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18년)>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다. 초판의 서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본문을 썼으며 일정량이 모이면 러셀과 무어에게 보냈고 1918년 완성하였다. 초판의 출간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2년에 이루어졌다. 흔히 <논고>로 줄여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는, 그 문제들이 우리가 언어의 논리를 오해한데에서 생긴다는 점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여기에 적힌 사고의 진리성에 대해서는 공격불가능하며 완결적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본질적인 점들에 대한 문제의 최종 해결점을 찾았다고 믿는다. ”
?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 <논리-철학 논고>에서
<논고>를 집필하던 시점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 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이론(picture theory)>을 제시한다. 그림 이론을 구상하게 된 까닭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재판에서 모형들이 사용된 것을 본 것 때문이었다.
<그림이론>이란 “언어는 세계를, 명제는 사실을, 이름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실제 대응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기장에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조립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그림 이론은 기존의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나 도덕학에서 신이나 자아, 도덕과 같은 것들은 실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없어서 “뜻(Sinn)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은 실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끝맺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명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자신의 <그림 이론>에 대해 토론을 하던 가운데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론에 스라파가 반론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목 부분을 밀어 올렸다. 스라파의 행동은 이탈리아에서 의문이나 조소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제스처였다.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주장했던 언어의 논리학과는 달리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는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 탐구>를 집필하였으나 당시에는 출판하지는 않았다. <철학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후에 남겨진 초고를 합하여 출판되었다.
<철학 탐구>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된다. 초기의 <그림 이론>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있기 전에 생활 양식이 있다. 또한, 언어는 그 '뜻'이 아니라 '사용'에 본질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것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이라고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했는데, 줄넘기 놀이, 술래잡기, 가위바위보 등의 '놀이'에서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대니얼 솔로브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접근을 현대형 프라이버시 개념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이상적인 상태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러한 철학은 옥스퍼드학파라고도 불리는 '일상언어학파'가 잇게 된다.
□ 그림이론(picture theory)
비트겐슈타인이 1918년에 쓴 <논리-철학논고>는 ‘ 빈학파’의 논리실증주의를 비롯하여 20세기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많은 철학적 논란 들이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하여 발생한다고 보았 기 때문에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하여 명료화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그는 이 책에서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그림이론’을 주장한다.
이 이론을 세우는데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은, 교통사고를 다루는 재판에서 장난감 자동차와 인형 등을 이용한 모형을 통해 사건을 설명했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모형을 가지고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형이 실제의 자동차와 사람 등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도 이와 같다고 보았다. 언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언어가 세계와 대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어가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는 사태(事態)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명제들과 사태들은 각각 서로 대응하고 있다. 이처럼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는 동일하며,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그림이론>에서 명제에 대응하는 ‘사태’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 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의미한 다. 따라서 언어를 구성하는 명제들은 사실적 그림이 아니라 논리적 그림이다. 사태가 실제로 일어나 서 사실이 되면 그것을 기술하는 명제는 참이 되지만, 사태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명제는 거짓이 된다. 어떤 명제가 ‘의미 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명제가 실재하는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언급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서는 참, 거짓을 따질 수 있다.
만약 어떤 명제가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나 사태가 아닌 것에 대해 언급하면 그것은 ‘의미 없는 명제’가 되며, 그것에 대해 참, 거짓을 따질 수 없다. 따라서 경험적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명제만이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의 철학자들이 다루었던 ‘신’, ‘영혼’, ‘형이상학적 주체’, ‘윤리적 가치’ 등과 관련된 논의가 의미 없는 말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 말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즉 경험 가능하지 않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 명제나 질문들은 의미가 없는 말들이다. 그러한 문제는 우리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는 신비한 것들이지만 이에 대해 말로 답변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 언어게임(Language game, 言語遊戱)
갑자기 K는 ‘칼’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P가 ‘칼 을 달라는 것이냐?’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P는 ‘무엇이 칼과 같다는 비유냐?’라고 물었다. 또 다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P는 ‘칼을 가지고 오라는 뜻이냐?’고 물자 그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한 P는 상황을 인지하고 ‘칼을 가져와서 식 탁의 빨간 사과를 깎으라는 것이죠?’라고 묻자 비로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라는 한 글 자를 가지고 벌어지는 이 상황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게임이다. 그런데 말을 하는 행위가 게임?놀이라면 이 세상은 거대한 언어의 게임장?놀이터이고 거기에는 모두가 합의한 규칙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공공성이 있다.
