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속, 즉 나눌 수 없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스스로를 나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스스로를 나누면서 본성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본성을 바꾸는 것이 곧 잠재적인 것 또는 주체적인 것을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필요한 정보를 발견하는 것은 특히 <창조적 진화>에서이다. 왜냐하면 <창조적 진화>에서는 생물학이 그 결과를 통해서 우리에게 차이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의 힘을 빌려서 우리는 정도와 강도, 이타성과 모순에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개념을 추구한다. 그 이유는 차이의 개념 그 자체는 비록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차이는 생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 그것은 곧 차이의 과정인 것이다.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손은 발생학적 차이보다는 종들의 차이화, 즉 진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다윈(Darwin) 자신은 비록 생기적인 차이에 대해서 거짓된 개념을 내어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관념 속에서 차이의 문제와 생명의 문제가 동일시되어 같은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다윈에 이르러서였다. 베르그손은 여기에서 기계론에 맞서서 생기적인 차이는 내재적인 차이임을, 그리고 내재적인 차이는 결코 단순한 결정으로 여겨질 수 없음을 보인다. 왜냐하면 결정이라는 그 자체가 우연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아니면 적어도 결정은 그 어떤 원인이나 목적 또는 우연과 더불어서만 결정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결정은 그 어떤 존속하는 외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수의 결정이 모여서 이루는 관계 또한 오로지 연합 또는 합산으로부터만 유래한다. 그러나 생기적인 차이는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결정에 반대되는 것, 또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비결정 그 자체이다. 베르그손은 언제나 생명을 가진 형식들이 지니고 있는 예측이 불가능한 성격을 강조한다. '비결정된 것들, 나에게 있어 이것들은 예측이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베르그손에게 있어서 예측이 불가능한 것, 비결정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자 우연한 것에 대한 부정이다.
사람들은 차이를 단순한 결정으로 넘겨버린다. 또는 차이를 생명에 대하여 여전히 우연적인 것으로 취함으로써 사람들은 차이를 그 어떤 것의 기능에 따른 필연적인 차이로 여긴다. 그러나 생명과 관련해서 볼 때, 변화의 경향이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변화 그 자체 또한 우연한 것이 아니다. 생의 약동*은 "변화의 심오한 원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차이란 결정이 아니라 생명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 놓인 그 어떤 차이화(또는 진화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분화. 이하 생물학적 용어로 씅린 경우에는 차이화를 분화로 옮김)임을 말한다.
물론 분화는 생명이 맞닥뜨린 물질의 저항으로부터 유래한다. 하지만 물질 이전의 분화는 무엇보다 먼저, 특히 생명이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내재적이고 폭발적인 힘으로부터 발생한다. "생기적인 경향의 본질이란 약동*이 그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발산하는 여러 방향을 자기 성장이라는 그 하나의 사실에 근거하여 창조해 나가면서, 스스로를 다발의 형태로 전개하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잠재성은 바로 이 같은 방식, 즉 스스로를 나누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방식,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나누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자기와의 차이를 낳기, 그것은 곧 스스로를 나누면서 현실화하는 잠재성의 운동인 것이다. 생명은 이처럼 자기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진화의 발산하는 계통을 만나게 되고, 또 진화의 각각의 계통 위에서 그 계통의 독창적인 방식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생명이 다르다고 할 때의 이 다름은 여전히 그리고 오로지 생명 자기 자신과의 더불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진화의 각각의 계통 위에서 서로 다른 방식들을 통해 획득되었지만 동일한 기관 장치들과 동일한 기관 구조들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계열들의 발산과 장치들의 동일성, 이것이 한 전체로서의 생명이 행하는 이중 운동인 것이다. 분화의 개념은 이처럼 잠재적인 것의 단순성, 잠재적인 것이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게 되는 계열들의 발산, 잠재적인 것이 계열들 속에서 생산하는 근본적인 결과들 사이의 유사성, 이 모두를 한꺼번에 제시한다.
