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John Locke, 1632년~1704년)는 영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다. 로크는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로 평가를 받지만, 사회계약론도 동등하게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사상들은 인식론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들은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뿐만 아니라 여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미국 독립 선언문에 반영되어 있다.
로크는 1632년 ‘섬머셋셔(Somersetshire)’의 작은 마을 ‘라잉턴(Wrington)’에서 법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청교도식의 엄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유년시절은 브리스톨 근교의 ‘펜스포드(Pensford)’에서 보냈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652년 옥스퍼드 대학의 크리스트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언어, 논리학, 윤리학, 수학, 천문학을 두루 공부하면서 데카르트 철학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그는 1656년 학사(Bachler of Art)를 받은 후 2년간 석사과정을 밟았다. 1660년 옥스퍼드 대학의 튜터로 5년간 활동한 후 1664년경부터 과학, 특히 의학을 연구하였다. 1665년에서 1666년 공사 비서로서 독일의 브란덴부르크에 머물렀으며, 이를 계기로 로크는 약 10여년간 정치무대에서 활동을 한다. 처음 백작 에쉴리(Ashley)의 서기로 발탁되어 1675년에는 심지어 무역 식민위원회의 서기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1675년에서 1679년 주요 저서인 <인간 오성론>의 저술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로크는 심한 천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후 프랑스의 몽펠리에르에서 약 4년간에 걸쳐 휴양 생활을 한 후 1679년 영국으로 돌아온다. 1689년 명예 혁명에 의한 윌리엄 3세의 즉위로 귀국하여 1690년 공소원장이 되고, 망명 중 집필한 <인간 오성론>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1700년 에식스에 은퇴하였다가 그곳에서 1704년에 사망하였다.
로크의 저서로는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그의 主著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그리고 <관용에 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등이 있다.
□ 철학 사상
그는 인식론의 창시자이며 계몽 철학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그의 정치·교육·종교 등의 사상은 영국과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처음에는 데카르트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나, 후에는 데카르트의 본유 관념을 맹렬히 비판하며, 관념의 경험적 발생을 주장했다.
그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경험 이전의 이성(본유 관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백지(tabura rasa)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은 모두 경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감각에 의하여 ‘달다’, ‘짜다’, ‘희다’, ‘둥글다’ 등의 단순관념을 가지게 되며 단순관념이 결합하여(붉다+사과)하여 ‘붉은 사과’라는 복합관념이 생긴다. 단순 관념은 사물에 의해 자극되어 생기지만 복합관념은 인간이 가진 오성(understanding)이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편 개념(일반 개념)은 그저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어서 이름 뿐이라는 ‘유명론’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로크에게도 딜레마가 있었다.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질적 실체’가 있어야 하지만 물질적 실체는 주체에 다라 각각 다르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분명 어떤 사과가 있는데 어떤 이는 ‘붉다’고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노랗다고 경험한다면 이 사과는 붉은 것인지, 노란 것인지 확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붉든 노랗든 경험되었으니 그 사과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데도 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크는 주체에 따라서 다르게 경험하는 빛깔, 냄새 등의 주관적 성질을 "제2성질"이라고 하고, 주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느끼는 물리적인 연장, 고체성, 운동 등의 객관적 성질을 "제1성질"이라고 했다.
제2성질이 경험 안에 있다면, 제1성질은 물체 자체에 속하는 성질이다. 진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제1성질 때문이다. 제1성질이 동일하게 경험되는 이유는 사물들이 그런 성질을 타고났기 때문인데, 이는 일종의 "본유성질"이다. 로크의 제1성질은 실재하는 것이며, 이 실재의 대상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경험가능성에 놓인다는 점에서 이전의 관념적 실재론과 달리 경험적·유물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크가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을 유명론의 입장에서 비판하며 주체로부터 본유관념을 떼어내지만 진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는 ‘본유성질’이란 이름으로 대체시킴으로써 다시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되돌아와 버린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제1성질이 정말 물질 그 자체에 속하는 객관적 성질일까? 버클리와 흄에 의해 로크의 제1성질도 관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정치 사상
그의 정치사상은 전제주의에 반대하고, 국가는 개인의 생명·재산·자유를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가 성립에 관해서는 계약설을 택하고, 의회적인 민주 정치와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분립의 기초를 만들었다.
