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난 모든 것이 자신들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킨 다음, 사람들은 모든 사물들 안에서 그들에게 가장 유용했던 것을 특별한 것으로 판단해야 했고, 또한 그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었던 것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개념들, 다시 말해서, 악, 질서, 혼란, 뜨거움, 차가움, 미, 추를 형성해야 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에 이로부터 칭찬과 비난, 죄와 벌이라는 개념들이 생겨났다. (중략)
그들은 건강과 신의 숭배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을 선하다라고 부르고, 그것들에 반대되는 것은 악하다고 부른다. 사물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사물들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사물들에 대해 아무 것도 확언하지 않으며 또한 상상을 지성으로 착각하기에 사물들 안에 질서가 있다고 확고하게 믿는다. 사물들과 그 자신들의 본성에 대해 무지한 채로 말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감각에 의해 우리에게 표상될 때 그것이 상상하기 쉽고, 결과적으로 기억하기 쉽게 배열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의 질서가 잘 잡혀 있다고 말하고, 우리는 사물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거나 질서 있다고 말한다. 그 반대 경우면 잘못 배열되어 있다거나 혼란스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마음을 끌기 때문에 마치 질서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서 자연 안에 있는 어떤 것이기나 한 것처럼 혼란보다 질서를 더 선호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식으로 신에게 상상을 귀속시키고 있음을 모른 채, 신이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신이 인간의 상상을 다행히도 예견해서 사람들이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모든 사물들을 배열했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수많은 상상을 훨씬 벗어나는 수많은 것들, 그리고 상상의 취약함 때문에 상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다수의 것들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아마도 그들의 주장을 단념케 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으로 또 다른 개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에 영향을 끼치는 상상의 방식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무지한 자들에 의해 사물들의 주요한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모든 사물들이 자신들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한 사물의 본성의 영향을 받는 바로 그만큼 그것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하고 또한 건강하다거나 상해서 부패되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눈을 통해 표상되는 대상들에 의해 신경들이 수용하는 운동이 건강을 가져다 준다면, 그것을 야기하는 대상들은 아름답다고 불리고, 그 반대의 운동을 흉하다고 불린다. 다음으로 코를 통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거들을 그들은 향기롭거나 악취가 난다고 부른다. 혀를 통해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을 달콤하다거나 쓰다고 부르고, 맛 있거나 맛 없다고 부른다. 또한 촉각을 통해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을 딱딱하거나 연하다고, 거칠거나 매끄럽다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귀를 통해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은 소음, 소리, 조화로운 음을 낸다고 일컬어진다. 이것 중 마지막 조화로운 음은 신 역시 조화에 매우 기뻐한다고 믿게 할 정도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천체의 운동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던 철학자들이 없지 않다.
이 모든 것은 각각의 사람이 뇌의 상태에 따라 사물을 판단했으며, 혹은 오히려 상상의 상태들을 사물들로 착각했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만큼 그렇게 많은 논쟁들이 일어났고, 이런 논쟁들로부터 결국 회의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신체는 여러 점에서 일치하지만 또 여러 점에서 불일치하며, 따라서 한 사람에게 졸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에게는 질서 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이며, 한 사람에게는 유쾌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불쾌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중략)
모든 사람은 항상 말한다. "사람의 머릿수만큼 의견들도 많다", "모든 이는 자신의 의견으로 가득 차 있다", "취향의 차이만큼이나 생각의 차이가 있다." 이런 문구들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두뇌 상태에 따라 그것에 대해 판단함을 명백히 보여준다. 사람들이 사물을 이해했다면, 그건 모두에 매혹되지는 않더라도, 수학자가 증언했듯이 적어도 그것들을 납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곤 하는 모든 개념들이 단지 상상하는 방식들에 불과하며 어떤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상상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 일반이 마치 상상 없이도 현존하는 존재자인 것처럼 이름을 갖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상상의 존재라고 부르겠다. (중략)
만약 모든 것이 가장 완전한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따라나온다면 자연 안에 그렇게 많은 불완전한 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시 말해 내내 악취를 풍길 정도의 사물들의 부패나 혐오, 혼란, 악, 죄 등을 불러 일으키는 추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것은 내가 말했던 방식으로 손쉽게 논박된다. 사물들의 완전성은 그것의 본성과 역량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물들은 그것이 인간의 감각에 기쁨을 주느냐 아니면 거슬리느냐, 혹은 인간의 본성에 유익하느냐 대립하느냐에 따라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한 것도 아니다.
왜 신은 모든 사람들을 이성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다음 외에는 대답할 것이 없다. 신에게는 가장 낮은 수준의 완전성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완전성까지 갖춘 모든 것을 창조할 질료가 결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더 적절하게 정리하자면 정리 16에서 증명했듯이 자연 법칙들 자체는 무한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할 만큼 풍부하기 때문이다. (...)
- 『에티카』(B. 스피노자 · 책세상 · 2006년 · 원제 :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77년) <제1부 신에 대하여> p.22~27