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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죽음, 그리고 일상, 생명 에너지

by 이우 posted Feb 01, 2018 Views 1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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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흔히 죽음의 시간이 불확실하다고 말하지만, 이런 말을 할 때면 그 시간이 뭔가 막연하고도 먼 공간에 위치한 것처럼 상상하는 탓에, 그 시간이 이미 시작된 날과 관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이렇게 확실한 오후, 모든 시간표가 미리 정해진 오후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달 동안 필요한 신선한 공기 전부를 마시려고 산책하기를 열망하면서도, 입고 나갈 외투나 우리가 부를 마부를 고르면서는 망설이고, 그런 후 합승 마차에 오르면 하루가 당신 앞에 온전히 놓인 듯 보이지만, 여자 친구를 맞이하려고 때맞춰 집에 돌아가기를 바라기에 하루가 짧다고 느끼고 다음 날에도 날씨가 좋기를 바라곤 한다. 그리하여 다른 쪽에서 당신을 향해 걸어오던 죽음이,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바로 그날 몇 분 후 마차가 거의 상젤리제에 도착할 바로 그 순간을 선택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한다. 어쩌면 보통 때에는 죽음 특유의 기이함 때문에 그 공포에 시달리던 이들은 이런 종류의 죽음에서--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과의 접촉에서--그것이 우리가 아는 일상의 친숙한 모습을 띤다는 사실에 오히려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죽음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찾아오기도 하고, 건겅한 사람의 외출길에 찾아오기도 한다. 첫번째 발작에 이어 무개 사륜마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할머니가 두번째 발작을 일으켰다. 할머니의 병이 아무리 위중해도, 우리는 6시에 샹젤리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으며, 또 화창한 날씨에 마차 덮개를 연 채 지나가고 있었으므로,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콩코르도 광장으로 가던 르그랑댕 씨는 모자를 들고 우리를 향해 인사하다가 깜짝 놀란 듯 길에 멈추었다. (중략)

  그렇다. 조금 전 내가 합승 마차를 찾는 동안 할머니는 브리엘 대로의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잠시 후에는 무개 사륜마차를 타고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게 정말 사실이었을까? 길에 놓인 의자는--비록 평형을 잡는다는 몇몇 조건에 따르긴 하지만--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이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려면, 의자나 마차 안에서 몸을 기댈 때에도, 대기의 압력과 마차가지로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모든 방향에서 행사되므로) 어떤 힘의 긴장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몸을 텅 비우고 대기의 압력을 견뎌낸다면, 우리가 파괴되기 이전 순간에는 더 이상 무엇으로도 무력화하지 못하는 끔직한 중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병과 죽음의 심연이 우리 몸속에 열릴 때면, 또 세상과 우리 자신의 육체가 우리에게 덮치는 혼란스러운 동요에 더 버틸 힘이 없을 때면, 그때 근육의 무게를 유지하고 골수까지 파고드는 전율을 견디면서 평소에는 그저 사물의 소극적인 자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그런 부동자세를 취하는 일이나,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안정된 눈길을 유지하는 일조차도 모두 생명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극심한 투쟁이 된다.

  그리고 만일 르그랑댕이 놀란 시선으로 우릴 바라보았다면, 바로 그때 거기를 지나가던 다른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합승마차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가 그에게는 뭔가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듯, 절망적으로 방석에 몸을 붙이고 흐트러진 머리칼과 초점 잃은 눈으로 추락하는 몸을 간신히 버티면서, 더 이상 눈동자가 담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공격에 맞설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 민음사 · 2016년  · 원제 :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제6권 <게르망트 쪽2> p.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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