초기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년~1951년)은 ‘언어란 세상을 그리는 그림’이라고 말하고 언어와 세상의 논리구조는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명제로만 구성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1년)에서 ‘세상은 말할 수 있는 명제들의 총합’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후에 출간된 <철학의 제 문제(Philosophical Investigations)>(1953년)에서 초기 이론을 수정하고 언어의 다양성, 복합성, 관계성, 현장성, 보편성, 공공성, 상대성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은 언어이고 사실은 문장이며 대상은 이름이다’로 요약할 수 있는 초기 언어철학에서 ‘언어는 환경, 문맥,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고 사용과 실천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게임?놀이이다’라는 후기 언어철학으로 변화한 것이다.
… 위 그림은 라캉이 기차를 타고 가다 보았다면서 써먹은 것이다. 소쉬르의 영향을 받아서 기호와 대상은 무관하며, "기표는 기의에 가 닿지 못한 채 그 위로 미끄러진다"고 했던 라캉이 보기에, 화장실에 붙은 '남'과 '여'라는 기표는 기호의 자의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확실히 '남'/'여'라는 기표가 문 위에 붙어 있으면, 우리는 거기서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화장실을 떠올린다. 그런데 만약 그 문과 기표가 있는 곳에 '목욕탕'이라고 쓴 간판이 있다면, 우리는 '남'/'여'에서 화장실이 아니라 남탕과 여탕을 떠올릴 것이다. 기표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된 게 아니라 이렇게 이웃한 기표들과 놀이에 의해 규정된다. 소쉬르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고, 라캉이나 데리다는 더욱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간판 대신 옷과 진열대가 있었다면? 우리는 어느새 '남'과 '여'라는 말에서 탈의실을 떠올릴 것이다. 다른 이웃한 표기가 없어도 그 의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에 충분한다. 이제 기표는 다른 기표만이 아니라 이웃한 모든 것과 놀이한다고 바꿔 말해야 할 듯하다. …
-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 그린비 | 2012년) p.292
언어게임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언어는 규칙이 있는 경기나 게임과 같아서 언어활동 현장의 상황과 맥락 속에 서 그 의미가 확보된다는 이론이다. ‘게임(game)’이라는 언어 역시 앞의 ‘칼’에서 보듯이 그 의미가 맥락과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기 때문 에 문맥에 따라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고정된 본질, 개념, 이념, 생각은 없고 의사소통의 현장에서 구현되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사용하는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는 언어의 본질이 아니며 발화되기 전의 언어 역시 큰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언어는 서로 상대가 있어서 주고받는 소통의 맥락에서 의미가 확보된다. 또한 언어게임은 독일어 ‘놀이(spiele)’에서 보듯이 일종의 유희라는 이론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대상을 표현하고, 타자와 소통하며, 세상을 표현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언어게임을 한다고 보았다. 언어와 언어활동을 벗어나면 이런 언어게임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같은 언어 사용자의 언어게임이 더 활발하며 개인이나 집단 모두가 게임을 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세상은 거대한 언어의 경연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라는 직물이 날줄과 씨줄로 교직(交織)되어 무늬를 이루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언어게임은 어린 아이들이 언어로 희를 하는 것과 유사하고, 특정한 규칙이 있는 문법구조에서 가능하며, 모든 자연언어에서 일어난다.
그는 ‘단어의미(word-meaning)’와 ‘문장의미 (sentence-meaning)’에서 모두 언어게임이 벌어진다고 보았다. 가령 ‘칼’이라는 단어 하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문장 역시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떤 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으로 쓰이는지 모른다거나 모세가 어떤 시대의 어떤 인물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사용자는 끊임없이 전후 상황과 맥락을 해석하고 사유하고 반응하고 문답해야 한다. 그러니까 언어는 단일한 의미나 명확한 경계는 없으며 단지 유사한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있을 뿐이고 맥락적 용법 그리고 상호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언어는 유희일 뿐이라거나 언어는 아무렇게나 쓰이는 사소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언어게임과 반대되는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