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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치(政治, politics)에 관한 세 가지 사유

by 이우 posted Jan 17, 2015 Views 1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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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政治)’는 ‘정(政)’과 ‘치(治)’자가 합쳐진 말이다. ‘정’(政)은 ‘바르다’의 뜻을 가진 ‘正(정)’과 ‘글’이라 의미인 ‘文(둥글월 문)이 합쳐진 말로 ‘글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뜻하며, 치(治)는 물(水)과 건축물(台)이 합하여 이루어진 말로 물(水)의 넘쳐 피해를 입은 건물을 수습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동양적 의미의 정치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동양에서의 정치(政治)는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라 하여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것이라고 하며,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자신의 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해 왔다.

  서구에서 정치(politics)는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 ‘배분’, ‘권력 관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된다. 막스 베버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라고 했으며,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이라고 정의했다. 1980년대 이후 정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정치를 국가의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 내재된 ‘권력 관계’로 정의해왔다. 서구에서의 정치란 ‘국가’, ‘배분’, ‘권력’이라는 언표를 떠나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①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 ‘정치란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이며 배분에 따른 권력 관계’

루소.jpg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s hommes , 1755년)』에 따르면, 국가의 권력 관계는 폭력과 이를 근거로 한 결핍의 발생을 통해서 작동하며 권력 관계는 통치자가 폭력이나 수탈을 통하여 피통치자들을 결핍의 상태로 만들고, 수탈한 것을 제한적으로 수탈당한 사람에게 재분배함으로써 유지된다. 정치(politics)를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이라면, 이 활동은 ‘배분’이며, 여기에서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데 권력 관계는 폭력과 결핍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어떤 자가 폭력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만 그 주먹에 굴복하여 한탄하면서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미개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는 복종과 지배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중략) 주종관계란 사람들의 상호 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요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
-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 중에서

  루소가 생각하기에는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초적 폭력, 즉 원초적 수탈이라는 사건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단지 통치자로부터 유래하는 재분배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순서로 따진다면 수탈이 있고 재분배가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수탈을 잊고 재분배를 첫 번째라고 잘못 믿게 되는 것이다. 야생에서 살던 개가 인간에게 잡혀 집개가 되면, 주인이 음식을 주면서 자신을 돌보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 지키는 개는 주인과 그의 재산을 잘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며 마침내 자신이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았다는 생각을 잊게 되며, 도리어 주인에게 저항하는 개를 ‘저항’, 혹은 ‘불복종’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과정 때문에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종류의 저항 혹은 불복종을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 보는 견해가 있게 된다. 국가의 은혜와 보호를 받았으면서 왜 그 고마움을 모르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재분배를 강조하는 국가의 교환 논리에 포획되면 자신도 모르게 구성원은 채무의 주체로 구성될 수 밖에 없다.


  ②슈미트, “정치란 책략·술책·경쟁·음모의 형태를 취하는 거래”다.

슈미트.jpg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년)은 더 충격적이다.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p.31)로 하는데, 정치는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 중 겨우 어떤 적대적인 계기만 남을 뿐이며, 모든 종류의 책략과 술책, 경쟁과 음모의 형태를 취하고, 가장 기묘한 거래와 정략을 정치라고 부르게 된다’(p.44)고 말하고 있다. 특히, ‘진정한 정치이론이란 모두 인간을 악한 것으로 전제’하며, 인간을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동적인 존재로 간주한다’(p.240)는 것이다.

 (...)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의 용어법에 따르면 국가는 어떤 지역적 경계 안에 있는 조직된 인민(Volk)의 정치적 상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국가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며, 결코 국가에 대한 개념 규정은 아니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문제 삼는 경우에는 그러한 개념 규정은 필요하지 않다. 국가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기계인가 유기체인가, 인격인가 제도인가, 이익사회인가 공동사회인가, 경영체인가 꿀벌집단인가, 또는 혹 어떤 ‘기본적 절차’는 아닌가의 문제에 대해서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 같은 정의나 표상들은 모두 너무나 많은 판단, 의미부여, 설명, 해석을 미리 해 버리기 때문에, 단순하고 기본적인 논술에 적합한 출발점을 마련하지는 못한다. 국가란 그 말의 의미나 역사적 발생에서 본다면 인민의 특별한 상태이며, 더구나 결정적인 경우에는 결정력을 가지는 상태이며,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개인적-집단적 상태에 대한 절대의 상태이다. 여기서는 일단 이 이상 더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관념의 모든 표지-상태와 인민-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추가적인 표지를 통해서 의미를 획득하며,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오해되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p.31~31)

