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만을 위해 특별하게 설계된 세탁기를 꿈꾸지 않은 가정주부가 있겠습니까?" 어느 선전은 이렇게 묻는다. 사실 어느 주부가 그것을 꿈꾸지 않겠는가? 따라서 수백만 명의 가정주부들은 각각 자기만을 위해 특별하게 설계된 '똑같은' 세탁기를 꿈꾸었다는 것이 된다. "당신이 꿈꾸는 육체는 당신 자신의 육체다." 이 훌륭한 동어반복(실은 어느 브래지어의 선전문구)은 '개성화된' 나르시즘의 모든 모순을 집약하고 있다. 당신을 당신 자신이 기준으로 삼는 이상(理想)에 접근시킴으로써, '진정으로 당신 자신'이 됨으로써 당신은 집단의 명령에 가장 충실하게 따르며 또한 '강요된' 모델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다. 악마적인 계략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중문화의 변증법이라고 해야 하는가? (...)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자기 도취는 독자성의 향유가 아니라 집단적 특성의 굴절된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최소한계차(P.P.D.M)를 통해 항상 자기 자신에의 자기도취적 열중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디에서나 개인은 우선 자신을 좋아하고 자기만족하도록 권유받는다.물론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타인의 마음에 들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마침내는 필시 자기만족과 자기유혹조차도 매혹적인 객관적 목적성을 완전히 대신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유혹의 시도는 일종의 완벽한 '소비'라고 하는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지만, 그 시도의 준거틀은 여전이 타인이 심급(審級)이다. (...)
에블린느 쉴르로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델로서의 여성을 여성에게 판다. 자신의 몸에 치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옷을 입히고, 즉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고 생각하면서 여성은 자기자신을 소비한다." 그런데 이 현상은 체계의 논리와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소비되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을 아름다움, 매력, 센스 등의 실제적 특성을 믿고 자기만족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후자의 경우에는 소비가 없고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관계가 있다. 소비는 이 자발적인 관계가 기호체계에 의해, 매개되는 관계로 대체되는 것에 항상 규정되는 것이다. 그때 여성이 자기 자신을 소비하는 것은 그녀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기호에 의해 객관화되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기호라는 것은 소비의 진정한 진정한 대상인 여성적 모델을 구성하는 기호이다. 자신을 '개성화'하면서 여성이 소비하는 것은 바로 이 모델이다. 결국 여성은 "자기 눈동자의 빛과 피부의 부드러움에 자신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녀 자신의 것인 그것들이 그녀에게 어떤 자신도 주지 않는다.(브로댕 <네프(La Nef)지>)" 자연적 특성에 의해 가치 있는 것과 어떤 모델이나 만들어진 코드에 순응하여 자신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기능적 여자다움'이다. 여기서는 아름다움, 매력, 육감 등의 자연적 가치 모두가 사라지고, 그 대신에 (일부러 꾸민) 자연스러움, 에로티시즘, 육체의 선(線), 요염함 등의 지수적(指數的) 가치가 영향력을 행사한다. 폭력과 마찬가지로 유혹과 자기도취는 대중매체에 의해 산업적으로 생산되고 눈에 띄는 가호로 만들어진 모델에 의해 미리 주어지고 있다.
모든 처녀들이 자신을 브리짓 바르도와 같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머리형, 입술, 특징적인 복장 등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여성들에게 똑같은 것이어야 한다. 저마다 이 모델들을 실현하는 데서 자기 자신의 개성을 찾는다. (...) 기능적 여자다움에 대한 기능적 남자다움 또는 기능적 씩씩함이 대응한다. 매우, 당연한 것인데, 이 모델들은 하나가 되어 하나의 질서를 형성한다. (...)
- <소비의 사회>(장 보드리야르 · 문예출판사 | 1992년 · 원제 : La societe de consommation, 1970년) p.140~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