침내 입술을 통해 얼굴의 인식에 도달한다면, 내 삶은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입술을 통한 인식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미빛 살갗의 맛을 알게 될 거라고 말한 것도 성게나 고래보다 확실히 덜 초보적인 피조물인 남자에게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몇몇 기관이 부족하고, 특히 입맞춤에 유용한 기관은 하나도 없다는 걸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부족한 기관을 남자는 '입술(levres)'로 보충하고,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이를 송곳니 같은 뿔로 애무할 수밖에 없는데 비하면, 조금은 만족한 결과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입술을 자극하는 맛을 입천장에 가져가기 위해 고안된 입술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도 털어놓지 못한 채, 겉에서 빙빙 돌다가 욕망하지만, 그 꿰뚫을 수 없는 뺨의 벽에 부딪친다. 게다가 그 순간 살에 닿거나, 또는 보다 전문적이며 재능이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입술은, 자연이 현재 포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맛을 아마도 더 많이 음미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입술이 양분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 비참한 지대에는, 시선이나 후각이 오래전 입술을 방치한 탓에 입술만이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 민음사 · 2016년  · 원제 :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제6권 <게르망트 쪽2> p.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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