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팍한 성격을 지닌 실존 철학의 시조면서 위대한 사변 철학의 고약한 상속자인 쇼펜하우어는 절대적 개인주의의 동굴과 크레바스에 대해 타의 주종을 불허할 만큼 정통했다. 그의 통찰은 결국 개인은 형상에 불과할 뿐 '물 자체(Ding an sich)'는 아니라는 사변적 명제에 가담하게 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4권 각주에는 이렇게 써있다.
"모든 개인은 한편으로는 인식의 주체이다. 다시 말해 개인은 객관 세계 전체의 가능성을 보완하는 조건인 것이다. 다른 한편 개인은 개개 사물 속에서 객관화하는 동일한 의지가 그때그때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이러한 이중성이 대자적인 통일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휴식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인식이나 의지의 객체로부터 독립하여 즉자적인 우리 자신을 의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시도해 보기 위해 우리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 인식이 내면으로 향하면서 우리 자신을 한 번이라도 완전히 성찰하려 할 경우, 우리는 지반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게 되고 우리는 유리로 만든 텅 빈 공 같다고 느끼게 된다. 그 빈 공간에서는 어디에서 오는지 알 길이 없는 한 음성이 말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붙잡아 보려 하지만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실체 없는 유령만을 붙들 뿐이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순수한 자아'라는 신화적 환영이란 '텅 빈 무(無)'라고 이름 붙였다. 순수 자아는 추상인 것이다. 근원적인 실체서, 단자로서 나타난 것은 사회적 과정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사회적 행위에서 비로소 얻게 된 결과물이다. 절대적인 것으로서 개인이란 소유 관계의 단순한 반성 형식인 것이다. 그 개인 안에서 하나의 유기체가 사회 전체보다 그 의미에서 선행한다는 허구적 요구가 제기되며 개인의 우연성을 진리의 척도로 내놓게 되는 것이다.
자아는 사회와 뒤엉켜 있을 뿐만 아니라, 자아의 생존은 사회 덕분이다. 자아의 모든 내용은 사회에서 또는 객체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아가 자유롭게 사회 속에서 자신을 펼치고 사회를 반영할수록 자아는 풍요로워지지만, 자아를 원천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자아를 가두고 경직시키는 것은 자아를 제한하고 축소시키며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 자아란 존재론적 근거에서 언급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신학적으로 오직 '신과 닮은 꼴'이라는 이름을 빌려서나 가능할 지 모른다. (...)
- <미니마 모랄리아>(테오도르 아도르노 · 길 · 2005년 · 원제 :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a"digten Leben, 1951년) p.205~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