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노자의 논의에서 나를 또한 매혹한 것은 그의 철학적 전략이었다. 자크 데리다는 철학상의 전략에 대해 많이 말했는데, 그는 전적으로 옳다. 왜냐하면 모든 철학은 적이 장악하여 진지를 구축한 이론적 지역을 포위하기 위해 그 전략적 목표와 전략적 공격을 통해 마치 요새와 철곽들처럼 테제들을 배치하는 이론적 전투의 배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신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신에서 시작했지만, 실제 그는 무신론자였다(나는 지독한 그의 적들의 전통에 따라 이를 믿는다). 최고의 전략가인 그는 견고한 적의 사령부를 포위하는 데서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마치 자기가 자기 자신의 적인 양 거기 자리잡았고, 따라서 그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협의를 받지 않으면서, 마치 점령군의 대포를 점령군 자신을 향해 돌려놓는 것처럼 저의 이론적 요새를 완전히 돌려놓은 방식으로 재배치하였다. 이 재배치를 이루는 것은 첫재 '자기 원인'인 신과 동일한, 따라서 외부가 없는 무한한 실체에 대한 이론이며, 둘째 그 자신을 무한한 양태들 속에서 실행하며 이 무한한 양태들을 유한한 양태들의 무한성 속에서 실행하는 무한하고 평행하는(동일한 연관 속에서 사물들의 질서와 관념들의 질서가 식별된다) 속성들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실행하는 신의 무한한 전능이다. 신은 무한한 실체, 즉 신을 그것으로부터 구분하기 위하여 신과 비교할 타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을 독특하다고 부를 수 조차 없는, 따라서 외부가 없는, 결코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이 없이, 따라서 세계나 우주라는 고전적 외부 없이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는, 무한한 실체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이렇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지반을 장악한 앞선 테제들에 의해 보호되고 방어되는 지역을 포위하고록 되어 있는 그들의 테제들의 세력을 항상 어떤 외부로부터 대치시킨다. 군사적으로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이 혁명적인 철학적 전략에 필적할 만한 것은 오직 도시게릴라전 이론과 마오가 애호한 농촌에 의한 도시포위 이론, 또는 마키아벨리의 몇몇 형태의 정치·군사전략, 특히 그의 요새 이론 뿐이다. 나는 이 유례 없는 대담성에 매혹되었다. (중략)
그는, 항상 모든 기존 질서(과학상의 기존 질서이든, 도덕적인 기존 질서이든, 종국에는 진리가 보증하는 다른 요소들의 연계에 의한 사회적인 기존 질서이든)의 보증으로서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의미와 모든 진리의 기원적 토대(코키토)에 대한 모든 이론을 거부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명목론자였다! 나는 맑스 안에서 명목론이 유물론으로 가는 '왕도'라는 것을 읽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명목론이 유물론으로 가는 왕도가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론이라고 믿는다. 스피노자는 어떻게 나아갔는가?
그는 결코 의미의, 진리의, 또는 모든 진리의 가능성의 조건들의 선험적 발생을 그려내려 하지 않고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확증의 사실성 속에 자리 잡았다. '우리는 참된 관념(idee)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진리의 규준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초기에 소실된 기원적 토대로서의 함수로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유클리드는 다행히, 신만이 왜 그랬는지 알겠지만, 보편적 사실적 개별성으로 실존했다는 사실, 후설이 바랐던 것처럼 "기원적 의미들을 재활성화시키는 것"은 문제조차 아니라는 사실, 사고의 역능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실제 결과 속에서, 그 생생한 결과 속에서 사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사실적 명목론은 관념에 의해 지시되는 것과 관념, 사물과 그 개념, 짖는 개와 짖지 않는 개념, 둥그런 원과 원이라는 둥글지 않은 관념 등 사이의 저 유연한 구분, 모든 개념에 내재적인 그 구분 속에서 천재적으로 발견된다. 이렇게 해서 제1종의 인식이 구분에서부터 점점 더 더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가 제3종의 인식에 이르는 이행, 다시 말해 상상의 세계(monde-inagination)에서부터 이상적 부적합성에 대한 개념의 세계로 나아가 처음부터 모든 유한한 양태 속에 실존하지만 처음에는 상상 속에 매여 있으며 상상 속에서 오인되는 보편적 개별성의 직관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이행이 항상 실제로 열리고 정당화되었다.
