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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생활의 역사』 : 사생활의 경계와 공간(응접실·사생활·공적 생활·공간의 분절·사회적 성층 작용·노동)

by 이우 posted Nov 21, 2019 Views 2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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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사생활의역사2.jpg


  (...) 사생활은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현실이다.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므로 사적 영역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선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리고 사생활은 공적 생활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사생활의 역사는 무엇보다 사생활에 대한 정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세기 사회에서 사생활공적 생활의 구분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사생활의 영역은 내용과 외연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어 왔는가? 이러한 질문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사생활의 역사는 사생활에 대한 경계 설정의 역사로 시작된다.

  이러한 질문들은 사생활과 공적 생활의 구분이 모든 사회 계층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예를 들어 벨 에포크*부르주아 계급에게 '사생활의 담'이 이 두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담뒤에 있는 사생활은 재산, 건강, 풍속, 종교 등 여러 면에서 가정생활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담 뒤에 있는 사생활은 재산, 건강, 풍속, 종교 등 여러 면에서 가정생활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예컨대 자식의 결혼을 앞둔 부모의 경우 상대방 가족에 대해서는 공증인이나 사제에게서 은밀하게 '정보를 캐내는' 반면 집안의 골칫덩어리인 삼촌이나 결핵을 앓는 누이, 행실이 나쁜 혀, 임대료 수입 등에 대해서는 드러내기를 꺼렸다. 조레스**는 딸의 성대한 성체배령식을 비난하는 같은 사회당 의원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존경하는 의원님, 댁의 사모님이나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요. 제게 그러지 마시고." 이런 식으로 공적 생활과 사생활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일련의 규칙과 금지들로 구체화되었다. 예를 들어 스타프 남작 부인***이 언급하는 규칙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웃과 왕래가 드물수록 더 존경받고 존중받는 법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은 기차칸이나 다른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는 법이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함께 여행하는 친척이나 친구가 있더라도 속내 이야기를 하는 법이 아니다."(Baronne staffe, Usage du monde. Paris, Victor-Havard, 1983, pp. 342,317, 320) 그리하여 상층 부르조아의 아파트나 저택에서는 응접실과 다른 방들이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공적인 용도로 쓰인 응접실은 보여주기 위한 방, 즉 가족 스스로 '남이 봐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것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시선으로부터 감추고 싶은 것은 일절 금지되었다. 이처럼 응접실에는 본래적 의미의 가족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방문객을 맞고 있을 때 아이들을 그곳에 들여서는 안되며, 가족사진은 치워야 한다고 스타프 부인은 말한다. 게다가 응접실은 아무에게나 개방하는 곳이 아니었다. 상류 사회의 부인들은 따로 '손님 맞는 날'을 두었으며, 여류 명사의 집을 방문하려면 소개장이 필요했다. 이처럼 응접실은 본래적 의미의 사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의 이행 공간이었다.


공간의 분절.jpg


  (왼쪽 사진)1912년의 하층 부르조아 계층의 거실. 물건들이 비좁게 배치되어 있다. 한쪽 구석에는 고양이가 누워 있다. 여주인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남자의 자리는 어디일까? (오른쪽 사진)나폴리의 골목. 안도 바깥도 없다. 바깥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벨 에포크의 부르조아 계급이 이처럼 분명하게 구분된 사생활의 영역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다른 사회 계층들까지 반드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농민, 도시의 서민들은 생활 여건상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생활의 일부를 감추어 '사적인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장 폴 사르트르를 따라 나폴리 서민 지구의 거리를 걸어보자.

  "모든 집의 1층에는 길에 면한 채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만 방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렇게 작은 방마다 한 가족이 산다. [......] 이 방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일도 한다.  [......]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온다. 절약하기 위해서 말이다. 등잔불을 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시원한 바람을 쐬고, 어쩌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 편안히 이야기 나누고 싶은 심정에서 나오기도 한다. 의자와 탁자를 바깥으로 끌어내기도 하고 문지방에 걸터앉기도 한다. 반쯤은 안에 있고 반쯤은 바깥에 있는 셈이다. 삶에서의 주요한 활동은 바로 이 중간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더이상 안이나 바깥이 존재하지 않으며 또 거리가 방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리를 친밀한 냄새와 물건들로 채우는 것이다. 또 자신들의 역사로도 채운다.  [......] 바깥은 유기적으로 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  나는 어제 길에서 밥을 먹는 부부를 보았다. 방의 침대 옆 요람에는 아기가 잠들어 있고, 탁자에서는 큰딸이 등잔에 의지해 숙제를 하고 있다.  [......]  누가 병들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것은 곧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며, 누구나 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J.P Satre, Lettres au Castor et a quelques, Paris, Gallimard, 1983, t.I, p.79)

