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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안티오이디푸스』 : 사회체와 기관 없는 몸

by 이우 posted Aug 28, 2016 Views 18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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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사회적 생산은 특정 조건들에서 욕망적 생산에서 유래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호모 나투라. 하지만 또 우리는, 정확하게 욕망적 생산은 무엇보다 사회적이며, 끝에서야 자신을 해방하는 데로 향한다고 말해야 한다. (...) 사회 기계 또는 사회체는 토지의 몸, 전제군주의 몸, 돈의 몸일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기관 없는 몸의 투사가 아니다. 기관 없는 몸은 오히려 탈영토화된 사회체의 궁극적인 잔여물이다. 사회체의 문제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욕망의 흐름들을 코드화하고 기입하고 등록하여, 막히거나 수로화하거나 규제되지 않는 그 어떤 흐름도 흐르지 못하게 하기. 원시적인 토지 기계가 더 이상 충분한 것이 못 되었을 때, 전제군주 기계는 일종의 초코드화를 세웠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기계는, 그것이 전제군주 국가에서 다소 떨어진 폐허 위에 설립되었기에,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있다. 즉 흐름들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라는 상황. 이 상황에 대해 자본주의는 바깥에서 맞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이 상황을 살펴,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조건과 질료를 동시에 얻으며, 온 힘을 다해 이 상황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 즉 돈-자본이라는 형식를 지닌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과 <자유노동자>라는 형식을 지닌 노동의 탈코드화된 흐름이 만나서 탄생한다. 또한 예전의 사회 기계들과는 반대로, 자본주의 기계는 사회장 전체를 포괄하는 코드를 제공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돈 속에서 코드라는 관념 자체를 사회체의 탈영토화 운동에서 늘 더 멀리 가는 추상량의 공리계로 대체했다. 이 문턱은 사회체를 해체하여 기관 없는 몸을 출현시키고, 또 이 몸 위에서 탈영토화된 장 속에 있는 욕망의 흐름을 해방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마치 조울증과 편집증이 전제군주 기계의 생산물이고 히스테리가 토지 기계의 생산물이듯, 분열증은 자본주의 기계의 생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까?


  그리하여 흐름들의 탈코드화, 사회체의 탈영토화는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향성을 형성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의 극한에 접근하는데, 이 극한은 참된 분열증의 극한이다. 자본주의는 기관 없는 몸 위에서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주체인 분열자를 온 힘을 다해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이 주체는 자본가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이 경향성으로 늘 더 멀리 가면, 마침내 자본주의는 자신의 모든 흐름과 더불어 달나라에 이를 것이다. 물론 아직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 이는 그저 현대의 삶이 광기를 생기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삶의 양식이 아니라 생산의 경과이다. 가령 분열자들에게 의미의 미끄러짐이라는 현상들과 산업사회의 모든 단계에서 증대하는 불협화음이라는 메커니즘들 사이에는 코드들의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병렬이 있다는 것이 아주 명확하지만, 그렇더라도 단순한 병렬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 과정에서 엄청난 분열적 부하(負荷)를 생산하는데, 그 탄압의 모든 무게로 이 부하를 늘려 보려 하지만, 이 부하는 경과의 극한으로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경향성을 가속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 경향성을 반대하고 금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극한으로 향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이 극한을 억지한다. 자본주의는, 상상적이건 상징적이건, 온갖 종류의 잔여적 · 인조적 영토성들을 세우거나 재건하여, 이 영토성들 위에서, 추상량들에서 파생되는 인물들을 잘못 또는 잘 재코드화하고 틀어막으려 한다. 국가들, 고향들, 가족들, 이 모든 것이 다시 지나가고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그 이데올로기에 있어 <지금까지 믿어 온 것의 얼룩덜룩한 그림>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현실계는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점점 더 인공적인 것이 된다. 맑스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잉여가치의 절대량 증대라는 이중 운동을 상반된 경향의 법칙이라 불렀다. 이 법칙의 따름 정리로서, 흐름들의 탈코드화 내지 탈영토화와 이 흐름들의 격렬하고 인조적인 재영토화라는 이중 운동이 있다. 자본주의 기계가 여러 흐름들에서 잉여가치를 추출해 내기 위해 이 흐름을 탈코드화하고 공리화함으로써 탈영토화하면 할수록 관료 조직과 경찰 기구 같은 자본주의의 부속 장치들은 잉여가치의 증대하는 몫을 흡수하면서 더욱더 재영토화한다. ...


 - 『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민음사 · 2014년  · 원제 : L’Anti-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72년) <1장 욕망 기계들> p.6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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