비범한 이론 하나를 또 추가해야 하는가? 그렇다. 바로 저 유명한 속성들의 평행 위에 구축된 신체 이론이 그것이다. 이 신체(우리의 유기적 물질적 신체), 우리가 그것의 "모든 역능을 인식할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그것은 코나투스(conatus)의 본질적 역능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아는, 그런 신체 말이다. 이 코나투스의 본질적 역능은 "멘스(mens)'라는 신체의 대응물의 상태인 코나투스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mens'는 번역 불가능한 단어이다. 'mens*'는 ame(영혼)도 esprit(정신)도 아니며, 오히려 사유의 역능, 사유의 힘(fortitudo), 사유의 능력(virtus)이다. 스피노자는 이 신체를 역능(potentia)이나 비루투스(virtus)**로, 즉 힘이지만 동시에 관용(generositas)***인 것으로, 다시 말해 세계를 향해 열린 약동(elan)으로, 무상증여로 여겼다. (중략)
이 신체 이론이 나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상상해 보라. 나는 확실히 거기서 나만의 생생한 경험을 재발견하였다. 처음에 엄청난 두려움과 희망에 매여 살았으나, 내 할아버지의 사회적 노동, 그리고 나중에는 포로수용소의 사회적 노동의 훈련을 통해서 내 경험의 힘들을 재구성하고 영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나는 그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우리는 이전에는 상상적 주관성의 예종 속에서, 따라서 노예상태 속에서 분할되어 있고 죽어 있던 자기 신체를 이처럼 해방하고 재구성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 재조직된 해방으로부터 자유롭고 강력하게 사고하는 것을, 따라서 자기 신체와 더불어, 신체 그 자체 속에서, 신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사고하는 것을 끌어내기를 원했다. 이 모든 것이, 말하자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내가 체험했고 영원히 나의 것이 된 하나의 경험과 하나의 현실로서 나를 매혹하였다. 사람들이 잘 말했듯이, 사람들은 거짓이든(상상적인 것에 대한 환상의 인식) 참이든(상상적인 것의 비르투스에 대한 직관적 인식, 제3종의 인식) 자기가 승인(reconnait)하는 것만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모든 초월적인 보증(신) 또는 선험적인 보증(나는 생각한다)을 제거한 사실적 필연성에 대한 이 경탄스러운 철학 속에서 나의 오래된 나의 정식 하나를 다시 찾아냈다. 나는 정확히 얼마나 가치 있을 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은유 하나를 사용하여, 관념론 철학자란, 그가 타는 열차가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 미리 아는 사람, 즉 출발역과 종착역(다시 말해, 글자 그대로 여행의 목적)을 미리 아는 사람과 같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유물론자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달리는 기차(세계의 흐름, 역사의 흐름, 그의 삶의 흐름)을 잡아타는 사람이다. 그는 우연히 마주친 기차에 올라타서, 거기서 객차의 실제 설비를 발견하고, 그의 주위를 실제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은 누구인지, 이 동료들은 어떤 대화를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환경이 표시된 어떤 언어를 말하고 있는지 발견한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마치 스피노자의 사고 속에 암시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갔다. 그래서 나는 즐겨 디츠겐을 인용했다. 디츠겐은 하이데거에 앞서 철학은 "숲길 중의 숲길"이라고 말했는데, 하이데거는 분명히 이 정식을 몰랐다. 나는 이 정식을 오지에(J.P. Osier)가 훌륭히 번역한 레닌의 글에서 발견했다. "숲길 중의 숲길"이란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길들의 길'이다. 그후 나는 이전에 이미 헤겔이, 숲과 들 속을 전진해 감에 따라서, 자신의 길을 여는 '혼자 뻗은 길'이라는 비상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얼마나 우연한 마주침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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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s(멘스)는 전통적으로 ame(정신, 영혼)으로 번역되어 왔고, 보통 esprit(정신)으로 번역되고 있다. 마슈레는 psychisme(심적 작용, 정신 작용)이 스피노자의 가장 정확한 번역어라고 한다.
**이탈리아어 virtu의 어원이 라틴어 virtus이다. 다의적이어서 해석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virtus는 더욱 그렇다. 『에티카』의 용어법을 보면 그것은 힘, 능력, 또는 역능, 강함, 덕, 감정 등의 뜻을 동시에 갖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적인 힘인 동시에 일종의 도덕적인 힘이다.
***관용(generositas)은 "그것으로써 각자가, 오로지 이성의 명령 아래, 다른 모든 사람을 돕고 그들을 우애로 결합시키려 노력하는 욕망"이다.
- 『철학과 맑스주의ㅡ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지은이: 루이 알튀세르 · 옮긴이: 백승욱, 서관모 · 중원문화 · 2017년 · 원제 : Filosofia y Marxismo) p.161~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