  이처럼 사생활이 나폴리 민중과 벨 에포크의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동일한 의미와 내용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두 나라의 문화 전통이 너무나 다르니 말이다. 예를 들어 나폴리의 거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안팍의 상호 침투는 지중해 문화의 한 특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프랑스 남부 도시들에서도 이러한 문화가 발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루베의 쿠레****, 광산 지역의 광부 사택, 리옹의 크루아루스 지역의 건물들 혹은 베리나 로렌 지방의 촌락에 사는 주민들이 사생활을 이웃의 시선으로부터 차단할 수 있는 담을 쌓을 수 없었던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이러한 지역들에서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서로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어떻게 보면 사생활을 갖는다는 것은 계급적 특권, 대저택에서 임대료 수입으로 사는 부르주아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노동 계급에서 사생활과 공적 생활은 다양한 형태로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중략)

  20세기 말의 노동자나 농민들이 누리게 된 사생활은 세기초의 부르주아들이 향유했던 사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 말이다. 동시에 이처럼 서서히 구성되어간 사생활의 영역 밖에서 형성된 것, 즉 공적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도 새로운 규준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사회 전체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점차 세심하게 구분함에 따라 공적 생활과 사생활의 모습도 달라졌다. 둘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둘의 경계선이 이동하고 또 분명해짐에 따라 내용 역시 바뀌게 되었다. (...)

노동.jpg


  20세기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노동영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것은 이중적으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공간의 분리특화가 이루어졌다. 노동 장소는 더 이상 가정 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의 분화는 동시에 규범의 분화를 가져 왔다. 가정은 지금까지 그곳에서 이루어지던 노동과 연계되어 있던 규칙들에게서 해방되었다. 동시에 노동의 세계는 사적인 차원의 규범이 아니라 집단적 계약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노동 장소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오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자기 집에서 하는 노동(자가 노동)과 다른 집에서 하는 노동(타가 노동)은 크게 달랐다. 예를 들어 젊은 처녀에게 일을 하지 않고 부모 집에서 사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굳이 일을 해야 한다면 부모 집에 살면서 일하는 편이 낫다. 가령 도급제로 품삯을 받고 일하는 봉제공이 그러했다. 젊은 처녀가 공장이나 작업장에 다니거나 혹은 남의 집 하녀로 일하러 나가는 것은 하층 계급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20세기 초에는 프랑스인 세 명 가운데 두 명, 확실하게는 절반 이상이 자기집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세기말인 지금에는 그와 반대로 모든 프랑스인들이 집밖에서 일을 하고 있다. 매우 커다란 변화이다. (...)

  - 『사생활의 역사 5 - 제1차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미셸 페로,도미니크 슈나페르, 페린 시몽-나움, 레미 르보, 소피 보디-장드르,크리스티나 오르팔리, 키아라 사라체노, 잉게보르크 베버-켈러만, 일레인 타일러 메이 · 김기림 · 새물결 · 2006년 · 원제 : Histoire de la vie privee: De la Premiere Guerre mondiale a nos jours) p.37~46



  ...................................................

  *벨 에코프(La belle epoque)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파리는 과거에 볼 수 없던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이후 외교나 경제면에서쇠퇴와 압박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한없는 애차심을 갖고 이 시대를 '좋은 시절'이라고 불렀다.
  **조레스(Jean Jaures) : 1859~1914년 프랑스의 사회주의 지도자로 프랑스 사회당을 결성했다.
  ***스타프 남작 부인 : 그녀가 1899년에 출판한 <현대사회의 예법>은 근대 이후 그러한 장르의 책으로는 최초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쿠레(Couree) : 하나의 마당에 여러 집들이 면해 있는 서민 주거의 한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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