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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 마주침의 유물론

by 이우 posted Feb 13, 2020 Views 2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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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피쿠로스에서 맑스에 이르기까지 항상, 자신의 유물론적 기초를 어떤 마주침의 철학(따라서 다소간 원자론적인 철학. 원자는 '낙하' 중에 있는 개체성의 가장 단순한 현상이다) 속에서 찾은 하나의 심오한 전통이―그러나 자신의 발견 그 자체에 의해, 망각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죽음이라는 그럴듯한 규탄은 모면한다 해도, 불인정들과 억압들에 의해 은폐된 채로―존속해 왔음을 증언한다. 그 전통이 자신의 유물론적 기초를 마주침의 철학 속에서 찾았다는 것은 곧 기초를 모든 본질의 철학, 즉 이성의 철학, 따라서 기원 및 목적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기각하는 것 속에서 찾았다는 것을 뜻한다. 전체와 모든 질서(Order)거부함으로써 전체와 질서를 거부하고 분산(데리다라면 자기 용어로 '산포(散布)'라 할 것이다)과 무질서의 편을 드는 철학을 위한 이 기각 속에서 말이다. 시초에 무질서가 있었다는 것, 이것은 모든 조립 또는 모든 정돈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자리잡는다는 것, 기원을 로서 사고하기 위해 기원을 이성 또는 목적으로서 사고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해 이 유물론 철학은 이렇게 답한다. "무(le neant)―"아무 것도 아닌 것"(rein)ㅡ"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한다." "시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있기에 앞서서는 시작이라는 것도 포함하여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철학 자신의 기원인 어떤 시작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반대로 철학은 '달리고 있는 기차를 타며", 헤라클레이토스의 물처럼, 자신에 앞서 영원한 옛날부터 흘러가는 '열차를 잡아탄다." 따라서 세계의 목적도 없고, 역사, 철학, 도덕, 예술 또는 정치 따위의 목적도 없다. 니체로부터 들뢰즈데리다, 영국의 경험주의 또는 하이데거 이후 우리에게 친숙해졌고, 철학의 모든 지성뿐 아니라 철학의 소위 "대상들"(이것이 과학이든, 문화든, 예술이든, 또는 기타 철학의 실존의 표현인 그 어떤 것이들 간에)의 지성에게 생산력이 있게 된 이 주제들은 이 미주침의 유물론의 본질적인 것들이다. 이 주제들이 다른 개념들의 형태로 아무리 가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주제들을 더 분명한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마주침의 유물론을 오직 잠정적으로만 유물론으로 부른다고, 그리고 이는 모든 의식의 관념론, 이성의 관념론―그 목적지가 어디이건―에 대한 그것의 근본적 대립을 감지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어 우리는 마주침의 유물론이 다음과 같은 독특한 명제에 대한 특정한 해석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 있다(il y a)"("es gibt", 하이데거)와 그것의 전개들 또는 함축들, 즉 "~이 있다"="아무 것도 없다(il n'y a rien) : "~이 있다"="항상 아미 아무 것도 없었다." 즉 지금까지 내가 여러 글에서 많이 사용했지만 항상 지각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항상 이미". 이 "무엇인가"와 "항상 이미"는 모든 사물이 자기 자신에 대해, 따라서 기원에 대해 이렇게 선행한다는 것의 상표(griffe, 붙잡기)이다. 다음 우리는 마주침의 유물론부정성에 대한 긍정성의의 우위라는 테제 속에(들뢰즈), 곧은 진로에 대한 편의의 우위라는 테제 속에(데리다), 그리고 바로 세계를 발생시킨 무질서의 태내로부터 질서의 발생 속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마주침의 유물론은 또한 전적으로 목적의 부정, 합리적 목적론, 세속적 목적론, 도덕적 목적론, 정치적 목적론, 미학적 목적론을 막론한 모든 목적론의 부정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끝으로 우리는 마주침의 유물론은 주체의 유물론이 아니라(이 주체가 신이든 프롤레타리리아트이든) 과정ㅡ주체가 없으며 자신이 지배하는 주체들(개인들 또는 기타)에게 자신 발전의 질서, 지정가능한 목적이 없는 발전의 질서를 부과하는 과정ㅡ의 유물론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 테제들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몇 개의 개념들을, 자연히 아무 것도 아닌 것(rien)의 개념들인 대상 없는 개념들을, 생산하기에 이를 것이다. 