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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마르크스·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유물론적 역사관

by 이우 posted Feb 25, 2020 Views 2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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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각 개인들은 자신의 활동이 세계사적 활동으로 확대됨에 따라 점점 자신들에게 낯선 힘(그들이 이른바 세계정신 따위의 잔꾀 정도로 생각해 왔던 하나의 힘) 아래 굴복하게 된다는 것,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경험적 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 힘은 점점 더 커져 결국에는 세계 시장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중략) 위로부터 명확해 지는 것은 개인의 현실적인 정신적 부(富)야말로 전적으로 자신의 현실적 관계들의 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오직 이것만이 각 개인을 온갖 국가적·지역적 한계들로부터 해방시켜, 그들로 하여금 전 세계의 생산(인간의 창조물)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도록 해준다. (중략) 그런데 이 견해도 역시 '유(類)의 자기창출'(주체로서의 사회)과 같은 사변적·관념적인, 곧 환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상호 연관된 개인들의 연속적인 연관은 스스로를 창출해 내고 신비스러운 일을 행하는 유일한 개인으로 표상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분명한 것은 개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의심할 바 없이 서로를 만들어 가지만, 성 브루노의 난센스나 '유일자'나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의미에서처럼 스스로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직접적인 생활의 물질적 생산에서 출발하여 현실적인 생산과정을 전개한 데서, 이러한 생산양식과 관련되고 그로부터 산출된 교류 형태, 즉 각기 다른 단계에 있는 시민사회를 전체의 기초로 파악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관은 시민사회의 행위를 국가의 활동으로 서술하며, 이울러 의식, 종교, 철학, 도덕 등등의 모든 다양한 이론적 산물과 형태들이 어떻게 시민사회로부터 생겨났는가를 설명하고, 그것들이 그 기초로부터 형성된 과정을 추적한다. 그에 따라 모든 것들이 시민사회의 총체성 속에서 제시될 수 있다. 이 역사관은 관념론적 역사관처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하나의 범주를 찾아 적용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역사적 지반 위에 서서 관념으로부터 실천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실천으로부터 관념적 구성물을 설명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 결론이란 의식의 모든 형태 및 산물은 정신적 비판에 의해서 그리고 '자기의식'으로서의 해소에 의해서 또 '요괴', '유령', '망상' 등으로의 변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러한 관념론적 허구들이 도출되는 현실적 사회관계의 실천적 전복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와 종교 철학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이론적 추진력은 비판이 아니라 혁명이다. 이러한 역사관에서 살펴보면, 역사'정신의 정신'으로서의 '자기의식' 속으로 해소됨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각  단계는 그 선조로부터 각 세대가 물려받은 물질적 성과, 생산력의 총합, 자연에 대한 그리고 각 개인들 상호 간의 역사적으로 창조된 관계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일군의 생산력, 자본, 환경이 존재하고 이것들이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개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에 대해 그 특유의 성격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간이 환경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모든 개인과 모든 세대를 주어진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생산력, 자본, 그리고 사회적 교류 형태의 이러한 총체야말로 철학자들이 '자기의식'이나 '유일자'로서 그것에 대항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그 효과나 영향 면에서는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는 실재적 근거이다. 다양한 각 세대들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생활 조건들은 또한 역사에서 주기적으로 재현되는 혁명적 진동이 일체의 기존 질서의 토대를 전복할 정도로 강력한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렇듯 하나의 혁명의 물질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곧  한편으로 현존의 생산력에 대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의 개별 조건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기존의 '생활의 생산' 자체가 토대로 삼고 있는 '전체적 활동'에 대해서도 반항하는 혁명적 대중이 형성되지 않는다면―공산주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이러한 혁명의 이념이 수백 번 표방된다 하더라도 실제로 혁명의 발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지금까지의 역사관에서 역사의 이러한 현실적 토대는 전적으로 무시되었거나 역사 과정과는 별로 상관없는 하나의 지엽적인 문제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역사는 언제나 역사 밖에 있는 기준에 따라서 기술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실적 생활방식비역사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반면에 역사적인 것일상생활에 유리된 것이나 특별히 초세속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가 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관은 결국 역사에서 군주나 국가의 정치적 행위 그리고 종교 및 그 밖의 이론적 투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특히 각각의 역사적 시기에서 그들은 그 시기의 환상들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한 시대의 종교나 정치는 그 시대의 현실적 동기들의 형식에 불과하지만, 그 시기 자체가 순수한 정치적 혹은 종교적 동기에 희해서 규정되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 시대 역사가는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현실적 실천에 관한 이러한 특정인들의 상상이나 표상은 그들의 실천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유일한 규정적·능동적 힘으로 전화된다.