  (...)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규준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 규정을 제공하며, 빠짐없는 정의(定義) 내지 내용을 제시하는 개념 규정은 아니다. 다른 규준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구별은 도덕적인 것에서는 선과 악, 미학적인 것에서는 미와 추 등 다른 대립에서 보여지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규준들에 대응한다. 여하튼 이 구별은 새로운 고유영역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앞서 말한 하나 또는 몇몇 대립들에 근거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것들에게 귀착시킬 수도 없다는 방식에서 독립적이다. 선악의 대립이 그대로 간단히 미추 또는 이해의 대립과 동일시되지 않고, 또한 곧바로 그와 같은 대립으로 환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적과 동지의 대립은 더구나 이러한 대립들과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적과 동지의 구별은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가장 강도 높은 경우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가지며, 상술한 도덕적·미학적·경제적 또는 다른 모든 구별을 그것과 동시에 적용하지 않아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미학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쩌면 적과 거래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 따라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적과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 충돌은 미리 규정된 일반적 규정에 의해서도, 또한 ‘국외적이고’ 따라서 ‘공정한’ 제3자의 판결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없다. (...) (p.39~40)

  (...) 이와 같은 투쟁의 가능성이 남김없이 제거되고 소멸된 세계, 최종적으로 평화로워진 지구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없는 세계, 따라서 정치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도 아마 다양하고 매우 흥미로운 대립이나 대비, 모든 종류의 경쟁이나 술책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인간에게 생명을 희생하도록 요구할 수 있고, 피를 흘리고 다른 인간을 살해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의미 깊은 대립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이와 같은 정치 없는 세계를 이상적 상태로서 바라고 초래할 것인지의 여부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 규정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현상은 오직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라는 현실적 가능성과 관련을 가짐으로써만 이해되는 것이며, 거기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어떤 종교적·도덕적·미학적·경제적 평가가 나오는지는 관계가 없다. (...) 적과 동지의 구별이 사라지면, 정치생활도 없어진다.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국민은 서약적인 선언에 의해서 이러한 숙명적인 구별을 피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일부분이 더 이상 어떠한 적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적에 가담하고 적을 돕는 일이며, 이 선언으로 적과 동지의 구별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의 시민들이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왜냐하면 개인에게는 정치상의 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선언으로는 고작해야 현재 자신이 소속하고 있는 정치적인 전체집단으로부터 이탈하여 단지 개인으로서만 살고 싶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p.48~49)

  슈미트는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자유주의란 국가와 시민 사회,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구별을 전제로 하며, 시민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사적인 삶이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침해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놓아야 한다는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는 근대 시민(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승리가 가져온 결과이지만, 역설적으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생각했다. 슈미트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별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미적인 것, 도덕적인 것처럼 삶의 근원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미적인 것이 미와 추, 도덕적인 것이 선과 악이라는 이항대립에 기초하고 있듯이 정치적인 것은 적과 나의 구별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러한 대립과 구별을 외면할 때 정치는 비정치적인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가 결국 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없는 것은, 민주주의가 ‘정치적인 것’의 문제인데 반해 자유주의는 그 무엇보다도 ‘비정치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한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를 복원하려고 했다. 자유민주주의란 본성상 안정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법 규범과 의회 정치라는 제도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슈미트가 지적했듯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 더 나아가 무정부주의로 쉽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통상적인 정치적 긴장을 넘어서 갈등과 혼란의 상태가 빚어졌을 때 자유민주주의는 매우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자를 일컫는다”고 말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선 보다 근원적인 지평에서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보려고 했다. 그는 전쟁, 혁명, 내란 등 극한적인 갈등 상황에서도 무력해지지 않는 권력 이론을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강력한 국가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히틀러의 나치를 옹호하고 결국 쓸쓸하게 은둔의 말년을 보내야 했던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③푸코의 “정치란 권력 관계”