로크는 처음으로 헌정민주정치와 자연권리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의 정치이론들은 미국,영국,프랑스 등 여러 서방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미국에서는 신성시 여겨졌고 민족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의 사상은 미국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후에 독립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로크가 프랑스에 끼친 영향은 더욱 엄청나다. 로크의 사상이 프랑스에 전해진 후, 그의 사상은 훗날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 프랑스 대혁명 등의 대사건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로크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신으로부터 주어진 정당함에 따라 공평하며, 권리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로크는 인간은 일을 통하여 신이 주신 자연을 주변 사람의 동의 없이 소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소유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라 함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소유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혼자 먹을 만큼 이상의 사과를 얻어 그 사과를 썩게 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여기서 남은 잉여생산물에 대한 물물교환이 생겨나며, 그 물물 교환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돈이 발명되었다. 금, 은, 돈과 같은 것들은 썩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법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재산을 증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크는 또한 자연 속에서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내 재산이 도난을 당했을 시에는 도둑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재산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다른 어떠한 기관이 필요하였는데, 그 기관을 만들기 위한 중간 과정이 바로 사회계약설이다. 사회계약설에 의하여 국가는 성립되었으나 국가는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 아니며 입법부가 정한 법에 의해 행정부에서 통치되는 기관이었다. 국가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 국민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 계약을 성립한 국민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는 것도 주장했다.
존 로크의 <통치론>은 홉스의 절대군주론에 의거한 개념과는 크게 다른 사회계약론을 담고 있다. 이는 참주에 대항하는 저항권을 발휘할 수 있다는 논의와 인민은 특정한 종류의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결국 인민은 정부를 개조하거나 전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유주의의 핵심적 사상가로 통용된다.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본유적이고(innate) 이성적인 본성이 구성하는 자연법에 대한 그의 이해와 뒤섞여 있으며, 이것은 <인간 이해력에 관하여>라는 논문 속에서 더 잘 정리되었다. 로크는 종종 그보다 약 한세대 정도만 앞서는 홉스와 종종 대비되었으며, 그들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로크의 신념과 홉스의 신념이 다르다는 것에 있었다. 로크는 홉스와는 달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며, 그 자체에 내재하는 성향에 의해 악과 탐욕으로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 대지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부양과 안락을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지에서 자연적으로 산출되는 모든 과실과 거기서 자라는 짐승들은 자연발생적인 작용에 의해서 생산되기 때문에 인류에게 공동으로 속한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자연적인 상태에 남아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적인 지배권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용하도록 주어진 이상, 그것들을 특정한 사람이 일정한 용도에 맞게 사용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수취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중략]… 비록 대지와 모든 열등한 피조물은 만인의 공유물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신(人身)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그 사람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신체의 노동과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자연이 제공하고 그 안에 놓아 둔 것을 그 상태에서 꺼내어 거기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무언가 그 자신의 것을 보태면, 그럼으로써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것은 그에 의해서 자연이 놓아둔 공유의 상태에서 벗어나, 그의 노동이 부가한 무언가를 가지게 되며, 그 부가된 것으로 인해 그것에 대한 타인의 공통된 권리가 배제된다. …[중략]…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법하다. 만약 대지의 도토리나 다른 과실 등을 주워 모으는 것이 그것들에 대한 권리를 준다면,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만큼 많은 양을 독점하게 될 것이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하겠다. 우리에게 이런 수단을 통해서 소유권을 부여하는 동일한 자연법이 또한 그 소유권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6:17)라는 구절은 영감에 의해 확인된 이성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주셨는가? 즐길 수 있는 만큼. 어느 누구든지 그것이 썩기 전에 삶에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주셨다. 곧 그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자신의 소유로 확정할 수 있는 만큼 주셨던 것이다. 그것보다 많은 것은 그의 몫을 넘어서며, 다른 사람의 몫에 속한다.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썩히거나 파괴해버리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중략]… 이런 식으로 토지를 개량함으로써 그 일부를 수취하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많은 토지가 남아 있고, 아직 토지를 가지지 못한 자가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토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이 울타리를 치는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토지가 적게 남아 있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남겨놓은 사람은 전혀 아무 것도 취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이 물을 잔뜩 퍼마셨다고 해서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갈증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전과 다름없는 강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지든 물이든 둘 다 충분히 남아 있는 경우라면 사정은 전적으로 동일하다. …
(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6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