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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주권의 문제 · 홉스의 리바이어던

by 이우 posted Aug 19, 2018 Views 1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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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은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어떻게 전쟁이 권력관계의 분석틀로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겠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곧장 만나는 하나의 이름이 있다. 홉스의 이름이 그것이다. 그는 일견 전쟁관계권력관계의 원칙과 기초로 삼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홉스의 말에 의하면 질서의 밑바닥에, 평화의 뒤에. 법률 밑에, 그리고 국가를 형성하는 자동인형인 주권, 다시 말해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순간, 거기에는 단지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쟁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전쟁, 매순간 모든 차원에서 전개되는 전쟁,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있다. 홉스는 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국가 탄생기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 추적하여 국가 형성 이후에도 조직 간의 틈새 속에서, 그리고 국가의 경계선이나 국경선에서 극서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위협을 가하는 것을 본다.

  여러분들은 그가 인용한 영구 전쟁의 세 가지 예를 기억할 것이다. 첫째, 비록 문명화된 국가에서도 집을 떠나는 여행자는 자기 방문을 자물쇠로 잠그는 것을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도둑질하는 자와 도둑 맞는 자 사이에 수행되는 영구 전쟁이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그는 아메리카 대륙의 숲 속에서 발견되는 한 미개 종족을 예로 든다. 그 종족의 체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유럽 국가에서도 한 국가와 다른 국가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칼을 치켜들고 마주 서서 상대방을 노려보는 두 사람의 관계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국가가 형성된 후에도 전쟁은 우리를 위협하고, 전쟁은 항상 존재한다. 거기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우선 국가 이전에 존재하고, 국가가 원칙적으로 그것을 끝내려 하는 이 전쟁은 무엇이란 말인가? 국가가 자신의 역사 이전인 미개상태 속으로, 그리고 어떤 애매한 경계선 밖으로 끊임없이 밀어내려 하지만, 그러나 끈질기게 남아 있는 그 전쟁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전쟁은 어떻게 국가를 만들어내는가? (...) 홉스가 국가 이전에, 그리고 국가 형성의 원칙으로 묘사한 이 전쟁은 그러니까 무엇인가? 그것은 약자와 강자, 과감한 사람과 소심한 사람, 용감한 자와 비겁한 자, 위대한 사람과 보잘 것 없는 사람, 당당한 미개인과 소김한 목동들 사이의 전쟁인가? 직접적 자연적 차이에 기인하는 전쟁인가?

  홉스의 전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인 그 최초의 전쟁은, 평등에서 생겨나 평등의 요소 안에서 진행되는 평등의 전쟁이다. 전쟁은 다르지 않음, 즉 불충분한 차이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사실 이것은 홉스의 말인데, 만일 사람들 사이에 역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간격이 있다면 전쟁은 즉각 봉쇄될 것이다. 만일 가시적이고 뚜렷한 엄청나게 커다란 차이들이 있다면 결과는 둘 중의 하나이다. 우선 강자와 역자 사이의 대결이 있겠지만, 이 대결과 이 실질적인 전쟁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승리로 결판이 날 것이다. 이때 승리는 강자의 힘 때문에 결정적인 것이 된다. 두번째로는 실질적인 대결이 없을 것이다. 약자가 자신의 허약함을 감지하여 알고,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대결을 해보기도 전에 포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소 홉스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만일 자연스러운 차이가 있다면, 거기에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의 지속을 배제하는 최초의 전쟁에 의해 힘의 관계는 처음부터 고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와 반대로 이 힘의 관계는 약자의 소심함 그 자체에 의해 잠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하튼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거기에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차이는 평화를 만든다.

  그런데 다르지 않음의 상태, 즉 불충분한 차이의 상태 안에서, 또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가 미미하고 사소하고 사라질 듯 불안정하여 질서도 없고 구분도 없을 때, 모든 자연상태의 특징인 이 사소한 차이의 무정부상태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남들에 비해 약간만 허약한 사람은 자신이 굴복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느낄 정도로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니까 약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강자는 어떤가 하면, 남들보다 약간 강할 뿐인 그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경계를 늦출 만큼 그렇게 붕분히 강하지 않다. 자연적인 차이 없음은 그러니까 불안정과 위험·위협을, 다시 말하면 상호간의 대결의지를 야기시킨다. 전쟁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힘의 원초적인 관계 속에 들어 있는 그 불안정성이다.