철학은 대상을 갖지 않으며,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그것이 존재(etre)는 존재들 속에서 오인되거나 도는 승인(인정)되게 만들기 위해, 존재로 또는 존재들로 만든다. 아무 것도 아닌 것존재들 속에서, 최종적으로, 오인되고 예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략)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 전체이다"(Die Welt ist alles, was der Fall ist. 비트겐슈타인). 세계는 "떨어지는" 모든 것, 일어나는 모든 것, "사례(cas)인 것 전체"이다ㅡcas(사례, 라틴어)를 casus(떨어짐/사례)로, 즉 우발 사건이자 우연인 것으로 이해하자. 우발 사건이자 우연인 것은 예견할 수 없는 것의 방식, 그렇지만 존재(l' etre)의 방식으로 일어난다. (중략)

  존재도 없고 역사도 없는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니, il이 거기(세계 속)에서 일어나기(il y advient) 때문이다. 능동/수동의 비인칭 대명사 "il"이, 즉 마주침들이 에피쿠로스의 보편적 속에서, 모든 세계에, 모든 존재에, 그리고 모든 이유로서의 존재에 앞서는 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일어난다. "그것이 마주치는 일이 거기에서 일어났다." 하이데거의 경우를 말하자면, 최초의 '발송' 속으로 "그것이 던져지는" 일이 일어난다. 이것이 클리나멘의 기적에 의한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 즉 마주침들은 '알 수 없는 곳, 알수 없는 때에" 산출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 가장 작은 편의"라는 것, 다시 말해 또는 편의의 지정가능한 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아무런들 어떠랴. 루크레티우스의 텍스트는 세계의 그 어느 것으로도 지칭할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모든 세계의 기원인 것을 지칭하기에 충분히 명확하다. 편의의 "" 속에서 한 원자와 다른 원자 사이에 마주침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원자들의 평행이라는 조건 아래서 출현이 된다. 왜냐하면 한 번 침해되면 무한한 수의 원자들의 거대한 연쇄충돌이자 거대한 접촉을 유발하는 것이 바로 이 평행이기 때문이다. 어떤 한 세계가 탄생할 수도 있고 다른 세계가 탄생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가능한 세계복수로 있게 되고 이 가능성 개념이 기원적 무질서 개념 속에 뿌리 박을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이 연쇄 충돌의 탄생에서 유발된, 마주침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질서의 형태와 존재들의 형태가 나오게 된다. 이 때문에, 일단 마주침이 실현된 다음에는(미리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요소들에 대한 구조의 우위가 성립하게 된다. 끝으로 이 때문에 마주침 속에서 문제가 되는 요소들의 친화력완결성, 그 요소들의 "충돌 가능성"이라 불러야 할 것이 나온다. 이 마주침이ㅡ물이 얼듯이, 또는 우유가 엉기듯이, 또는 마요네즈가 굳어지듯이ㅡ 응고하도록, 즉 형태를 취하도록, 끝으로 형태들을, 그것도 새로운 형태들을 탄생시키도록 말이다. 그로부터 "형태(형식)"에 대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의(rien)"의 우위, 형식주의에 대한 우발적 유물론의 우위가 성립한다. 달리말해 무엇이 그 무엇을 산출할 수 없든 상관이 없다. 다만 서로 마주치도록, 그리고 그들의 친화력에 의해 서로 응고하도록 운명지워진 요소들만이 문제이다. 데모크리토스와 아마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의 경우에 원자들이 "갈고리가 달린" 것은, 또는 "갈고리 달린 원자"이라는 불리는 것은, 즉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에까지 서로 차례로 맞부딪히기에 적절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단 이렇게 응고하거나 충돌한 후에는 원자들은 자신들이 창시하는 존재의 왕국에 들어선다. 원자들은 지정가능한, 구별되는, 국지화시킬 수 있는, 때와 장소에 따라 이러저러한 특성을 부여받은, 존재들을 구성한다. 요컨대 자신의 요소에 장소의미역할지정하는, 더 적절히 말해 자신의 요소들을 "~의 요소들"로서(신체들의 요소들로서의, 존재들의 요소들로서의, 세계의 요소들로서의 원자들) 고정하는 존재의 구조 또는 세계의 구조가 원자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원자들은 세계의 기원이기는커녕 세계의 지정 및 출현의 이차적인 낙하일 뿐이다. (중략) 세계는, 그리고 이미 원자들은 세계에 대한 담론을 항상 이차적인 것으로, 존재의 철학을 이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중략)

  이러한 원리들이 정립된 이상 나머지는, 감히 말하자면,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온다.

