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학자에게서 욕구란 효용이다. 소비를 목적으로한, 즉 재화의 효용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러저러한 특정 재화에 대한 욕구이다. 따라서 욕구는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재화를 통해 터음부터 이미 어떤 목표-끝에 행해지며, 선호(選好) 역시 시장에 공급되는 생산물의 선발에 의해 방향지어진다. 욕구는 결국 '지불능력이 있는 수요(유효 수요)'이다. 심리학자들은 조금 더 복잡한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들에게 욕구란 사물지향적이기보다 본능지향적이면서 생득적(生得的)이면서 불명확한 일종의 필연적인 성격을 지닌 '동기'이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사회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에게는 욕구ㅠ가 사회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개인은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본성에 따라서 그 욕구를 충족하려는 존재라는 인간학적 가설과, 소비자는 자유롭고 의식적이며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견해를 의심하지 ㅇ낳고 이러한 관념론적 가정을 기초로 욕구의 사회학적 역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고는 집단 내의 관계에서 끌어낸 순응 및 경쟁의 모델과 사회 전체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큰 문화모델을 등장시킨다. (...)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분석은 그 관념론적인 인간학적 가설을 문제 삼는 근본적인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갈브레이스에게서는 개인의 욕구가 인정될 수 있다. 인간 본성에는 경제우너리와 같은 것이 있어, '인위적인 가속장치'의 작용이 없다면 인간의 목적 및 욕구 그리고 그의 노력에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최대한의 만족이 아니라 개인 수준에서의 조화 있고 균형 잡힌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경향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극도로 다양화된 욕구충족 악순환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욕구 역시 조화 있는 사회 조직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완전히 공상적이다. (...)
옳은 명제는 "욕구는 생산의 산물이다"가 아니라 "욕구체계는 생산체계의 산물이다"라는 것이다. 욕구의 체계란 욕구가 각각 사물과 관련해서 일대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소비력으로서, 생산력의 보다 ㅇ리반적인 틀 속에서 전체적인 처분 능력으로 생산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전문기술 관리계급이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다. 생산의 질서는 향유(享有)의 질서를 자기 이익을 위해 '가로채는 것'이 아니라, 향유의 질서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생산력의 체계로 재조직하여 질서를 대신하는 것이다. 산업체계의 역사 흐름에서 이러한 소비의 계보를 추적할 수 있다. (...)
(소비)욕구는 체계의 요소로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개인과 사물의 관계로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 '내가 이것을 산 이유는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불이 타는 것은 연소(燃燒)가 있기 대문이라는 말과 똑같다. (...) 욕구와 충족에 대한 이러한 합리주의적 신화는 히스테리 증상이나 심신의학적 증상에 직면한 전통의학처럼 소박하고 무기력하다. 이점에 대해 설명해 보자.
사물은 대체될 수 있는 객관적 기능 영역 밖에서는, 그리고 그 명시적(明示的) 의미의 영역 밖에서는, 달리 말해서 사물이 기호가치를 지니는 암시적 의미의 영역 안에서는 다소간에 무제한적으로 대체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기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표시적 요소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상징의논리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논리에서도 사물은 이제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욕구와 더 이상 관련되어 잇지 않다. 바로 그 이유는 사물이 전혀 다른 것에 대응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사물은 의미작용의 무의식적이고 불안정한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어떤 병이 기관에 관한 것이면, 증상과 기관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도구로서의 사물의 경우 사물과 그 기능 사이에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히스테리성 또는 심신의학적인 전환에서 증상은 시호와 마찬가지로 자의적이다. 두통, 결장염, 요통, 구협염, 전신피로 등의 신체적 기표의 연쇄가 있는데, 증상은 이 연쇄를 따라 거닌다. 기호로서의 사물 또는 상징으로서의 사물의 연쇄가 있는데, 욕구가 아니라 욕망이 그 연쇄를 따라 거니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 (...) 증상이 나타나는 기관에만 전통적인 치료를 행할 때와 독같은 오류를 범한다. 그 기관을 치료하면 그 증상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 및 욕구의 세계는 보편화된 히스테리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이 전환 속에서 증상이 약해지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되는 것과 같이, 소비 속에서 사물은 또 하나의 언어가 거절당하고 다른 무엇인가가 되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된다. (...)
사물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원망(願望)에는 목적이 없다. 겉보기에는 대상과 향유에 쏠리고 방향잡혀진 소비행동이 사실은 욕망의 은유적 또는 우회적인 표현, 차이표시 기호를 통한 가치의 사회적 코드의 생산이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대응한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사물의 모음으 통한 이해관심의 개인적 기능이 아니라 기호의 모음을 통한 가치들의 교환, 전달, 분배라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기능이다.
소비는 향유의 기능이 아니라 생산의 기능이며, 따라서 물질의 생산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기능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또 전면적으로 집단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소비에 대한 올바른 견해다. (...) 소비는 기호의 배열과 집단의 통합을 보증하는 체계다. 따라서 소비는 도덕(이뎅로로기적 가치들의 체계)인 동시에 의사소통의 체계 즉 교환의 체계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사실 위에,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기능과 구조적 조직이 개인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무의시적인 사회적 강제에 따라서 그 개인들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하나의 이론적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익서은 숫자의 나열도 아니며 기술적인 형이상학도 아니다.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가설에 따르면 소비는 향유를 배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논리로서의 소비 체계는 향유의 부인(否認)이라는 기반 위에 확립된다. 그곳에서는 향유는 더 이상 합목적성, 합리적인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혀 아니며, 그 목적이 딴 데 있는 과정의 개인적 수준으로서의 합리화가 나타난다. 향유라는 것은 아마도 자율적이고 합목적적이며 자기목적으로서의 소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즐기지만, 그러나 소비할 때에는 결코 혼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견해는 소비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논의에 의해 교묘하게 유지되어온 소비자의 환상이다. 사람들은 모든 소비자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욘루되는, 코드화된 가치들의 생산 및 교환의 보편화된 체계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비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또는 미개사회의 친족체계와 마찬가지로 의미작용의 질서이다. (...)
- <소비의 사회>(장 보드리야르 · 문예출판사 | 1992년 · 원제 : La societe de consommation, 1970년) p. 9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