  그러나 이 전쟁상태는 정확히 무엇인가? 약자도 역시 자기가 이웃만큼 강하게 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자는 자기가 타인보다 더 약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특히 타자가 계략이나 기습·연대를 할 경우 자기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한편에서는 전쟁을 포기하려 하지 않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쟁을 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런데 전쟁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가지 조건에서만 그것을 피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전혀 그것을 포기할 대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함으로써 전쟁을 포기할 태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전쟁을 개시하려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열세가 아닐까 의심하게 하여 결국 전쟁을 포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아주 미미한 차이와 불확실한 대립에서부터 시작된 이런 관계 안에서 힘의 관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은 세 계열의 요소들 사이의 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표상의 계산이다. 나는 타인의 힘을 상상하고, 또 타인이 나의 힘을 상상한다는 것을 상상한다. 두번째로 의지의 과장적이면서도 뚜렷한 표출이다. 자신이 전쟁을 원하고 있다는 것, 결코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바를 확고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세번째는 교차적인 위협의 전술을 쓰는 것이다. 나는 전쟁을 너무나 무서워하므로 네가 나만큼 전쟁을 더 무서워할 때만 나는 조용히 있을 것이다라는 위협 말이다.

  결국 홉스가 묘사했던 이런 상태는 전혀 힘들이 직접적으로 격돌하는 비인위적·자연적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실제적인 힘들의 직접적인 관계의 질서가 아니다. 홉스가 말하는 최초의 전쟁상태 안에서 서로 만나 대결하고 교차하는 것은, 무기도 아니고 주먹도 아니며, 광포하게 마구 날뛰는 양생의 힘도 아니다. 거기에는 표상들, 현시들, 기호들, 그리고 과장적·계략적·허위적인 표현들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미끼들이 있고, 반대로 뒤틀려진 의지들이 있으며, 확신감으로 위장된 불안감이 있을 뿐이다. 이거은 표상들이 교환되는 무대이고, 그 비확정성이 어디까지나 잠정적일 뿐인 두려움의 관계이다. 요컨대 이것은 실질적인 전쟁이 아니다. 결국 살아 있는 개인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동물적 야만상태는 결코 홉스가 말하는 전쟁상태의 첫번째 성격이 아니다. 전쟁상태의 성격은 자연스러운 평등상태인 경쟁상태를 끊임없이 조정하는 일종의 외교이다. 이것은 정확히 홉스가 '전쟁상태'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질적인 전투와 싸움만이 전쟁은 아니다. 전투상태로 대립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분히 확인되는 시간적 공간―이것이 전쟁상태다―도 전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 탄생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이 상태―이것은 힘들의 작접적인 대치나 전투가 아니라, 표상들 상호 간의 어떤 작용의 상태이다―를 결정적으로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와 과정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뭔가가 안정감을 주지 못하고, 차이를 고정시키지 못하며, 어느 한편에 무게를 실어주지 못할 때 정교한 계략 및 뒤섞인 계산과 함께 작동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영원한 토대이다. 그러므로 홉스에 있어서 최초의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표상들의 게임일 뿐인 이 상태가 국가, 리바이어든, 주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두번째 질문에 홉스는 창설된 주권획득된 주권이라는 두 범주로 구분함으로써 답한다. (...) 창설된 공화국획득된 공화국이 있고, 각기의 공화국 안에도 두 형태의 주권이 있어서 결국 창설된 국가들, 획득된 국가들, 세 타입, 세 형태의 주권이 각기 권력형태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창설 공화국을 예로 들어보자. 다시 말하거니와 전쟁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과 표상이 작동하고 있는 이 전쟁상태를 중단시키기 위해 전쟁상태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물론 사람들이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그들 권리의 일부, 또는 권력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또는 몇 사람에게 양도하는 결정은 물론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권리를 이양하는 결정을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누군가에게 전체적, 혹은 전적으로 그들을 대표할 권리를 부여하려는 결정을 내릴 뿐이다. 개인에 귀속된 어떤 것의 위임 또는 양도가 아니라, 개인 그 자체를 대리하는 것이다. (...) 홉스가 말했듯이 "그렇게 형성된 주권은 만인의 성격을 갖는다." (...)

