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인간적 융합에 대한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발광 또는 파괴―자기 파괴 또는 타인 파괴―가 일어난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대인간적 합일의 달성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심각한 난관에 부딪힌다. 융합은 여러 가지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이 방식의 차이점은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의 공통점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 '공서적(共棲的)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볼 수 있다. 어미니와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다. 그들은 '함께' 살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일부이고 어머니에게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다. 어머니는 말하자면 태아의세계이다. 어머니는 태아를 먹이고 보호하지만 어머니 자신의 생명도 태아 때문에 강화된다. '정신적인' 공서적 합일에서는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애착이 존재한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임상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masochism)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인간이 복종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의 나는 위대성, 힘,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는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종교적 맥락에서 예베의 대상은 우상으로 불린다. 피학대 음란증적 사랑의 관계하는 세속적 맥락에서도 본질적 메커니즘, 곧 우상 숭배의 매커니즘은 동일하다. 이 경우 복종은 정신과 관련되는 복종일 뿐 아니라 전신(全身)이 관련되는 복종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복종에는 운명에 대한, 병에 대한, 율동적 음악에 대한, 마약 또는 최면적 활홀경에 의해 발생한 도취적 상태에 대한 복종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 필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또는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의 도구로 만든다. 그는 살아가는 문제를 생산적 활동에 의해 해결할 필요가 없다.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되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sadism)이다.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게 의지하듯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하는 자에게 의존한다. 양자는 한쪽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 히틀러는 우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학성 음란증적 방식으로 반응했으나 운명, 역사, 자연의 '더욱 큰 힘'에 대해서는 피학대 음란증적 방식으로 반응했다. (...)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한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 활동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은 외부적 변화가 일어났듯, 일어나지 않았든 인간의 타고난 힘을 사용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활동에 대한 후자의 개념을 가장 명백하게 정식화했다. 그는 감정을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 곧 '행동'과 '격정'으로 구별한다. 능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자유롭고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수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쫓기고 자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동기에 움직여지는 대상이 된다. 이렇게 해서 스피노자는 덕과 힘이 동일하다는 명제에 도달한다. 선망, 질투, 야망, 온갖 종류의 탐욕은 격정이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이 힘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핼사할 수 있을 뿐, 강제된 결과로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 남성의 성 기능의 절정은 준다는 데 있다. 남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슴의 순간에 남자는 정약을 여자에게 준다. 그는 능력이 있는 한, 정액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만일 줄 수 없다면 그는 성적 불능자이다. 여자의 경우, 비록 약간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자도 자기자신을 준다. 여자는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중심을 향해 문을 열러준다.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여자의 경우, 준다는 행위는 애인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기능에서도 나타난다. 여자는 그녀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 유아에게 젖과 체온을 준다. 주지 않으면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이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자신,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 이 말은 특히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이 사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이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 받는 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p.42~44)
-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 · 문예출판사 · 2006년 · 원제 : The Art of Loving, 1956년) p.3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