푸코.jpg  『성의 역사』 제1권에서 푸코는 해부-정치(anatomo-politics)와 생체-정치(bio-politics)에 관해 언급하는데, 이 둘은 모두 신체가 그 행사의 장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생체-권력(bio-power)이라 불린다. 해부-정치와 생체-정치는 신체에 가해지는 권력의 기술적 측면, 즉 통치 테크닉의 대표적인 두 유형인 셈이다. 이 두 유형의 통치 테크닉은 신체를 둘러싸고 작동하면서도 신체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의 최대한의 발현을 보장하려 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부-정치와 생체-정치는 모두 ‘삶에 대한 권력’이다. 즉 그것은 죽음의 위협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재생산하는 권력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을 최대로 보장함으써 행사되는 권력이다. 통치 테크닉은 제한하고 처벌하고 제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보장하고 생산하고 보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푸코는 “삶을 빼앗든가 살게 내버려두는 낡은 권리 대신에 삶을 북돋아주든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권력이 들어섰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푸코는 고전주의적인 권력 작동 방식(죽음의 방식)과 근대적인 권력 작동 방식(삶의 방식)을 대조시킴으로써 기존의 권력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생체-정치는 ‘삶에 대한 권력’과 보다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것은 불가침의 위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군주를 중심으로 한 권력, 신민과의 불균형과 군주권의 유지를 위해 죽음에 대한 권리까지 보유하는 권력과는 다르다. 생체-정치는 오히려 민중들을 마치 양떼처럼 돌보고 그들을 배려하는 목자의 권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생체-정치를 ‘사목 권력(pastoral power)'이라 부른다. 사목 권력은 그리스?로마의 국가와 대비되는 반면 히브리 및 그로부터 발전한 기독교도들의 국가와 유사하다. 그리스?로마의 권력은 중앙집권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권력이다. 개개인은 법률, 그리고 공동의 이익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행동한다. 반면 기독교의 사목 권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리스?로마의 중앙집권적 권력과 구별된다.

  사목 권력에서 목자는 양떼들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되 단지 무리 전체로서만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각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배려한다. 이러한 종류의 권력은 중앙집권적인 권력과 달리 개별화하는 권력(individualizing power)이라고 불릴 수 있다. 목자는 이와 같이 양떼들 전체의 공익을 위할 뿐만 아니라 개별화된 그들 개개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헌신한다. 양떼로서의 민중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목자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자신을 내맡겨 완전히 의존하고 복종한다. “이것은 복종이 그리스인의 경우와 같이 목적을 위한 방편적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생체-정치가 작동하고 있다거나 사목권력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통치성(governmentality)이 확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통치(government)란 피치자에 대한 통치자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통치는 권력이 행사되는 특정한 방식을 의미한다. 즉 권력은 통치자가 자신이 보유한 수단을 동원하여 피치자를 지배함으로써 확보되는게 아니라 배려와 관심이 매우 사적이고 개별적인 부분에까지 미침으로써 행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언급했던 ‘개별화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통치성이 확보되기 위해서는 사적인 부분에까지 세세하게 지속적인 관심의 시선을 보내고 배려의 손길을 내미는 어떤 독립된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통치성이 확보되는 주요한 기제인 고백의 경우를 보자. 강압적이지 않은 자연스런 귀의의 상태에서 고백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고백을 행하는 자가 존재한다면 고백을 듣는 자도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푸코는 기독교의 표현을 동원하여 이처럼 고백에 귀 기울이는 자를 목자라고 이름 붙인다. 즉 양떼들 전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의 양에 대한 개별적인 관심을 쏟는 자가 바로 목자이다. 사회적 수준에서의 지배의 경우에 목자는 국가일 수 밖에 없다. 푸코 자신도 고백에 의해 이루어진 특정한 유형의 지식을 통계학(국가의 지식)이라고 말함으로써 목자의 근대적 형태가 국가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집중화하는 권력’이라 불릴 수 있다. 

  푸코의 권력이론이 국가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치권력과 사목권력에 대한 푸코의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사목권력이 개별화하는 권력이라면 정치권력은 집중화하고 집중화된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푸코는 ‘사목이 어떻게 그것과 상반되는 것, 즉 국가와 결합하였는가’를 보여주려 하였다.