베르그손은 어떤 점이 유사성이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범주인지를 설명한다. 그 설명에 따르면 유사성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것(지속, 잠재적인 것, 생명)이 갖게되는 동일성을 말한다. 달리 말해서 유사성이란 하나의 동일한 잠재성이 계열들의 발산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산이 본질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유사성은 변화 속에서 존재하는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베르그손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물으면서 기계론을 비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우연의 두 계열을 서로 더하는 방식에 의거하여 서로 완전히 다른 진화들로 하여금 유사한 결과들에 도달하도록 하는 일,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일까?" 즉 기계론의 방식으로는 서로 다른 진화들이 유사한 결과들에 이르는 현상을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분기가 생명의 법칙이라는 차이화의 이 과정에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새로운 점이 나타난다. 즉 생물학적 분화의 한쪽 옆에 정확하게 역사적 차이화가 등장하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생물학적 분화는 생명 자체 속에서 자신의 원리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분화는 그 자체가 물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생물학적 분화의 생산물들은 분리된 상태로, 상호 간에 외적인 상태로 남게 된다. "종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했던 물질성이, 궁극적으로 보면 그 물질성이 지니는 분리의 성격과 외성 때문에 오히려 종들이 자신들의 근원적인 경향을 보다 강하고 복잡하며 진화된 형태로 되살리기 위해 서로 유착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라는 베르그손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역사의 차원에서는 나눔에 의해 구성되었던 경향들이 동일한 개인, 동일한 사회 속에서 진화한다. 즉 경향들이 계속해서 진화하되, 이번에는 생물학적 분화의 차원에서처럼 분리되어서 상호 간에 외적으로 남는 물질들 속에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존재 속에서 진화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동일한 한 인간이 한 반향으로 가능한 멀리 나아가기도 하고 또 다른 방향을 향해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베르그손이 생기적인 것과 비교하여 역사적인 것의 특이성을 인정하는 보기 드문 텍스트들 중의 하니인 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그리고 오로지 인간하고만 더불어 차이가 의식적인 것이 되며, 차이가 차이 자신의 의식**에로까지 고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 자체가 생물학적이라면 차이에 대한 의식**은 이처럼 역사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차이에 대한 이 같은 역사적인 의식의 기능을 결코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차이에 대한 역사적인 의식은 새로운 것을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채로 이전부터 있었던 오래된 것을 풀어놓는다. 사실 의식은 의식 자신의 차이와 더불어서, 의식 자신의 차이 속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 자기 자신에 의한 생명은 그 자체가 곧 의식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이론상으로 그렇다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만약 역사가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또는 만약 역사가 의식이 실제로 깨어나 놓이게 되는 장소라면, 그 이유는 오로지 생명과 동일한 이 의식이 물질 속에서 잠들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은 다만 취소되어 있었을 뿐이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에게 있어 이처럼 의식이 전혀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단지 이전부터 있었지만 취소되어 있었던 의식이 물질을 가로질러서 자기 스스로를 드러나게 되는 그런 유일한 점에 불과하다.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차이 자체와 차이에 대한 의식 사이의 이론상의 동일성이 존재한다. 이때 역사는 단지 그 이론상의 동일성이 그 위에서 드러나게 되는 그런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차이와 차이에 대한 의식 사이의 이 같은 이론상의 동일성, 이것이 바로 기억이다. 따라서 그 자신이 차이이면서 동시에 차이에 대한 의식인 기억이 마침내 우리에게 차이의 순수 개념의 본성을 틀림없이 넘겨주게 될 것이다. (...)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지은이 : 질 들뢰즈 · 옮긴이 : 박정태 · 이학사 · 2007년) <14. 베르그손에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 p.328~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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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비탈(Elanvital, 약동) : 물질은 과거를 반복할 뿐이지만 생명체는 과거를 기억하고 보존하면서, 미래를 위해 새로운 것, 즉 차이를 만들어낸다. 베르그손은 이것을 생명의 약동, 엘랑비탈(elan-vital)이라고 했다.
**의식 : 베르그손에 따르면, 저장된 기억은 뇌의 운동기제에 의해 행동에 필요한 기억을 선택하는데 이것을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은 기억(과거)을 현재로 끌어당겨와 미래를 예상하고 참조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