  1. 어느 존재(신체, 동물, 인간, 국가, 또는 군주)가 있으려면 마주침이 전복합과거(前複合過去, 그 전에)에 일어나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경우만 생각해 보자면, 마주침이 친화력 있는 것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개인 및 정세 같은 것들 사이에, 또는 운과 같은 것들 사이에 일어났어야 하는 것이다. 정세는 그 자체가 접합(接合, jonction), 공접합(共接合, con-jonction)이요, 항상 변화하긴 하지만 응고한 이미 일어난 마주침, 스스로 자신의 무한한 선행원인들을 가리키는, 즉 선행 원인들의 무한한 연속에 이 선행원인들의 결과, 예컨대 보르지아와 같은 어떤 특정한 개인인 이 결과를 돌려보내는 마주침이다.

  2. 마주침은 원인들의 여러 계열들(series)들의 결과로 나오는 존재들의 계열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계열은 평행의 효과 또는 감염의 효과에 의해 즉각 증식한다. 브로통이 심오한 말로 말했듯이 "코끼리는 감염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쿠르노(프랑스의 수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그의 학설은 확률 계산에 입각해 있다)의 잘못 이해된 이 대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3.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기원들에서 그러할 뿐 아니라 마주침은 보증되어 있지 않다. 그 효과들에서도 그렇다. 달리 말해, 모든 마주침은 가 그것의 우발적인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해준다. 마주침의 요소들 속에서그 어떤 것도 이 마주침 자체에 앞서서는  존재의 윤곽들과 결정(규정)들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중략) 모든 결정은 오직 결과의 생성으로서의 사후회귀 속에서만, 결과의 반복 속에서만 지정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결과는 오직 결과의 생성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면(헤겔), 또한 그 어떤 것도 이 생성의 결과에 의해 결정될 뿐 이 생성의 결과에 의해 생성되는 것은 아이라고 확언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연성을 필연성의 양상 또는 필연성의 예외로서 사고할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의 필연적 생성으로 사고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명의 세계가 그러할 뿐 아니라 역사의 세계도 어떤 알맞은 순간에, 이러저러한 형상ㅡ이러한 , 이러한 개인, 이러한 인민ㅡ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마주침결합시키는, 요소들의 응고 속으로 응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주어졌거나 받은 죽음의 우연성에 종속하는 사람들과 우발적인 들이, 그들의 저작들이, 그리고 우발성의 기원적 '주사위 놀이'가 그것에 형태를 부여한 이 세계의 대인물들이, 역사라는 세계가 그것에 '형태를 취한'(고대, 중세, 계몽시대 등등) 저 대인물들이 있게 된다. (중략)  그것들이 상당한 , 이 형태가 우연히 주재하게 된 서로 결합한 요소들에 '지속의 기회'를 부여하는 상당한 운의 알맞은 토대 위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직 하나의 "짧은 마주침"의 효과로서만 일어나리라는 점에서 잠정적 결과들이라는 이 사실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무 속에 있는 것, 무 속에 사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의미는 없지만 역사 속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이 의미는 그 자신 역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효한 그리고 유효하게 알맞은 마주침 또는 파국적인 마주침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로부터 '법칙'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귀결들이 뒤이어 나온다. 응고의 마주침에서 주재하는 법칙이 전혀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말하자면, 일단 마주침이 응고하면, 다시 말해 일단 세계의, 즉 현존하는 유일한(왜냐하면 주어진 세계의 출현은 분명히 가능한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기 때문에) 것의 안정된 형상이 구성되면, 우리는 하나의 안정된 세계에 대해, 이어서 법칙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세계가, 우리 세계가 허공 중에 내리는 에피쿠로스와 같이 떨어지는 원자들의 마주침에서 탄생했는지 또는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빅뱅'에서 탄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관계가 