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틀러에게 젠더는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성욕성은 욕망의 문제와 연결된다. 패러디적 정체성이란 위장, 가장, 가면무도회처럼 우너본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모사에 대한 모사로서, 기원 없는 모방이란 의미에서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젠더의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를 통해 통일된 젠더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규제적 실천의 효과이다. 따라서 젠더는 몸의 반복된 양식화이며, 본질과 존재의 자연스러운 외관을 산출하기 위해 오랜 시간 응축되어온 매우 단단한 규제적 틀 속에서 반복되는 일련의 행위이다.
기존에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섹스는 이제 수행적으로 규정된 의미화로 드러난다. 성의 문화 안에서 이성애적 구조물의 반복은 젠더 범주를 탈자연화하는 동시에 그 범주를 동원하는 파면적인 장소가 된다. 예를 들어 부치나 팸이 생물학적 여성의 범주 안에서 이성애적 구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에 대해 버틀러는 이미 여성이 여성적 여성/남성적 여성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남녀의 이분법적 구도를 허무는 것이며 젠더 교차적 동일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성적 여성(부치)/여성적 여성(팸)이라는 이분 구도는 역설적으로 말해서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으로서의 여성과 강박적인 문화의 압력에 의해 형성되어가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그 안에 이미 함축하고 있다는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린다 허천은 패러디란 비판적 거리를 가지고 원전을 모사하거나 조롱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원전 없는 모방이라는 의미에서, 모사물은 이미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를 허무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도 연관된다. 버틀러는 허천의 패러디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끌어와 모방이라는 행위 자체가 원전의 진본성이나 권위를 손상시켜 더 이상 원전/모방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치 않다는 근거로 설명한다.
젠더 패러디라는 개념은 패러디적 정체성이 모사하는 원본을 가정하지 않는다. 사실 패러디는 정체성이 모사하는 원본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젠더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이 환영에 대한 환영, 언제나 이중적 의미에서 비유되는 타자에 대한 변형으로 구성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젠더 패러디라는 젠더 자체를 양식화한 후 원래의 정체성은 그 자체가 기원 없는 모방이라는 것을 그러낸다. (...)
- <젠더 트러블-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주디스 버틀러 · 문학동네 · 2008년 · 원제 : Gender Trouble, 1990년) p.24~25 <옮긴이 조현준의 해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