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백년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발전을 발판으로 비자본주의적 사회조직들을 필요로 하지만," "자체의 존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조건을 동화시킴으로써 발전한다."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조직들은 자본주의가 자랄 비옥한 대지를 제공하고 자본은 그런 조직들의 잔해를 먹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이런 비자본주의적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본축적은 이런 배지(培地)를 대가로, 즉 그 배지를 먹어치우면서 진행된다.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역설은,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 먹고 살아가는 뱀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의 운명이기도 하다. 최근 일이십년은 꼬리와 위장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어 '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차이가 점점 더 불분명해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몰랐던 용어를 사용해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자산 탈취(asset stripping, 재정 위기에 처한 회사를 헐값에 사서 그 회사의 자산을 수익이 되는 대로 팔아치우는 것)를 통해 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자산 탈취는 '적대적 인수 합병' 같은 일반적인 행태를 통해 최근에 드러난 관행이며, 새롭게 탈취할 자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관행이 전지구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하면 조만간에 공급자가 고갈되거나, 관행 자체가 유지되기에 필요한 수준 이하로 공급자가 줄어든다. 탈취되는 자산은 다른 생산자들의 노동이 낳은 결과다. (...)
다시 말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어느 한 유형의 자본주의가 식량 고갈로 사멸하는 모습, 즉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otherness)'의 마지막 풀밭까지 먹어치우고는 굶어죽는 모습을 예견했다. 그러나 1백년이 지난 후 근대성이 지구를 정복하면서 나타난 치명적인,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인간쓰레기(human waste)를 처리하는 산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상황인 것 같다. 자본주의 시장이 정복한 새로운 전진기지마다 땅과 일터, 공동체적 안전망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무리에 수많은 사람이 새로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레미 시브룩은 오늘날 자기 땅에서 추방당해, 가장 가까운 거대도시에서 빠르게 팽창 중인 빈민촌에서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전지구적 빈민의 곤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빈민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부자들이 그들을 쫓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배후지의 자원이 고갈되거나 용도가 변경되어 그곳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작하던 땅은 비료와 농약에 중독되어 시장에 내다 팔 잉여 농산물을 더 이상 내놓지 못한다. (...) 땅은 해변 휴양시설이나 골프장을 지으려는 정부에 매입되거나, 농산물을 더 많이 수출하려는 구조조정 계획에 압력을 받는다. (...) 사람들이 언제든 연료를 구하거나 열매를 따거나 집을 수리할 대나무를 구하던 숲은 출입 금지 구역이 되어 사설 경비업체의 제복을 입은 경비들의 감시를 받는다."
(...) 금융과 상품 및 노동시장, 자본에 의한 근대화, 그리고 근대적 생활 양식의 전지구적 확산으로 이 지구가 새로운 포화 상태를 맞게 되면서 두 가지 직접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 이미 근대화되었거나 현재 근대화되고 있는 비교적 소수의 잉여인간(human surplus)-근대적 삶의 방식이 확산되면서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는,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의 인구이며, 노동시장이 거부하고 시장 중심 체제가 배제한, 재활용 장치의 처리 용량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과잉인구- 밀집지역들을 정기적으로 제때에 비우고 깨끗이 청소할 수 있게 해주던 과거의 배출구들이 차단된 것이다. (...)
클리퍼드 기어츠는 "힘 있는 자들의 가치에 복종시키려고 힘을 사용하는 것"과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 공허한 관용"이라는 두 대안 사이에서 현재 어떤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했다. 즉, 복종을 강요하는 권력뿐만 아니라,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당혹감은 물론, 그들의 선심 쓰는 척하는 하는 태도에 모욕감을 느낀 자들의 분노를 달래는 데 사용한 '관용'이라는 제스처 역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일단 잉여인간을 배출할 통로가 막히면 모든 것이 변한다. '불필요한' 인구가 내부에 남아서 '유용하고' '적법한' 나머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상'과 '비정상', 일시적인 박탈과 궁극적인 '쓰레기' 판정은, 그것이 과거에 인식되던 방식처럼, 상대적으로 소수에만 국한되기보다는 모든 이들의 잠재적인 전망이 된다. (...)
한번 난민은 영원한 난민이다. (...) 지구는 이제 포화상태다. 이는 특히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를 발달시키는 등 전형적인 근대화 과정들이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따라서 '쓰레기'도 도처에서 만들어지고 또 점점 많이 배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 <모두스 비벤디-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지그문트 바우만 · 후마니타스 · 2010년 · 원제 :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2006년) p.4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