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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 주체의 철학 VS 타자의 철학

by 이우 posted Mar 08, 2020 Views 79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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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적 삶 속에서, 세계 안에서, 주체가 지닌 물질적 구조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아(le moi)자기(le soi) 사이에 사이(intrevalle)가 나타난다. 동일한 주체는 즉시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허이데거 이후, 우리는 세계를 도구들의 집합으로 보는 일에 익숙해 있다.* 세계 안에 실존하는 것은 행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실존을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도구는 서로 다른 것을 지시하며 마침내 모두 우리 실존적 관심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욕실의 버튼을 누를 때 우리는 전적으로 존재론적인 문제를 여는 셈이 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세계는 도구들의 체계를 이루기 전에 먹거리(糧食)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이다. 세계 안에서 인간의 삶은 세계를 채우는 대상들을 넘어설 수 없다. 아마도 먹기 위해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먹는 행위의 최후 목적은 음식 안에 담겨 있다. 꽃의 냄새를 맡을 때, 이 행위의 목적은 꽃의 향기에 제한된다. 산책하는 것은 바람을 쐬기 위한 것이고, 건강 때문이 아니라 공기 때문이다. 세계 안에서 우리의 실존을 특징짓는 것은 먹거리들이다. 탈존적 실존, 곧 자기 밖에 존재하는 것은 대상에 의해 제한된다.

  대상과의 관계, 이것을 우리는 향유(jouissance)로 특징지울 수 있다. 모든 향유는 존재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감각 작용, 다시 말해 빛과 인식이다. 대상을 흡수하지만 동시에 대상과 거리를 둔다. , 곧 밝음은 본질적으로 즐김에 속한다. 그러므로 주체는 주어진 먹거리들에 직면해서, 공간 속에, 그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대상들과 거리를 둔 가운데 존재한다. 홀로서기의 순수하고 단순한 동일성 안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매여 있지만, 세계 안에서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대신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의 관계'라는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은 이미 최초의 물질성으로부터 해방되는 방식인데 이것에 의해 주체는 완성된다. 여기에는 이미 자기 망각이 개입되어 있다. 『지상의 양식』**의 모랄은 최초의 모랄이다. 최초의 포기.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이것을 거쳐 지나가야 한다.*** (...)

  -  『시간과 타자』(에마누엘 레비나스 · 강연안 · 문예출판사 · 1996년 · 원제 : Le Temps et L`Autre, 1947년) p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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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데거는 세계를 공간 가운데 존재하는 사물들의 총체로 보기보다는 존재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하는 존재자와 상관된 '도구 전체성'으로 이해한다.

  **『지상의 양식』 : 앙드레 지드의 산문(1897년)

  ***(원주) 향유를 이렇게 '자기를 벗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주의에 대립된다. 플라톤은 혼합된 쾌락을 거부할 때 일종의 계산을 하고 있다. 혼합된 쾌락은 순수하지 못한데, 그 까닭은 그와 같은 쾌락은 어떤 현시적 이익이 기록되지 않고서 채우는 결핍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향유를 손익 관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는 향유를 그것의 생성, 그것의 사건 안에서, 존재 안에 스스로 등록하는 , 변증법 속에 던져진 자아의 드라마와 관계해서 보아야 한다. 지상의 양식의 모든 매력, 젊음의 모든 경험은 플라톤적 계산과 대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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