  이번에는 공화국의 다른 형태, 즉 그 어떤 공화국에도 생길 수 있는 다른 일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거은 획득 메커니즘이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전혀 다른 것, 심지어는 정반대의 것처럼 보인다. 획득된 공화국의 경우에는 주권이 실질적이고 역사적이고 즉각적인 힘의 관계에만 기초해 있는 듯이 보인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최초의 상태가 아니라, 정녕 전투 그 자체를 상정해야 할 것이다. (...) 이 나라의 군대는 패하고 흩어져 그 주권은 파멸되고, 적군이 영토를 차지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처음부터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진짜 전투, 진짜 힘의 관계를 가진 진짜 전쟁이 바로 이것이다. 승전국과 패전국이 있고, 패전국의 운명은 승전국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 승전국이 패전국 국민들을 살려두었다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패전국 국민들을 살려주거나, 혹은 그들에게 잠정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게 했을 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패전국의 국민들은 승리자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힘의 관계를 역전시키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패배가 잠정적으로 중단시켰던 실질적인 전쟁 속에 다시 놓이게 된다. 아니면 그들은 사실상의 죽음을 택하거나, 전쟁을 다시 하지 않고 복종하여 상대방 국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하고, 국토를 승리자에게 할양하거나 전쟁보상비를 지불하기로 합의한다. 이것이야말로 전적으로 전쟁에 기초한, 그리고 그 전쟁의 효과가 연장되는 평화 속에서의 지배관계이다. 지배일 뿐 주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지 않다고 홉스는 말한다. 이것도 여전히 주권의 관계라는 것이다. 왜? 왜냐하면 패배자가 생명과 복종을 택한 순간부터 그들은 그것 자체로 주권을 다시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복자를 그들의 대리자로 삼았고, 전쟁이 무너뜨린 그 사람 대신 다른 군주를 새로 세운 것이다. (...)

  아주 이상하게도 홉스는 이 두 형태의 주권―획득과 창설의 주권―에 덧붙여 제3의 통치권을 내세운다. 그것은 획득의 주권과 아주 흡사하고, 전쟁이 끝날 무렵 또는 패배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또 다른 형태의 주권은 어린아이를 그 부모에게 이어주는 것과 같은 그런 주권이라는 것이다. (...) 아이는 그의 양친,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어머니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오로지 원시적인 욕구·울음·공포 등의 표현 이외의 다른 의지를 표시할 수 없는 수 년 동안 아이는 자발적으로 자기 양친, 자기 어머니에게 복종하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정확히 어머니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신의 전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의 전권에 동의하는 아이와, 패배 끝에 승리자의 전권에 동의하는 패배자 사이에는 아무런 성질의 차이가 없다고 홉스는 말한다. 절대권력의 형성에 결정적인 것은 의지의 질이 아니고, 그 표현 형태나 수준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자 한다. 요컨대 목에 칼이 대어졌는가, 혹은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잇는가 없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의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를 원하는 근본적인 의지가 실제로 있을 때, 거기에서 주권이 생겨난다.

  따라서 주권은 의지의 한 근본적인 형태에서부터 형성된다. 그리고 이때 그 형태가 어떠한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의지는 공포와 연결되어 있고, 주권은 결코 그 위에서, 다시 말하면 강자나 승리자·양친의 결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주권은 언제나 밑에서부터,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다. 그래서 공화국의 커다란 두 형태 사이에 보이는 단절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메커니즘이 나타난다. 합의에 의해서건 항상 의지·공포·주권이라는 똑같은 시리즈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암묵의 계산이나 폭력관계, 또는 자연적인 사실, 그 어느 것에 의해서 시동되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 여하튼간에 주권은 세워진 것이다.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는 다음과 같은 담론의 전선(戰線)이 있다. "실제로 싸웠느냐 아니냐, 혹은 당신이 패배했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국가 형성의 자연스러운 상태나, 혹은 좀더 자연스러운 부모 자식간의 애정 어린 관계에서나 피지배자에게 가해지는 메카니즘은 똑같은 것이다." (...)