  인도인이나 이집트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조야한 분업 형태가 이들 민족의 국가와 종교에서 세습신분제를 낳았을 경우, 역사가는 세습신분제가 이러한 조야한 사회형태를 산출한 힘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프랑스인영국인은 어쨌든 현실에 더욱 가까운 정치적 환상에 집착하는 데 반해 독일인순수정신의 영역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종교적 환상을 역사의 추동력으로 만들어 버렸다. 헤겔역사철학은 독일의 이러한 역사 기술 전체를 최후의 가장 순수한 표현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그것의 역사 기술상 문제는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며, 심지어 정치적인 이해관계도 아닌 순수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 브루노에게 서로 다른 편을 먹어치우고 결국 자기의식으로 몰락해 버리는 사상의 계열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사에 전혀 알지 못하는 막스 슈티르너는 역사 과정을 더 철저하게 한갓 '기사' 강도 그리고 유령의 이야기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그가 이 환상들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길은 고작 그것들에 '구원이 없다'는 점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정말이지 종교적이다. 그것은 종교적 인간을 모든 역사의 출발점인 원형적 인간으로 가정하고, 그 상상 속에서 생활수단 및 생활 자체의 현실적인 생산 대신에 종교적 환상의 생산을 끼워 넣는다.

  이 모든 역사관은 그 해체나 그로부터 나타나는 의혹 및 불안까지 포함해서 순전히 독일인의 민족적 관심사로만 남아 있을 뿐이며, 단지 독일에 대한 지역적 관계를 갖는 데 불과할 뿐이다. 예컨대 최근에 논의되어 온 중요한 문제, 곧 도대체 사람은 어떻게 '신의 왕국에서 인간의 왕국으로 오는가?"(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에 나오는 문구이다 : 편집자)와 같은 문제가 일례이다. 마치 이 '신의 왕국'이 상상 속이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학자들은 가끔 '인간의 왕국'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인간의 왕국'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찾고 있는 것처럼. 또 이 이론적 공중누각이 신비를 설명하는 학문적 도락은 거꾸로 현실의 세속적 관계 속에서 공중누각이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그 의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처럼. 

  독일인들은 주로 눈앞에 주어진 난센스를 어떤 다른 망상 속에서 해소시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즉 완전한 난센스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상상하여 그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면서도 현존하는 실제적 관계들에서 비롯된 이론적 문구들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도외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론적 문구들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해소, 또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관념들의 제거는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환경의 변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대중, 곧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이러한 이론적 표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소할 필요도 없으며, 그리고 어쩌다 한 번이라도 이 대중이 예컨대 종교와 같은 이론적 표상들을 가진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환경에 의해 해소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와 그에 대한 해명들이 순전히 민족적인 성격만 갖는다는 것은 이 이론가들이 '신인(神人)', '인간' 따위의 망상의 산물이 역사의 각 시대를 주재해 왔다고 곧이곧대로 믿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시 등장한다. 심지어 성 브루노는 오직 '비판과 비판가만이 역사를 만든다'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 역사를 구성하는 경우에는, 과거의 모든 시대를 신속하게 뛰어넘어 '몽골'에서 곧바로 '의미 있는 내용으로 가득찬' 역사로, 다시 말해서 <할례연보>나 <동일연보>의 역사나 헤겔학파의 일반적인 입씨름으로 해소되는 역사로 옮겨 간다. 그들은 다른 모든 국민들, 다른 모든 현실적인 사건들을 잊어버리고, 세계극장(Theatrum mundi: 신의 섭리 속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는 것이 삶이라는 중세의 관념: 옮긴이)을 라이프치히의 서적 시장과 '비판', '인간', '유일자' 사이의 상호논쟁에 한정시켜 놓는다. 설령 이 이론가들이 실제로 18세기와 같은 역사적 주제를 다룬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관념사를 제시할 뿐이다. (중략) 즉 모든 현실의 역사적인 사건, 심지어 실제로 있었던 정치의 역사에 대한 개입조차 다루지 않고 그 대신 연구가 아닌 자의적 구상이나 문학적 잡담 정도나 늘어놓을 것이다. 지금은 잊혀져 버린 『18세기의 역사』에서 성 브루노가 말한 것처럼, 자신들이 모든 국민적 편견을 무한히 초월해 있다고 믿는 오만방자한 사상소매상들은 실제로는 통일된 독일을 꿈꾸는 시정배들보다 훨씬 더 심한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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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이어바흐가 '보통 사람'이라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선언했을 때, 그리고 공산주의자를 인간이라는 것의 한 술어로 봄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특정한 혁명 정당의 소속자를 가리키는 공산주의자란 단어를 하나의 단순한 개념 범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때(『비칸트 계간지(Wigand's Vieteljahrsschrift)』, 1845년, 제2권), 그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는지가 위의 논의로부터 분명해진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두고 포이어바흐가 수행한 전체 영역은 오직 인간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또 항상 필요로 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는 이 사실에 관한 의식만을 확정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의식을 산출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중략) 감성적 세계에 관한 포이어바흐의 '파악(Auffassung)'은 한편으로는 단순한 직관 자체에,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발견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현실의 역사적 인간' 대신에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말한다. (중략) 

