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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현대미학 강의』: 보드리야르 '역사의 종언', '예술의 종언'

by 이우 posted Apr 24, 2017 Views 24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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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록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지만, 보드리야르의 사유의 바탕에는 아직 정치경제학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령 그의 '시뮬라시옹' 개념은 은은하게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성' 개념을 배음으로 깔고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경제에서 생산은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를 지향한다. 그 결과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에서 독립하여 물신화한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가 화폐를 통해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거대한 물신화의 가상현실이라면, 자본의 재생산'은 곧 그 가상의 복제인 셈이다. 이 정치경제학의 명제가 보드리야르에게서는 '소비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라는 기호학적인 명제로 변용된다. 마르크스는 가치론을 기호학으로 만들기를 거부했지만, 보드리야르는 '기호학적 환원을 통해 사회를 이렇게 상징(기호)의 교환 체계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이미 생산 위주에서 소비 위주의 체제로 변모했다. 하지만 거기서 소비되는 것은 실물이 아니다. 오늘날 상품은 소비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상품은 사용가치가 마모되기 전에, 도중에 그대로 버려진다. 상품은 그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 상품과 다른 상품 사이의 '차이', 그것이 드러내주는 계층적, 신분적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상징으로 소비된다. 소쉬르가 말한 기표들 사이의 '차이'로서의 '가치(value)'라는 기호학적 개념은 여기서 유사 정치경제학처럼 기호를 소비하는 교환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속에서 사물 자체는 사라진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예술 역시 이 교환의 체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날 그것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기호로서 소비된다. (...)

  차이의 놀이가 그리하여 의미의 비결정성이 극에 달하면, 아예 의미가 사라지는 변증법적 역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차이의 생산이 극한에 달하면 그 반대물로 전화하여 오히려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비생산적 결과를 초래한다. 이때 차이의 생성은 극점을 지나 동일자의 무한증식으로 전락한다. 보드리야르가 끝없는 동일증식인 암(癌)과 클론을 현대사회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차이의 극한이 외려 차이를 지우고 동일자의 무한증식으로 전락하는 이 극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 '내파(implosion)'이다. 여기서 실재와 가상, 현실과 재현, 원본과 복제, 기의와 기표의 차이는 스스로 붕괴하고, 두 대립항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된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 세계 속에 이제 새로움은 없다. 새로운 것의 발생에 대한 기대로 없다. 발생한 것은 이미 발생했다. 모더니티의 기관차였던 '혁신'도 이제는 있을 수 없다. 새로운 것의 생산은 오래전에 코드에 따른 동일자의 무한한 복제가 되어버렸다. '계급'과 같은 사회학적 범주들도 내파되어 이제는 무의미하다. 계급의 범주도, 사회의 개념도 내파되어 무차별하고 무관심하고 냉담한 대중 속으로 사라진다. 이로써 '사회적인 것'의 존립은 불가능해지고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

  개별화 원리가 깨어지고 근원적인 일자(一者)와 합일하는 디오니소스의 황홀감처럼,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면 거꾸로 모든 개별적 가치들의 차이가 사라지는 '가치의 황홀경'이 도래한다. 보드리야르는 '내파'로 인해 현대사회가 바로 그런 상태에 도달했다고 본다. 오늘날 다른 가치들이 처한 이 일반적 운명에서 미적 가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하여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다른 가치들처럼 미적 거치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진단하며, 이 현상에 '초미적(transesthetique)'이란느 술어를 붙인다.

  "예술은 모든 것을 평범함에 이르게 하기 위해 환상의 욕망을 없애버렸으며 그 결과 초미적인 것이 되었다."

  뒤샹과 워홀 이후 예술은 스스로 범상해지기로 했다. 오늘날 예술은 의도적으로 무가치한 것, 무의미한 것, 범상한 것을 지향한다. 그반면 세계는 점점 더 미학화한다. "우리가 상업의 유물론을 넘어서 목격하는 것은 광고와 미디어와 이미지를 통한 모든 것의 기호술이다." 세계를 미학화하는 것, 세계를 이미지화하는 것, 세계를 기호학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서구의 중대한 기획이 된 오늘날, "가장 부차적인 것과 가장 평범한 것, 그리고 가장 외설적인 것까지도, 미학적으로 논의되고 문화와 관련된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예술의 종언' 테제를 끄집어낸다. 이렇게 "세계 전체가 미적으로 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예술과 미학의 종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술이 범상한 것이 되고, 미적 가치가 예술 밖의 모든 것으로 확장될 때, 미적인 것은 비미적인 것과의 변별성을 잃고 사라지고, 예술은 불필요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종언은 열역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열사망(熱死亡)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 게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 <현대미학 강의>(진중권 · 아트북스 · 2013년) p.27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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