있는 것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라는 사실이며, 이 세계가 규칙적이며 규칙들을 따르고 법칙들에 복종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이 마주침의 유물론의 전제들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일치하는 사람들조차, 일단 이 마주침이 응고하면 법칙들의 검토, 즉 이 형태 취하기로부터 나오며 자신의 토대에서 이 형태들을 무한히 되풀이하는 그 검토 속으로 도망치려는 아주 큰 유혹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세계 속에 질서가 있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계의 인식은 이 세계 법칙들의 인식을 통하여, 그리고 이 법칙들의 실존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이 법칙들의 인식 가능성의 조건들의 인식을 통하여 승인된다는 것 역시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의 기원이라는 질문을 영원히 기각하는 방식이다. 칸트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이 기각은 결과적으로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 첫번째 마주침(개념들과 사물들의 마주침)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이 두 번째 마주침(이 세계를 있게 하는 마주침)의 기원을 더 어둠 속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자, 그러니 우리는 이 유혹을 경계할 것이다. 계약이 파멸에 기반한다고 주장하는 루소가 귀중히 여기는 한 테제를 지지하면서, 따라서 마주침이 야기한 응고로부터 발생한 법칙들의 필연성에는, 이 필연성이 좀더 커다란 안정성을 지닐 때까지도, 하나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이 따라붙는다는 것을 지지하면서 말이다. 이 불안정성은 우리가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어떤 것을 설명해 주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밥목적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에 거역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칙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법칙들이 영원히 유효하지 않고 한 시기에 대해 유효하다는 것(맑스는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 속에서 여기까지, 즉 각 역사적 시대는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이제 보게 되겠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않았다)이 아니라, 법칙들이 자신들을 지탱하는 우발적 토대를 드러내면서 이유없이, 즉 이해가능한 목적이 없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뜻밖에 일어나며, 주사위들이 불시에 테이블 위에 되던져지거나 카드패가 예고없이 재분배될 때, 요소들이 이 요소들을 불의의 새로운 형태들로 응도하도록 플어놓는 광기(니체, 아르토) 속으로 내닫게될 때, 이러한 돌발사태는 역사ㅡ개인들의 역사이든, 세계의 역사이든ㅡ의 거대한 질곡 해소, 거대한 탈구(脫臼) 또는 거대한 중단(유예)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어안이 벙벙하도록 만든다. 누구라도 여기서 개인의 역사 또는 세계의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한 개인을 창시자 또는 광인으로, 아니면 동시에 창시자이자 광인으로 만드는 폭로의 역사의, 기본적인 속성들 중 하나를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폭로는 우리에게 휘덜린, 괴테, 헤겔이 함께 내어날 때, 프랑스 혁명이ㅡ"세계정신"인 나플레옹이  예나의 헤겔의 창 아래로 행진할 때까지ㅡ발발하고 승리할 때, 지배계급의 배신으로부터 파리코뮌이 분출할 때,더구나 1917년 러시아에서 문화혁명이 폭발할 때 일어났다. 1917년  러시아, 거기서 정말 모든 요소들이 거대한 공간들 안으로 폭발해 나왔지만 그러나 지속적인 마주침은 산출되지 않았다. 1968년 5월 3일의 경우처럼, 이날 접합했어야 했던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긴 행렬들은 교차했으나 접합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얼마나 대단한 결과가 산출되었을 것인가! (...)
 
 - 『철학과 맑스주의ㅡ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지은이: 루이 알튀세르 · 옮긴이: 백승욱, 서관모 · 중원문화 · 2017년 · 원제 : Filosofia y Marxismo) p.7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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