  곧 감성적 세계의 직관 속에서 그는 필연적으로 그의 의식과 그의 감정에 모순되는 사물들에 직면하게 되며, 그가 전제한 세계의 부분들 사이의 조화, 특히 인간과 자연이라는 조화를 교란하려는 사물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자 그는 이러한 사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중직관' 즉 단지 '언뜻 보기에 명백한 것'만을 간취하는 세속적 직관사물의 '참된 본질'을 간취하는 더 고차원적인 철학적 직관 사이에서 도피처를 구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감성적 세계가 예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상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감성적 세계가 역사적 산물이고, 여러 세대의 활동의 산물이며, 각 세대는 그에 앞선 세대들을 딛고 그 산업과 교통을 발전시키며, 그 사회질서를 자신들의 변화된 욕구에 따라 수정해 간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가장 단순한 '감각적 확실성'의 대상들조차도 오직 사회의 발전, 산업, 상업적 교류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벚나무는 거의 다른 모든 과실수와 마찬가지로 수 세기 전에 상업에 의해서 비로소 우리 지역에 심어진 것이다. (중략)

  '실체'와 '자기의식'에 관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고차원적인 저작들'을 낳게 했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브루노는 마치 자연과 역사가 두 가지 별개의 사물들이고, 또한 인간은 언제나 그 앞에 하나의 역사적 자연과 하나의 자연적 역사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는 듯이 '자연과 역사의 대립'을 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라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했을 때 저절로 무너지고 만다. 다시 말해서 그 유명한 '인간과 자연의 통일'은 산업 가운데 언제나 존재했고, 그것도 산업의 발전 정도에 따라 각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산력이 하나의 상응한 토대 위에서 발전하기까지는 통일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자연의 투쟁도 존재한다. 이것들은 산업과 상업, 생활필수품의 생산과 교환 쪽에서 제약을 받으며, 그 경영방식에 따른 분배 및 각종 사회계급의 구성에 의해 제약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포이어바흐가 백 년 전에는 물레와 베틀밖에 볼 수 없었던 맨체스터에서 지금은 공장과 직조기만을 보는 것이며, 그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있었더라면 로마 자본가들의 포도밭과 장원들 외에 아무 것도 보지못했을 로마 평원에서 지금은 목장과 늪만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산업과 상업 없이 어떻게 자연과학이 있었겠는가? 이러한 '순수한' 자연과학조차도 상업과 산업을 통해서, 또 인간의 감성적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주어진다. 이 활동, 즉 끊임없는 감성적 노동과 창조, 이 생산이야말로 현존하는 감성적 세계 전체의 기초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 일 년만이라도 중단된다면 포이어바흐는 자연계에서 엄청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며, 전체 인간세계와 그의 고유한 직관능력, 더구나 그 자신의 존재마저도 당장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도 외적 자연의 선재성(先在性, Prioritat)은 여전히 존속한다. 물론 앞에서도 말한 모든 상황들은 원시적이고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인간을 자연과 구별된 것으로 고찰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나아가 인간의 역사에 선행하는 자연이란 포이어바흐가 살고 있는 자연이 아니며, 또한 새로이 발생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몇몇 산호섬 이외에는 오늘날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포이어바흐에 대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자연도 아닌 것이다.

  물론 포이어바흐가 인간도 역시 '감성적 대상'이라고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한' 유물론자보다는 훨씬 탁월하다. 하지만 그가 인간을 '감성적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감성적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여기에서도 이론에 머물러서 인간을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연관 속에서, 또 현재의 모습대로 만들어 낸 눈앞의 생활 조건 속에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코 현실적으로 실존하고 활동하는 인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인간'이라는 추상물에 머물러서 '현실적, 개별적, 육체적' 인간을 단지 감각 속에서만 인정하는 데 그쳤다. 다시 말해서 그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인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연애와 우정, 그것도 관념화된 형태로서의 그것만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생활 관계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다. 따라서 세계를, 그것을 형성하는 개인들의 총체적이고 살아 있는 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는 데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건강한 인간이 아닌, 즉 연주창에 걸려 있거나 과로와 폐병에 시달리는 일군의 굶주린 사람들을 보게 될 경우, '더욱 높은 직관'과 '류(類)'에서의 '평균화'로 도피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서 곧바로 관념론으로 역전되지 않을 수 없다. (...) 

  -『독일 이데올로기』(지은이: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 옮긴이: 김대웅 · 두레 · 2015년) <의식의 생산에 대하여> p.7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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