  우선 사목권력과 정치권력의 융합을 이야기할 때 푸코는 현대의 복지국가(welfare state)를 염두에 두고 있다. 푸코는 복지국가를 ‘개별화의 근대적 모체’로, 즉 기독교적 사목권력의 현대적 변형으로 간주하는데, 그 변형의 양상은 다음의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 사목권력의 목표가 내세에서의 구원으로부터 현세에서의 삶과 행복의 보장으로 변화한다. 둘째, 사목권력을 담당하는 관료가 증가한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국가에 속하는 관료들이기도 하지만, 국가영역 밖에서 사회사업과 같은 형태로 이러한 업무를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목권력을 논함에 있어서 제도적인 국가의 안이냐 밖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다. 셋째, 인구에 대한 지식과 개인에 대한 지식이 동시에 형성된다. 이것은 통계학적 지식이 축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구에 대한 지식의 확보가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한 이상 이러한 지식과 정보는 국가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통해서 국가는 인구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독점적으로 확보하게 된다. 다음으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그들만의 관계로 다루어질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 관계는 더 이상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될 수 없게 된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통치 테크닉을 통해서 국가는 모든 영역에 이미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국가는 개인들이 자신들만의 ‘사적인’ 행위와 사고를 추구한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이미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예비적 조건들을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근대의 개인은 국가를 통해서만 주체화된다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단순히 권력 행사의 형태들 혹은 권력 행사의 특수한 상황들 -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권력 형태들은 국가에 조회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이것들이 국가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 관계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국가의 통제 하에(국가의 이러한 통제가 비록 교육 체계, 사법 체계, 경제 체계, 가족 체계 등에서 동일한 형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치라는 용어의 제한된 의미를 지칭할 때, 우리는 권력 관계들이 점차적으로 통치화되어 왔다고, 다시 말해서 국가 제도라는 형식으로 혹은 국가 제도의 분위기 하에서 정교화되고 이성화되며 집중화되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푸코의 권력이론의 핵심은 권력 관계가 특정한 양식의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적 지배가 유지되고 있다는 주장에 있다. 정치권력과 사목권력의 융합에서도 이러한 함의가 발견된다. 근대의 개인은 한 국가에 속한 개인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국민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지 않은 개인은 그 사회 내에서 적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들의 사적인 영역들은 국가가 그들을 개별화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사목권력의 배려와 보장을 끊임 없이 제공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의 주체 양식은 회의불가능한 사고와 행위의 출발점이기 이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정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푸코의 인식론적·철학적 의미가, 근대의 주체 양식이란 권력에 의해 과학과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주체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면, 푸코의 사회이론적 의미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채 국가를 상대하는 개인이 가능하려면 사전적으로 국가를 통해 스스로를 국민으로 주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미셸 푸코. 난장. 2012년. 원제 :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ege de France 1978~1979)를 정리함.

  어떻게 구성된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성하는 주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푸코는 훈육이 완성되기 이전의 유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푸코는 훈육 과정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훈육되지 않은 채 불쑥 드러나곤 하는 우리 삶의 ‘속성’들에 시선을 집중시켰고 이 사유는 <자기 배려>라는 결과로 도출되었다.

  (...) 인생의 시작부터 사물화되어 버린 오류·왜곡·악습·의존성의 심층부에 훈육이 가해진다. 그 결과 인간 존재가 여전히 모머루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음의 상태나 유년기의 어떤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결함 있는 교육 및 신앙 체계에 사로잡힌 인생 속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을 참조하는 관건이 된다. 자기실천의 목표는 자기 자신 내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자기를 해방하는 행위이다. (...)
- 푸코의 『자기와 타자의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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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 중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 된 아이의 신경에 고통을 가하는 순간, 즉각 그 아이의 몸을 가르고, 아주 조심스럽게 관찰하지 않으면, 절대 그 부분은 해부학적으로 완벽히 밝혀질 수 없어.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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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05
    Jun 2018
    05:05

    [문학] 『미덕의 불운』 : '종교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모든 종교는 거짓된 원칙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쏘피.’ 그가 말하였습니다. “모든 종교는 창조자에 대한 숭배를 필요 조건으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이 우주 공간의 무한한 평원에서 다른 천체들 속에 섞여 둥둥 떠다니는 우리의 영원한 지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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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05
    Jun 2018
    04:55