  홉스의 담론 상대는 분명하고 명확한 어떤 이론이 아니고, 적수 혹은 논쟁 상대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홉스가 애써 감추려고 하지만 결코 감출 수 없는, 그의 말해지지 않은 부분도 아닐 것이다. 홉스가 글을 쓰던 당시에 그의 논쟁의 적수라고 불릴 만한 어떤 것은 없었고, 그의 전략적인 상대는 없었다. 다시 말하면 반반해야 할 어떤 담론의 내용이 아니라 단지 어떤 담론적 작용이었으며, 어떤 정치적·이론적 전략이었다. (...) 그러니까 홉스가 반박이 아니라 제거와 기능박탈을 원했던 그 전략적 상대는 정치투쟁 안에서 역사적 앎을 작동시키는 한 방법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리바이어던의 전략적 상대는 전쟁과 침략·약탈·점유침탈·횡령·착취 등에 관련된 역사적 앎을 당대의 투쟁에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관행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한 마디로 말해 홉스가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정복의 문제, 혹은 정복의 문제를 역사적 담론과 현실 정치 안에 끌어들리려는 경향이었다. 리바이어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적수는 바로 정복이었다. 모든 순응주의적 법학자와 철학자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잔인한 국가주의자이며, <리바이어던>의 책 표지에 옆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체구에 치켜든 검과 손에 지팡이로 왕을 대신했던 이 무서운 사람은 보수주의자였다. 그를 격렬하게 비난했던 철학자들도 사실 그를 깊이 사랑했고, 가장 소심한 겁쟁이들도 그의 냉소주의에 매혹당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도처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척하면서 홉스의 담론은 사실상 그 정반대의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이건 아니건, 패배건 아니건, 정복이건 합의건 모든 것이 똑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당신들을 대리하는 주권을 구성한 것, 그것은 바로 신민들인 당신들이고, 당신들이 그것을 원했다. 그러므로 역사의 반추를 통해 공연히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 정복의 끝에는 언제나 계약이 있고, 신민들의 겁먹은 의지가 있다."

  그러나까 정복의 문제는, 상류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전쟁 개념에 의해, 하류에서는 전쟁이 끝날 무렵 겁먹은 패배자들의 법률적으로 유효한 의지에 의해 해결되었다. (...) "우리는 정복자고, 당신들은 정복당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방인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당신들은 하인들이다." 홉스가 모든 전쟁과 모든 정복의 뒤에 계약을 다시 놓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이론을 보존했던 것은 바로 이 투쟁과 양구 내전의 담론을 교묘하게 회피헸기 때문이다. 법철학이 나중에 마치 일종의 보상인 것처럼 정치철학의 아버지라는 원로원적 칭호를 홉스에게 부여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

  홉스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하여 <리아이어던>의 높은 장벽을 세웠던 그 담론은 영국에서, 그리고 두 현상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것 같다. 두 현상이란 첫째, 절대왕정과 귀족계급을 동시에 겨냥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정치투쟁이 일찌감치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두번째 현상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정복에 의한 분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대다수의 하층민까지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066년 헤이스팅스에서 일어난 기욤(영어로는 얼리엄)의 노르망디 정복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국의 제도 안에, 혹은 정치적 주제의 역사적 체험 안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아주 노골적으로 권력의 의식(儀式)에서 나타났다. 왜냐하면 헨리 7세, 다시 말해서 16세기초까지 왕조의 기록은 영국 왕이 정복의 권리에 의해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왕은 노르망디 정복 권리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조항은 헨리 7세와 함께 사라졌다. 이와 같은 정복의 흔적은 그 수행과 과정이 프랑스어로 진행되고, 하급재판소와 왕실 재판소 사이의  갈등이 엄연히 상존했던 법의 집행에서도 여전히 존재했다. (...) 중세 영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생겨났다. "우리는 우리의 법을 원한다. 우리의 언어로 쓰여지고, 저 아래, 즉 왕의 법규와 대립하는 일반 백성의 법에서부터 시작되는 그런 법을 원한다."

  정복의 기억은 이질적인 두 전설의 현존과 중첩·대결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 첫번째는 원래 민중 설화이고, 신비주의적 신앙(해럴드 왕의 재림)이며, 성스러운 왕들에 대한 숭배(예컨대 에드워드 왕에 대한 숭배)이고, 로빈 후드 이야기 같은 색슨족 전설의 총체이다. 이 신화적이고 민중적인 것 앞에 노르망 궁정에서 발달한 귀족적인, 거의 왕조적인 신화의 총체가 튜더 왕가의 절대왕정이 전개되던 16세기에 다시 되살아 났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아서왕 전설에 속하는 것이다. (...)

 -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976,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미셸 푸코 (지은이), 박정자 (옮긴이) · 동문선 · 1998년 · 원제 : Il Faut Defendre La Societe, 1997년) p.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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