    [문학] 『미덕의 불운』 : '자연'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아가씨의 그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얼마 안 가서 아가씨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말거예요.’ 뒤부와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였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하늘의 심판이라든지, 천벌, 아가씨가 기다리는 장래의 보상 등, 그 모든 것은 학교의 문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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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03
    Jun 2018
    20:30

    [철학] 『향락의 전이』 : 뭉크와 여성의 비밀

    (…) 1893년 뭉크*는 오슬로(Oslo)의 와인 장사꾼의 아름다운 딸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매달렸으나 그는 결합을 두려워 해 결국 그녀를 떠났다. 폭풍우 치던 어느 날 밤, 범선이 그를 데리러 왔다. 젊은 여성이 죽음에 임박하여 마지막으로 그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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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03
    Jun 2018
    20:20

    [철학] 『향락의 전이』 : 오토 바이닝거,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중들이 철학자가 성교를 한다고 해서 무가치하고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해보자…”(237)*. 이러한 진술은 바이닝거*의 작업에 일종의 좌우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는 성차와 성관계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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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8
    May 2018
    09:15

    [철학] 『향락의 전이』 : 상상적 과잉성장, 상징적 허구 혹은 창조적 허구

    (...) 현대적 매체의 문제는 우리가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도록 유혹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매체의 초현실적 성격에 있으므로 그것들은 상징적 허구를 위한 공간을 개방하는 공동을 채운다. 상징계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허구의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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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03
    May 2018
    09:26

    [철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 왕도정체 · 귀족정체 · 금권정체 · 참주정체 · 혼합정체 · 민주정체

    제10장 정체의 종류 (...) 정체(政體)에는 세 종류가 있고, 그것들이 왜곡된 또는 타락한 형태도 셋이다. 세 종류의 정체란 왕도정체와 귀족정체(aristokratia, 최선자정체), 그리고 세번째로 재산평가에 근거한 정체이다. 세번째 정체는 금권정체*라고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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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03
    May 2018
    08:37

    [철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 분배적 정의(正義, justice)와 조정적 정의, 정치적 정의

    제3장 기하학적 비례에 따른 분배적 정의 (...) 분배에서의 정의는 어떤 가치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종류의 가치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민주정체 지지자들은 자유민으로 태어난 것이, 과두정체 지지자들은 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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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02
    May 2018
    20:54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도래하는 존재는 임의적 존재이다

    (...) 도래하는 존재는 임의적 존재이다. 스콜라 철학이 열거하는 초범주개념들 가운데 개별 범주 내에서 사유되지 않지만 다른 모든 범주의 의미를 조건 짓는 단어가 바로 형용사 ‘쿼드리벳(quodlibet)*’이다. 이 단어를 통상 “어떤 것이든 무관하다”는 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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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02
    May 2018
    20:52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모순은 언어에 기원을 둔다

    (...)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모순은 언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실제로 '나무'란 단어가 모든 나무를 무차별적으로 지칭할 수 잇는 것도 그 단어가 특이한(singular) 불가언적적 나무들 대신에 그들의 보푠적 의미를 가장하기 때문이다. (...) 보편자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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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02
    May 2018
    20:49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파시즘과 나찌즘은 극복된 것이 아니다

    (...) 만일 우리가 인류의 운명을 다시 한 번 계급의 개념으로 사유하고자 한다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 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planertaria) 소시민 계급 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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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02
    May 2018
    20:47

    [철학] 『도래하는 공동체』 : 모든 귀속의 조건을 거부하는 임의적 특이성

    (...) 중국의 5월 시위(천안문 광장의 반정부 시위)에서 가장 인산적이었던 점은 그들의 요구 사항에서 확실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자유는 실제 투쟁 대상이 되기에 너무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개념들이었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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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01
    May 2018
    15:02

    [철학] 플라톤의 「향연」 : 사랑은 결핍이다

    (...) "친애하는 아가톤, 자네는 먼저 에로스가 어떤 분인지 밝힌 다음 그분이 하는 일을 논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이야기를 훌륭하게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네. 자네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것에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네. 자네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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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6
    Apr 2018
    03:49

    [철학] 『안티오이디푸스』 : 의미, 그것은 사용이다.

    오이디푸스와 믿음 (...)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는 잘못된 믿음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잘못된 어떤 것이요, 실효적 생산을 빗나가게 하고 질식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견자(見者)란 가장 덜 믿는 자이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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